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일 동안의 광복] 다큐멘터리 광복, 그날
한반도의 오늘을 결정지은 시간들 / 길윤형 지음
좌우합작, 파국에 이르다
경성에 진주하는 것은 소련이 아닌 미국이다? 건준의 잇따른 ‘약속위반’에 치를 떨던 우익 인사들은 이 무게 중심의 변화를 예민하게 포착했다... 미군 진주로 우익은 더 이상 좌익이 득세한 건준에 비집고 들어가기 위해 기싸움을 벌일 필요가 없어졌다. 동지가 아니게 된 정치세력은 적일뿐이었다. 좌우합작을 포기한 우익들은 이후 여운형과 건준을 향해 비열하다 싶을만큼 가혹한 공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267)
18일... 이인... 독자 정당 제안... 조병옥은 신중론
이튿날 이인은 김병로와 백관수를 불러냈다. 백관수 역시 우익 세력이 모여 독자정당을 만들자는 이인의 의견에 대찬성이었다. (268)
우익에겐 자신들의 취약한 도덕성을 가려줄 무언가가 필요했다. 이들은 임시정부의 ‘절대적 명분’을 빌려오기로 결심한다... 이들이 내세운 첫 번째 명분은 ‘임정봉대’, 그 다음은 무도한 여운형과 그 무리들인 ‘건준의 타도’였다. (270-271)
우익 인사들은 자신들은 “소위 건준이 천하 민심을 현혹하고 질서를 문란하여 이 천재일우의 무한 천혜(天惠)를 받은 우리 3000만 민중이 환희로 건국의 기초를 닦을 이때에 도깨비같은 무리가 백주횡횡하는 것에 분개하야 분연히 떨쳐 일어난 지사들”로 규정했다...
이들의 정체는 김병로, 백관수, 원세훈, 조병옥, 이인, 나용균, 함상훈, 김약수, 박찬희, 김용무 등을 중심으로 한 조선민족당과 유억겸, 윤치영, 윤보선, 최승만 등이 모여 만든 한국국민당이었다. 이 두 개 정당은 이틀 뒤인 “대동단결의 대의 아래 합류하기로 결정”하고 9월 6일 발기회를 개최했다. 이후 한국 정치사에 큰 족적을 남기게 될 우익 합동정당인 한국민주당(한민당)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271-272)
건준의 확대위원회는 개최 전부터 실패할 운명을 안고 있었다. 경성에 미군이 진주한다는 사실을 확인한 우익이 이미 독자활로 모색을 끝내고 건준을 ‘통합’이 아닌 ‘타도’의 대상으로 점찍고 있었기 때문이다. (273)
건준... 심각한 좌경화 (273)
건준 선언문... 〈매일신보〉 9월 3일에 실림... 발표일자는 8월 28일
동의하기 힘든 두 개의 매우 ‘낙관적인 전망’을 제시하였다.
1) 이들은 조선에 진주하는 국제세력이 조선인들의 “민주주의적 요구를 도와줄지언정, 방해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2차 세계대전의 연합국이었던 미소는 이 무렵엔 동유럽의 전후 질서 재편을 둘러싼 대립으로 ‘냉전의 초입’에 접어들고 있었다.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자국의 안전보장을 위한 완충지대 확보(소련)와 공산주의 세력의 봉쇄(미국)였다. 반세기 동안 이어질 냉전을 앞둔 미소에게 조선인들의 여러 민족적 요구는 부차적 고려 대상일 수밖에 없었다.
2) 이들은 “국내의 진보적 민주주의적 여러 세력은 통일전선의 결성을 갈망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통일전선 운운한 건국준비위원회 내 공산주의자들은 우익 민족주의자들과의 합작을 거세게 반대하며 심각한 내부 갈등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럼에도 이들은 놀리적 모순을 느끼진 않았다. 통일전선을 결성해야 할 ‘진보적 민주주의 세력’ 가운데 우익 인사들은 처음부터 배제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에게 한국민주당의 깃발아래 결집한 우익 인사들은 조선 건국을 위해 협력해야 할 대상이 아닌 “반민주주의적 반동세력”일 뿐이었다.
... 우익 인사들의 친일 행적과 관련된 건준의 지적은 ‘불편한 진실’이었지만, 이 “세력과 싸워 이것을 극복 배제”한다는 것은 상대를 용납하지 않는 극단적 사고방식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선언문은 ‘전 민족의 일치단결’을 강조해 온 여운형의 평소 신념과는 너무 다른 ‘괴이한 문서’였다. 건국준비위원회는 민족의 대동단결을 주장해 온 여운형의 영향력에서 이미 벗어나 극단화되고 만 것이다. (276-277)
해방 당일 조동호, 이영, 정백, 최용달, 이승엽, 조두원, 서중석 등은 홍증식의 집에서 재경혁명자대회를 열어 조선공산당을 재건했다. 이들은 이튿날 장안빌딩에 사무실을 꾸려, 장안파 공산당이라는 이름을 얻게 됐다. 하지만 이날 당 재건을 서두른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한동안 공산주의 운동선상에서 탈락해 있던 인사들이었다. (278)
경성으로 올라온 박헌영은 공산주의 운동을 오랫동안 지원해 온 전북 익산의 부잣집 아들인 김해균의 명륜동 집에 자리를 잡았다... 박헌영은 20일 종로구 낙원동 안중빌딩 2층에서 조선공산당 재건준비위원회를 결성했다. 이른바 재건파 공산당의 탄생이었다. (278)
박헌영은 장안파 공산당 설립을 주도한 이들에게 “탄압의 시기에는 기득의 영예에 만족하던 자들”이라 단죄했다. 결국 조선공산당은 9월 11일 박헌영의 재건준비위원회를 중심으로 통합된다... 그때까지 이강국 등이 건국준비위원회에 참여한 것은 여운형과 친소관계에 따른 ‘개인행동’이었다. 그러나 박헌영의 등장과 함께 이들은 당의 ‘조직적 결정’에 종속되어야 했다. (279)
9월 4일, 건준 확대위원회가 열린 날... 정원 135명 가운데 부로가 57명이 참석했다. 우익들이 끝내 행사를 보이코트한 것이다... 첫째 안건은 8월 3일 제출된 여운형ㆍ안재홍의 사임에 대한 토의였다... 여운형과 안재홍은 유임된다... 부위원장 1명이 증원되었는데 허헌...
집행부 개편... 박헌영의 직접적 영향 아래 있는 재건파가 주요 보직을 싹쓸이했다. 이강국은 건설부장에서 요직인 조직부장으로 이동했고, 박문규는 기획차장에서 부장으로 승격했으며, 최용달은 치안부장 자리를 유지했다. 건준의 핵심부서인 조직부, 계획부, 치안부가 모두 재건파 공산당의 영향력 아래 놓이게 된 것이다... (282-283)
그럼에도 놓쳐서는 안될 엄연한 사실이 있다. 최후의 순간 민공의 밥상을 걷어찬 쪽이 우익이었다는 점이다... 만악 좌우 인사가 망라된 건준 확대위원회가 성공적으로 개최됐다면, 해방직후 조선의 좌우합작과 정치통합은 진통 끝에 성공했다고 평가할 수 있었다. 그랬다면 해외에 머무르고 있던 김구와 이승만 등도 귀국 뒤 건준의 틀을 인정하고 이들과 협력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소련군이 점령한 북한 지역은 어쩔 수 없더라도 적어도 남한 내 극심한 좌우대립과 상호 증오는 피해갈 수 있었다. 이렇게 대표성을 확보한 건국준비위원회가 조선 인민들의 일치된 의사를 미군정에 전달했다면, 한반도의 분단 또한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283-284)
이날 건준 확대위원회의 결렬은 해방이후 한반도의 비극을 잉태한 첫 번째 분기점이라 평가할 수 있다. (284-2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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