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일 동안의 광복] 다큐멘터리 광복, 그날
한반도의 오늘을 결정지은 시간들 / 길윤형 지음
일본의 기만
오키나와에서 격전을 치른 뒤 사단 재건에 여념이 없던 존 하지 제24군단장은 8월 19일 해방된 남부 조선을 사실상 통치하게 될 주한미육군사령관에 임명됐다. 이 결정이 내려진 이유는 단 하나 ‘물리적 거리’였다. 1944년 4월 8일, 하와이에서 창설된 뒤 태평양의 여러 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제24군단은 전쟁이 끝난 직후 미국이 사용할 수 있는 한반도에서 가장 가까운 전력이었다. (317)
불행하게도 많은 연구자들이 지적하듯 완고하고 근면하며, 결연한 하지의 지휘 스타일은 남한 점령과 같은 복잡ㆍ미묘하며 고도의 정무감각이 필요한 임무엔 어울리지 않았다. (318)
엔도는 8월 29일 내무성으로부터 하지가 이끄는 제24군단이 9월 7일 인천을 통해 상륙한다는 사실을 전달받았다. 이제 곧 경성에 진주할 미군을 내편으로 해놓는다면, 한반도 정세를 총독부에 유리한 쪽으로 몰고 가는 게 얼마든지 가능했다. (319)
총독부는 소련의 동향에 촉각을 곤두세우눈 미국의 심리를 꿰뚫고 있었다. 적의 적은 곧 동료였다. 총독부가 미국으로부터 관대한 처분을 끌어내려면, 소련의 위협을 강조해야 했다. 맥아더가 조선 상황에 대해 처음으로 구체적인 정보를 입수한 것은 아베 총독이 일본 정부를 통해 보내온 8월 29일치 전문을 통해서였다. 아베는 소련이 점령중인 한반도 북부의 혼란상을 강조하며 그 여파가 한반도 남부에 이를 수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320)
고즈키 사령관은 9월 1일 “조선인 중에는 현 상황을 이용해 조선의 평화와 질서를 어지럽히고 음모를 꾸미는 공산주의자와 독립선동가가 존재한다. 경찰은 군대가 지원해줄 때만 힘을 발휘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321)
해방 직후 군을 동원해 조선내 치안을 유지해 왔던 제17방면군 사령부는 미군과 의사소통을 시작한 뒤 자신감을 얻었다. 9월 3일 미군의 허락을 받아 “일본군은 미군이 책임을 인계하기까지는 북위 38도 이남에서 조선의 치안을 유지함과 동시에 행정기관을 존치할 것”이라며 “이를 위하여 미군기가 조선인에 대하여 치안을 유지하도록 포고문을 투하했다”고 발표했다. 군 병력을 투입해 조선의 치안을 장악하고 있는 현재 상황을 승전국인 미국이 승인했다는 선언이었다. (323)
하지... 시끄러운 조선인보다 익숙지 않은 점령업무에 나서게 된 자신을 성심성의껏 도와준 일본인에게 고마움을 느꼈는지, 1945년 9월 23일에 실린 〈뉴욕타임스〉 인터뷰에서 제24군의 최상의 정보 제공원이자 조선 상륙에 큰 도움을 준 이들은 “조선인이 아닌 일본인이었다”고 밝혔다. 전쟁이 끝나자마자 미국이 일본을 적이 아닌 귀중한 협력자로 인식하기 시작한 것이다. (328)
부루스 커밍스는 자신의 역저 〈한국전쟁의 기원〉에서 “1945년 8월부터 9월 사이에 점령군의 눈에 조선은 준적국인으로, 일본은 우호의 국민으로 변했다”고 지적했다. (329)
건준 특사 여운홍, 박상규, 조한옹...
제24군단의 참모장 가빈... 미군은 여운홍 일행을 친절하게 대했지만, 경계하는 태도를 풀지 않았다. 하지는 자신이 만나지 않은 이유에 대해 “이들이 일본인의 지원을 받고 있었고” 특정 정치 세력을 지지한다는 인상을 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330-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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