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일 동안의 광복] 다큐멘터리 광복, 그날
한반도의 오늘을 결정지은 시간들 / 길윤형 지음
성조기가 올라가다
하지는 먼저 미군이 진주한 뒤에도 행정업무의 지속적인 수행과 통치권의 질서 있는 인수를 위해 “아베 총독과 그 외 일본인 관리들이 임시적으로 계속 재직한다”며 “불필요한 규제가 일본인 관료들에게 가해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 소식을 전하는 9일 〈뉴욕타임스〉 기사 제목은 “미국이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조선내 일본인 지배자들을 유지할 것”(U.S. Keeps Japanese Rulers In Korea to Enforce Orders)이었다. (362)
〈뉴욕타임스〉가 전한 하지의 두 번째 주요 발언은 “즉시 독립을 원하는 조선의 바람은 허용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는 “미래 절차와 관련해 즉시 조선의 지도자들과 상의하겠다. 하지만 유엔 지도자들간의 더 높은 수준의 정치협상을 통해 새로운 (조선) 정책을 결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즉 조선의 완전한 독립 시기를 결정하는 것은 조선인 자신이 아닌 미국과 소련이라는 선언이었다. (363)
도쿄의 연합군 총사령부도 맥아더 사령관 명의로 조선 점령을 위해 필요한 조처를 담은 포고 제1ㆍ2ㆍ3호를 공포했다. 포고 1호 1조엔 “조선 북위 38도 이남의 지역과 동 주민에 대한 모든 행정권은 당분간 본관의 권한 아래서 실행된다”, 3조엔 “점령군에 대해 반항 행동을 하거나 질서ㆍ보안을 교란하는 행위를 하는 자는 용서없이 엄벌에 처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5조엔 군정기간 사용할 공용어가 “영어”라고 명시됐다. 미군은 진주 첫날부터 해방군이 아닌 점령군으로 활동을 시작한 것이다. (364)
당대인들이 가장 민감하게 받아들인 문제는 북위 38도를 기준으로 미소간 점령정책이 초기부터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소련은 자신의 점령지역에서 조선인들로 구성된 인민위원회를 설치하고, 이들에게 치안권과 행정권을 이양한 상태였다. 하지만 미국에겐 그럴 의사가 없었다. 〈뉴욕타임스〉는 10일 “(조선) 정치인들이 러시아(소련) 점령지와 미국 점령지 사이에 같은 법과 규정이 적용될지에 대해 궁금해 하고 있다. 미소 점령 방식의 차이가 이 두 군대가 업무를 시행하는 것을 목격한 이들에게 매우 도드라지게 느껴지고 있다”는 우려를 전했다. 북위 38도선을 기준으로 적용되는 정책이 다르다면, 그동안 한 덩어리였던 남북의 이질화가 무서운 속도로 진행될 수밖에 없었다.
불과 하루 전 미군을 환영했던 조선인들이 10일 총독부 앞에 모여 항의 시위를 했다. 이 소식이 〈뉴욕타임스〉 등 미국 언론을 통해 워싱턴에 전해졌다. 결국 맥아더가 나서 문제를 풀었다. 태평양미육군사령부는 11일 하지에게 “정치적 이유에 기초해 귀관은 아베 총독, 총독의 전 국장, 도지사 및 도 경찰부장 등을 즉시 해임하라. 또 다른 일본인 관료 및 대일협력자인 조선인 관료의 해임도 가능하면 빨리 시행할 것을 요망한다”고 명령했다. 하지는 “일본인들을 전면적으로 해고하는 것은 큰 문제이다. 나의 군정 조직은 이 상황에 대처하기에 전적으로 부족하다”고 생각했지만, 맥아더의 지시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364-365)
연희전문학교 교수 이묘묵(1902-1957). 그는 선배교수 백낙준과 하경덕에게 곧 이땅에 들어올 미군에 제대로 된 조선정보를 제공하기 위한 영자신문을 발간하자고 제안했다. 4면짜리 타블로이드판 영자신문 〈코리아타임스〉의 창간호가 발행된 것은 미군 선발대가 도착하기 하루 전인 9월 5일이었다. (366)
미군은 9일 진주 직후 경성 시내에 공지를 돌렸다. “미군 사령부에서 미국ㆍ영국 등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사람들을 찾고 있으니 내일 점심시간을 지나 조선호텔로 오라”는 내용이었다.
10일 오후 1시 부렵, 구미 각국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50여 명의 조선인들이 조선호텔로 모여들었다... 미군들은 자신들과 같은 정치적ㆍ사상적 배경을 가졌고, 비슷한 학교를 다녔으며, 수준급 영어를 구사하는 집단을 발견한 뒤 기쁨을 이기지 못했다. (366-367)
하지는 11일 기자회견의 스타로 떠오른 이묘묵을 따로 불러 자신의 고문겸 통역이 되어줄 것을 요청했다... 이른바 ‘통역 권력’의 출현이었다. (368-369)
해방직후 한반도 정치 지형을 압도한 정파는 좌익이었다... 이정식은 이 시기 공산주의자들은 민중의 눈높이에 맞춘 정책을 제시해 정권을 쟁취하고 유지할만한 경험과 원숙미를 갖추지 못한 이들이었다고 지적했다. 이들은 일제의 엄혹한 탄압에 맞서 싸우느라 한 사회나 조직을 제대로 이끌어 본 경험을 쌓지 못했다. 마오쩌뚱이나 호치민처럼 노동자와 농민의 삶 속에서 사고의 깊이를 키워내지 못한, 매혹적 이론에 도취된 ‘서생적 혁명가’들이었다는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현실 정치란 애매모호한 회색의 영역 속에서 차선 또는 차악을 골라나가는 고통스런 과정이며, 마르크스가 가르쳤던 ‘프롤레타리아의 최종적 승리’로 귀결되는 역사 법칙이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좌익은 우익을 설득해 ‘대동단결’의 길을 제시하는 대신 급진적 이론에 집착하며 가차없는 공격을 쏟아 부었다... 이들은 해방 23일만에 제대로 된 절차도 거치지 않고 인민공화국 수립을 선포했다. 좌익 소아주의가 낳은 비극이었다. (370)
해방직후 시도된 좌우합작이 실패로 끝난 상황에서 가장 중요한 역사적 갈림길은 미국이 ‘누구를 파트너로 선택할 것인가’였다. 미국의 눈과 귀를 붙든 것은 미국 유학 경험이 있는 한국민주당의 통역권력들이었고 이들의 노골적이고 분명한 목표는 인민공화국 척결이었다... 이들에겐 최소한의 양심도 없었다. 놀라운 영어 실력으로 하지를 사로잡은 이묘묵은 여운형과 안재홍은 ‘친일파’이며 인민공화국은 “공산주의자들에게 기울어었다”고 공격했다... 바로 어제까지 일본의 성전 승리를 부르짖고, 귀축 미영의 타도를 호소한 것은 이묘묵 자신이었다. 민족문제연구소가 2009년 펴낸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을 올린 것은 여운형, 안재홍, 허헌이 아니라 김성수, 장덕수, 이묘묵이었다. (371-372)
하지가 여운형을 만난 것은 경성 진주로부터 거의 한달이 지난 10월 5일이었다. 하지는 여운형에게 다짜고짜 “그대는 일본인의 돈을 얼마나 먹었냐”고 물었다. 여운형은 정색을 하고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 답했다. 하지는 재차 “그대가 일본 사람의 돈을 먹었다는 보고가 많이 들어왔다”고 말했다. 여운형이 “그 말을 믿냐”고 되묻자, 하지는 “조사 결과 거짓말인 것을 알았다”고 답했다. 여운형은 이날 미군정으로부터 고문이 되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여운형이 안내를 받아 들어선 방엔 김성수, 김용무, 김동원, 송진우, 이용설, 김용순, 오영수, 강병순, 윤기익 등 한민당원들이 모여 있었다... 미군정이 선정한 11인의 고문 가운데 아홉명이 한국민주당원이었고, 남은 두 명은 여운형과 소련 점령지역인 평양에 머물고 있던 조만식이었다. 여운형은 고문 취임을 거절하고 만다. 여운형은 외국에 의존해 “정치게임에서 남의 대가리를 까는 더티 플레이”를 증오했지만, 해방 직후 한반도는 그가 원했던 “페어 플레이”가 가능한 공간이 아니었다. (373-3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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