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일 동안의 광복] 다시 한번, 합작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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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이야기]

[26일 동안의 광복] 다시 한번, 합작으로

by [수호천사] 2022. 8.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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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일 동안의 광복] 다큐멘터리 광복, 그날

한반도의 오늘을 결정지은 시간들 / 길윤형 지음

 

다시 한번, 합작으로

 

여운형에게 선수를 빼앗긴 우파는 우파대로 독자 행보에 나서기 시작했다. 좌파들이 중심이 된 건국준비위원회에 대항하기 위해 곧 진주하는 연합국을 위한 환영행사를 준비하기로 했다. 이를 위한 준비위원회를 꾸리는 행사가 17일 오후 1시 반도호텔에서 열렸다.

이날 모인 100여 명의 인사들은 연합국환영준비위원회와 충칭에서 돌아오는 임정 요인들을 맞이하기 위한 임시정부환영준비위원회를 만들고, 위원장으로 민족대표 33인 중의 하나였던 천도교의 원로 권동진을 선출했다. 그를 도와 실무를 담당할 사무총장으로는 조병옥이 임명됐다. 이후 건강문제로 외부활동이 힘든 권동진을 대신해 부위원장이던 이인이 위원장 역할을 맡게 된다. (228)

 

재차 합작에 나섬...

김병로, 백관수, 이인이 재차 여운형안재홍과 회담해야 한다고 뜻을 모았다.

이들이 재차 합작에 나선 배경엔 김대우(1900-1976) 경북지사를 내세운 총독부의 설득도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아베 총독은 15일 천황의 육성방속을 들은 뒤 당시 조선인 지사 중에 가장 실천력이 있는 김대우 지사에게 급히 경성으로 올라오라’”고 연락했다. 김대우는 16일 경성에 도착해 그날 바로 엔도 정무총감, 니시히로 경무국장과 만나 여운형과 송진우의 합작을 위해 움직였다... 총독부는 여운형과 송진우의 합작을 성사시켜 치안유지의 범위를 넘어선 건국준비위원회의 과격한 움직임을 제어하려 했던 것 같다...

여운형은 합작의 필요성에 동의하며 박석윤, 최근우, 정백을 합작위원으로 추천했다. 송진우는 기쁘게김대우 지사와 만났지만, “개인적으로, 여운형과 함께하는 것만은 이해해 달라”(함께 하기 어렵다는 의미)고 말하면서, 자기쪽 위원으로 장덕수, 백관수, 김준연을 제시했다. 김대우의 구상은 여운형, 안재홍, 송진우 3인에 유길준의 둘째 아들로 친일파였던 유억겸, 기독교계의 친일 인사인 양주삼, 천도교 간부 등 유망한 조선인들을 묶어 총독부가 이들에게 재차 치안유지협력을 요청한다는 것이었다. (229)

 

안재홍은 15개월 정도 재직했던 미군정 민정장관직을 사임한 뒤 신천지19487월호에 반포한 기고에서 당시 애통한 마음을 절절하게 읊었다. 좌익들이 예전 신간회 사태처럼 내부 헤게모니 투쟁을 벌여 운동 자체를 무너뜨리지 않을까 노심초사한 것이다... 문제는 해체과정이었다. 갈등의 원인은 두 가지로 하나는 주도권 싸움이었다... 또 다른 이유는 합작 대상인 민족주의 세력에 대한 평가였다... 경계 대상 1호는 송진우였다. 공산주의자들은 송진우가 19281월에 신간회에 가입하자 끔찍한 폭력을 휘둘렀다. 동아일보함경북도 지국장회의장에 입장하는 그에게 몽둥이 찜질을 가한 것이다. 송진우는 피를 흘리며 바닥에 쓰러졌다... 1930년 들어 신간회 해체론이 본격으로 거론되었다. 직접적인 계기는 광주학생운동으로 공석이 된 지도부를 메우기 위해 김병로가 193011월 중앙집행위원장으로 선임된 것이었다. 김병로 집행부는 신간회의 급진적 경향을 온건한 방향으로 돌리려 노력했다... 19315월 열린 전체회의에서 기습 해산됐다. 좌는 우를 개량주의적 친일 부르조아지라 멸시했고, 우는 좌를 신간회를 해체시킨 좌익 소아병에 걸린 사람들이라 저주했다. (230-234)

 

건준이 정당한 정치적 절차를 거치지 않고 기습적으로 결정됐다는 이인 등 3(김병로, 백관수, 이인)의 주장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여운형은 16일 오전에 이인의 방문을 받았을 때와 같이 이를 인정했다... 우선 급한 대로 거국적으로 국내 각계 각층을 총망라한 인사들을 한 자리에 모아 건국방략을 협의하자고 합의했다. 17일 밤의 합의내용은 건국준비위원회의 절차적 정당성을 보완할 수 있는 각계각층을 총망라한 국민회의 개최였다. (235-236)

 

김병로와 백관수... 18일 건국준비위원회 본부 방문...

여운형 위원장, 안재홍 부위원장, 최근우 총무부장, 권태석 무경부장, 이규갑 재무부장과 회견... “차제에 적법적 국민대회 같은 회합을 소집해 전 국민의 총의를 반영치 못하더라도 현 상황의 응급책으로 우선 서울시내 각계각층 유지인사 혹은 각 지방에서 온 유지자들을 한군데 모아 함께 중심기관을 창설하자고 주장했다... 이들은 유억겸에게 서울시내 각계각층에 대표가 될만한 명사들을 빠짐없이 작성하는 실무작업을 요청했다... 건준 내에서 강한 세력을 구축하고 있던 공산주의자들이 들고 일어난 것이다. 이들은 유억검, 이인, 김병로 등이 작성한 55인의 명단을 거부했다...

1945818... 안재홍과 여운형의 장시간 독대...

안재홍은 여운형의 생각이 민족주의자들이 주도해 건국해야 한다는 자신의 포부와 상당히 거리가 있는 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여운형은 좌우합작의 대의엔 동의했지만, 어디까지나 자신을 중심으로 하는 좌익 주도의 건국을 원했던 것이다.

... 18일 오후 11시께, 계동 자택으로 돌아가던 여운형은 테러를 당했다. 중상은 아니었지만 몸을 추스르기 위해 시골로 내려가 정양해야 했다. 이 때문에 매일신보지면을 통해 예고했던 19일 위원회(국민대회)도 열리지 못했다. 여운형은 부상 치료를 위해 8월말까지 자리를 비우게 된다. 이는 그 자신은 물론 한반도 전체에 큰 불행이었다. 이 사건은 건준의 2인자 안재홍에게 뜻밖의 운신의 공간을 제공하게 된다.

여운형의 부재를 틈타 부위원장의 권한으로 민족주의 진영 주도 세력하의 건국이라는 소신을 한번 더 밀어붙여 볼 수 있는 기회가 생긴 것이다. (235-240)

 

건준 내부 반발로 19일 국민대회가 무산된 뒤에도 안재홍은 포기하지 않았다. 23일 권태석이 백관수의 원남동 집을 방문했다. 권태석은 서울파 공산주의자였지만 1920년대 말 신간회에 참여한 경험이 있었다. 이 무렵엔 공산주의자와 거리를 둔 채 안재홍을 도와 좌우합작에 적극 나서고 있었다.

권태석은 백관수에게 국민대회를 개최하려는 안재홍 부위원장 명의의 통첩을 보내지 못한 것을 여러 말을 동원해 해명했다. 이어 18일 합의내용을 바꿔 건준 확대위원회에 참여할 각계각층 인사에게 개별 통첩을 보내는 대신, “건준에서 그대로 추천, 발표할 수 있는 각계각층의 명사를 호천해달라고 청했다. 각계각층 인사들에게 일일이 연락해 회의 개최 사실을 통보하는 수고로움을 덜기 위해 건준에서 명단을 일괄 확정해 발표하겠다는 얘기였다. 이 제안을 접한 김병로와 박관수는 마뜩치 않았지만, 함께 합작을 추진하던 이인, 김약수, 박찬희, 김용무, 박명환 등 우익 인사들이 호양의 정신으로 이 또한 무방하다는 뜻을 밝혔다. 결국 제안을 받은 우익 진영은 25일 권태석이 동석한 가운데 건준 확대위원회에 참석할 62명을 확정했다.

안재홍의 2차 좌우합작 시도에 건국준비위원회 내부는 또다시 벌집을 쑤신 분위기였다. 혼란이 이어지자 요양 중이던 여운형이 나설 수밖에 없었다. 18일밤 안재홍과 벌인 설전에서도 알 수 있듯 여운형은 안재홍이 주장하는 민족주의 이사들이 제1선에 서고, 좌방 제군들이 뒤를 받치는민공협력에는 동의하지 않았다. 다만 건국을 위해선 각계각층의 역량을 결집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오랜 신념이었다. (240-241)

 

권태석이 우익 인사들로부터 62명의 명단을 받아온 25일 건준 집행위원회가 개최됐다. 사태 수습을 위해 여운형도 불편한 몸을 이끌고 상경해 회의를 이끌었다... 여운홍은 당시 사정에 대해 여운형이 테러를 당해 들어 앉게 되자 그 직무를 대리하게 된 안재홍이” “우익 편중(우익에선 좌익 편중이라 주장)135인의 확대위원회를 선정하여 놓고서 확대위원회를 소집할 것을 형님에게 요청하였다고 적었다... 애초에 62명이었던 명단을 135명으로 늘린 주체가 누구인지는 분명치 않지만, 여운형은 이 정도라면 자신이 주도권을 유지한 채 우익 인사들을 건준에 흡수할 수 있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242)

 

지식계급에 득죄할지언정, 결단코 노동 대중에게는 득죄하고 싶지 않다여러분 중에 단 한사람이라도 우리 위원회라든지 혹은 내 자신의 직책에 불평이 있고 내 책무를 잘 이행 못하는 점이 있다고 지적한다면 나는 이 자리에서 물러가겠다고 배수진을 쳤다. (242-243)

 

135인의 확대위원회 안은 건준 집행위원회를 통과했다. 여운형이 직을 걸고, 반대를 누르면서 아슬아슬하게 통과시킨 안이었다. (244)

 

여운형은 직을 걸고 135인 확대위원회 안을 통과시키는 결단을 내렸지만, 우익들의 평가는 달랐다. 이들은 두 번이나 약속이 지켜지지 않자 건준에 배신당했다고 생각했다. (244)

 

안재홍은 건준 내부에서 고립무원에 빠졌다... 코너에 몰린 안재홍은 8월 말에 팔당에 칩거한 여운형을 찾아갔다. 그러자 건준 내 공산주의자인 최용달과 정백이 동행을 자처했다. 행여라도 여운형이 안재홍 쪽으로 기울어질까봐 견제에 나선 것이다... 이들의 견제로 안재홍은 뜻을 이룰 수 없었다. (245-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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