[26일 동안의 광복] 다큐멘터리 광복, 그날
한반도의 오늘을 결정지은 시간들 / 길윤형 지음
갈등의 시작
가장 큰 불안요소는 여운형과 송진우의 합작 불발로 발생한 건국준비위원회의 좌편향이었다. (145)
이임수가 말했다. “여 선생, 조심해야죠. 헌병이 길거리에 득시글거리잖우. 왜 이렇게 좌익만 만나는 기요? 주의자 서클은 안됩니다.” (146)
상하이 시절. 여운형의 ‘끈끈한 동지’였던 장덕수는 1919년 10월 고가 척식장관이 여운형을 도쿄로 불러들여 회유를 시도했을 때 통역으로 맹활약했다. 하지만 흥업구락부 사건을 계기로 전향한 뒤로는 눈뜨고 봐줄 수 없는 추태를 보였다.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을 위해 피를 흘리라며 자신의 보성전문학교 제자들을 끌어내 학도병으로 지원시킨 것이다. 또한 이종형은 “오카 경기도 경찰부장의 앞잡이”라는 평가를 얻을 정도로 독립운동가와 그 가족을 박해한 악질 밀정이었고, 윤치영 역시 흥업구락부 사건 이후 변절한 뒤 〈황군의 무운장구를 축도함〉 따위의 낯 뜨거운 글을 발표하며 식민통치에 부역한 인물이었다. 해방이 됐다고 안면을 바꾸어 발빠르게 계동으로 찾아온 이들과 웃으며 악수할 순 없었다. 여운형에게 외면당한 이들은 이후 한국민주당을 결성해 여운형에게 거꾸로 친일 혐의를 덧씌우는 정적이 된다. (146)
정백, 이강국, 최용달, 박문규 등 공산주의자들은 많은 투쟁 경험을 가진 “너무나 날카로운 정예분자들”이었다. 이런 공산당 출신의 용장들은 몽양 주변에서 타고난 실력과 조직력을 발휘해 조금씩 영향력을 확대해 나간다. 그에 비해 이만규, 이여성, 이상백, 양재하, 최근우 등 여운형의 측근들은 정치나 정치조직에 대해 뚜렷한 주관이나 경험이 없는 신사들이었다.
결국 건준의 주도권은 여운형의 측근 모임이라 할 수 있는 건국동맹이 아닌 단단한 철외 조직력으로 뭉친 공산주의자들에게 서서히 넘어가게 된다. (147)
건준은 이후 공산주의자들에게 장악된다. 건국준비위원회의 좌편향은 이후 안재홍, 이인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좌우합작 움직임에 큰 걸림돌로 작용한다. 이 좌우합작이 실패한 뒤 안재홍이 건준을 떠나자 남은 좌익들은 해방 정국에 일대 파란을 일으키는 인민공화국 건국을 통해 좌우대립을 돌이킬 수 없는 증오와 상호불신의 소용돌이로 몰고 가게 된다. (148)
해방 직후 송진우를 둘러싼 우파 민족주의자들 중에서 좌우합작에 가장 적극적이었던 이는 일제 강점기 3대 인권변호사라 불리던 이인이었다. 1866년 대구에서 태어나 메이지대학 법학부를 졸업한 이인은 1922년 일본변호사시험에 합격했다. 이듬해 5월 경성에서 변호사 개업을 한뒤 허헌, 김병로 등과 함께 의열단 사건을 시작으로 독립운동을 벌이다 잡혀온 이들의 변호를 떠맡다시피 했다.
해방 무렵 이인은 인제가 독립운동가들의 씨를 말리기 위해 날조한 조선어학회 사건에 연루되 큰 고초를 치렀다. 혹독한 구타와 고문을 당하는 과정에서 같이 검거된 이윤재와 한징 등 두 명의 국어학자가 숨졌다. 이인 역시 말라리아와 협심증에 시달렸다. (148-149)
이인은 자존심이 강하고 꼿꼿한 송진우보다 더 현실적이고 열정적인 인물이었다. 이인은 송진우에게 “정보의 암미(暗味)했음과 동지들과 한마디 상의도 없이 독단으로 아쿠타의 말을 거절한 것은 실수”라고 쏘아붙였다. 또한 일제의 항복이라는 거대한 사건에 대응하는 송진우의 정세판단이 어둡다고 결론 내렸다. 좌중의 반응도 비슷했다. 엔도의 제의를 수락한 여운형은 해방 첫날부터 거침없이 정국을 주도하고 있었지만, 자신들은 송진우의 사랑방에 모여 냉수잔을 부딪힐 따름이었다. (151)
송진우의 집에 모인 우익 인사들의 불안감... 여운형, 안재홍이 “일제말기 어용괴뢰정당의 이름을 그대로 이어받는다느니 하는 소문이 도는 등” 친일적인 행보를 보이지 않을까 하는 우려였다. 그러나 진짜 이유는 여운형의 독주에 있었다. (152)
“정치는 현실인데 몽양과 민세가 비록 불순하기는 하나 불과 반일 간에 몽양의 천하가 된 것처럼 그 기세가 충천하는 듯 합니다. 만일 이대로 간다면 전도가 암담하지 않겠소!” (152)
좌우합작을 조선 내 모든 정파가 한뜻으로 뭉쳐 건국작업에 참여한다는 ‘고고한 명분’은 물론, 정국 주도권을 좌우 어느 한 편에 넘겨서는 안된다는 ‘실리적 계산’에 따라 추동되어 갔다. (152-153)
1943년 11월 카이로 선언... “조선 인민의 노예상태에 유념해, 적절한 시기(in due course)에 조선이 자유롭게 독립될 것을 결의한다.” (155)
조선의 전후 운명을 사실상 결정한 카이로 선언의 뼈대가 완성된 것은 1943년 11월 23일 루스벨트와 장제스 중국 총통의 만찬에서였다. 미국에선 루스벨트와 그의 외교 고문인 해리 홉킨스(Harry Hopkins, 1890-1946)가 참석했고, 중국에선 장제스와 영어가 능통했던 부인 쑹메이링, 왕충후이 비서장이 자리를 지켰다. 이 자리에서 장제스는 “조선에 독립을 부여할 필요성을 강조”했고, 루스벨트는 이에 원칙적으로 동의했다.
미국의 초안엔 조선독립에 대한 문구가 “조선을 ‘가능한 가장 빠른 순간’(at the possible earlist moment)에 자유 독립시킨다”였다. 하지만 지론인 신탁통치를 포기할 수 없었던 루스벨트가 홉킨스의 초안에 담긴 ‘가장 빠른 순간’이란 표현을 ‘적절한 순간’(at the proper moment)으로 바꿨다. 조선에 먼저 신탁통치를 실시한 뒤 적절한 순간이 오면 독립을 인정하겠다는 의미를 함축하도록 문구가 바뀐 것이다.
이후 영국의 2차 개입이 시작된다. 인도 등 거대한 식민지의 연합체인 ‘대영제국’을 유지하고 있던 영국에게 조선 독립 문제는 식민지 정책의 근간을 흔들 수 있는 민감한 이슈였다. 3개국의 입장에 조율된 것은 11월 26일 오후 루스벨트의 숙소에서 이뤄진 대표단 회의에서였다.
알렉산더 카도간(Alexander Cadogan) 영국 외무차관은 “일본 통치에서 벗어나게 한다”라는 애매하고 추상적인 표현으로 바꾸자고 주장했다. 중국 대표인 왕충후이는 “조선은 일본의 침략으로부터 병탄됐고, 일본의 대륙정책은 조선을 병탄함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단지 일본의 통치에서 벗어나게 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고 반박했다. 이에 카도간은 조선 관련 문구를 아예 선언에서 들어내자고 맞섰다. 결국 해리먼이 조선 독립은 루스벨트의 생각을 반영한 것이라며 중국의 손을 들어줬다. 대신 루스벨트의 원안을 윈스턴 처칠이 더 유려한 문체로 다듬기로 했다. 제2차 세계대전 회고록으로 훗날 노벨문학상을 수상하게 될 문필가의 제안에 미국과 중국도 동의했다. 최종 결론은 다음과 같다.
“상기 3대국은 조선 인민의 노예 상태에 유념해, 적절한 시기에 조선이 자유롭게 독립될 것을 결의한다.”
정병준 이화여대 교수는 루스벨트 수정안과 최종안을 비교하며 세 가지 문제점을 지적했다. 1) 조선 인민을 노예상태로 만든 일본이라는 가해 주체를 삭제했고, 2) 노예상태의 정도와 상황을 묘사하는 ‘기만적’(treacherous)이라는 수식어가 사라졌으며, 3) 조선의 자유와 독립 회복을 ‘일본의 몰락 후’에 한다는 시점이 모호해졌다는 것이다. 즉 카이로 선언의 조선 조항은 가해 주체, 독립 시점, 독립 방법 등에서 추상적으로 합의됐다는 지적이다. (155-158)
루스벨트는 1945년 2월 8일 얄타에서 열린 스탈린과의 정상회담에서 “소련, 미국, 중국 대표는 구성된 신탁통치를 생각하고 있다. 이 문제와 관련한 우리의 경험은 자치를 준비하도록 50년의 시간을 갖게 한 필리핀 뿐이다. 조선의 경우는 20년에서 30년 정도의 기간이 좋지 않을까 한다”고 말했다. 스탈린은 “신탁통치 기간을 짧을수록 바람직하다”면서 신탁통치 자체엔 원칙적으로 동의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158)
해리 홉킨스는 1945년 5월 26일 모스크바에서 스탈린과 회견했다. 갑작스레 타계한 루스벨트가 생전에 스탈린과 합의했던 여러 악속의 유효성을 확인하고 후임 대통령 해리 트루먼이 두 달 뒤 참석한 포츠담 회담의 의제를 논의하기 위해서였다. 홉킨스는 회담 셋째 날인 28일 한반도 신탁통치와 관련해 얄타에서 비공식 논의가 있었음을 상기시킨 뒤 “신중한 검토 끝에 미국 정부는 조선에 소련, 미국, 중국, 영국에 의해 구성되는 신탁통치를 실시하는 게 바람직하다는 결론에 도달했다”고 말했다. 그에 앞서 미 국무부는 “조선의 해방은 미국 내지 소련에 의해 단독으로 혹은 미, 중, 소, 영에 의해 공동으로 이뤄질 것인데 어떤 경우든 4개국은 조선의 민정에 동등한 권한으로 참가하고 이를 대표한다”며 “신탁통치 기간은 대일전쟁이 공식 종결된 뒤 5년 동안 이뤄질 것”이라는 내용이 담긴 보고서를 작성했다.
홉킨스는 보고서 내용의 일부를 언급하며 “(신탁통치의) 기간은 확정되지 않았다. 5년 내지 10년이라는 것은 확실하지만 가장 길게는 25년이 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스탈린은 “4개국에 의한 신탁통치가 바람직하다는 데 완전히 동의한다”고 밝혔다.
안타깝게도 7월말 일본에게 ‘무조건 항복’을 요구한 포츠담 회담에서 이 합의를 구체화하기 위한 미소간 논의가 전혀 이뤄지지 못했다. 그로인해 조선인들은 한반도에서 구체적으로 누가 어떻게 신탁통치를 시행할 것인지, 카이로 선언에 담긴 ‘적절한 시기’란 모호한 표현에 대한 연합국 내부의 명확한 합의를 읽어니재 못한 상태에서 해방을 맞을 수밖에 없었다. 이를 둘러싼 ‘공백’은 결국 한반도의 운명을 분단으로 내몰게 된다. (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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