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일 동안의 광복] 인민공화국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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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이야기]

[26일 동안의 광복] 인민공화국의 탄생

by [수호천사] 2022. 8.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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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일 동안의 광복] 다큐멘터리 광복, 그날

한반도의 오늘을 결정지은 시간들 / 길윤형 지음

 

인민공화국의 탄생

 

인공전문가들은 인민공화국을 박헌영, 이강국, 최용달 등 재건파 조선공산당 중진들이 여운형을 얼굴마담으로 놓고 탄생시킨 것으로 본다. (335-336)

 

여운홍은 6일 밤 갑작스러운 인민공화국 설립에 대해 이것은 예정되었던 일도 아니며 더욱이 형님이 진심으로 마음 내키는 일도 아니었다. 이것은 순전히 소아병적인 극렬 공산당원들이 꾸며낸 하나의 연극이었다고 지적했다. (339)

 

강원용은 1946년 여름께 공산주의자에게 이리저리 끌려다리는 여운형을 보고 화가 나서 계동집으로 찾아가 항의했다... “이강국과 박헌영에게 이용당했다는 사실을 선선히 닝정했다.

그분의 사상이라는 것이 애매하다. 그러니까 공산당한테도 꼭 이용당하기 좋은 사람이었다. 좋게 말하게 되면 (사상의 폭이) 굉장히 넓고, 어디 그렇게 치우치지 않고, 나쁘게 말하게 되면 줏대라는 게 없었다.” (340)

 

안재홍 역시 사람좋은 여운형에 대해 날카로운 평가를 남겼다. “일본인 정객 또는 장관급 군인 들과 함께 만나 천하대세를 논하고 자기의 포부를 말하고 하는 추론에는 가다가 천하일품이라고 칭찬해 좋을 만치 당당한 바 있었지망, “객관적인 구체론은 얼마큼 명쾌를 결하는 자 없지 않았다는 것이다.

동생 여운형마저 여운형에 대해 금도끼라는 표현을 쓸 정도였다. 겉으로 보기에는 좋지만 실용성 있게 실제 뭘 자르지는 못한다는 얘기였다. (340-341)

 

강원용의 말대로 여운형은 비정한 정치의 세계를 관통해 내긴 너무나 좋은 사람이었다. (341)

 

(여운형)는 조선 혁명을 위해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고통을 당했던 박헌영을 진심으로 아꼈다. 언젠가 박헌영이 여운형의 집을 찾아가 여비를 보태달라고 한 적이 있었다. 수중에 목돈이 있을리 없었고 여운형은 부닝능 불러 박 동지가 수고했으니, 중국집에 가 요리를 사오라고 했다. 그렇게 부인을 내보내놓고 여운형은 집에 있던 은수저를 모두 싸서 박헌영에게 건넸다... 누군가 박헌영을 욕하면 박헌영이가 지하에서 얼마나 고생도 많이 했고 또 그만큼 지금까지 일한 사람이 누가 있냐며 감싸려 했다. (341)

 

인민공화국이 주석으로 지목한 이는 이승만이었다. 그의 뒤를 받치는 부주석은 여운형, 허헌은 국무총리가 됐다. 그 밖에 김구는 내무부장, 김규식은 외무부장, 김원봉은 군사부장에 임명됐다. 이를 통해 이승만은 흉악한공산주의자들 마저 국가수반으로 떠받드는 진정한 민족의 영웅이라른 뜻밖의 정치적 자산을 획득하게 된다. (342)

 

저명한 공산주의자였던 김철수(1893-1986)는 박헌영이 저지른 이 엄청난 일을 듣고 기겁했다. 그는 인민공화국 발족 사실을 전하러 온 공산주의자 하필원에게 송진우, 안재홍, 백남훈 등 민족주의자들과 상의해서 한 것이냐고 물었다. 며칠 뒤 인공의 경제부장으로 조각 명단에 이름을 올리게 되는 하필원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김철수는 분노했다.

민족운동하는 데 분열을 획책하고 있다. 600명 모아서 했다고 자랑하지만 내가 대로상에 나사거 연설하면 6000여 명도 더 모을 수 있다. 자네 이름 올렸다고 좋아할 것 없네” (342-343)

 

여운형은 인민공화국 설립과 관련한 매일신보인터뷰에서 연합군이 진주만하면 즉각에서 국권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준비한 것이 즉 조선인민공화국 내각이었다고 설명했지만, 미국에겐 공산주의자가 득시글하는 인민공화국에 국권을 넘길 의사가 추호도 없었다. 자신들의 정당성에 심취해 정세를 만만하게 본 낙관적 예측이었다. (343-344)

 

여운형을 친일파로 매도했던 한국민주당의 대표적 저격수는 김준연, 이인, 조병옥이었다. 이들은 한민당 인사들 가운데서 친일 논란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웠다. 자신이 떳떳했던 만큼 공격은 집요하고 잔혹했다. (346)

 

유광렬의 회고... 어느날 경기도 경찰부에서 매일신보편집국장 출신인 그에게 정감록에 대한 해설 강의를 요청했다. 이 자리에서 한 일본인 경찰간부가 여운형에게 만약 미군이 상륙작전이라도 벌이면 한국인 청년들을 의용군으로 편성해서 일본군과 함께 싸우게 할 생각인데 어찌 생각하느냐물었다. 여운형은 일본군에 의용군으로 섞여 들어갈 것이 아니라 아예 한인들로 구성된 의용군을 독립부대로 편성해 달라. (그러면) 의용군 부대는 황국신민으로 충성스럽게 싸울 것이라고 답했다. 그 얘기를 들은 일본인들은 당황했다. 일본을 위해 싸운다는 말이니 시비를 걸 수도 없고, 그렇다고 정말로 조선인들로만 구성된 부대를 편성할 수도 없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결국 일본인 경찰은 그것은 어렵지 않으나 그렇게 되면 미군쪽으로 넘어갈 확률이 크지 않겠느냐는 반응을 보였다. 상대가 문제삼기 어려운 역제안을 꺼내 난처한 자리를 모면한 것이다. 한국민주당의 지적은 여운형의 입에 담은 황국신민으로 충성스럽게 싸울 것이라는 어구만을 트집잡아 그가 친일을 했다고 공격하는 꼴이었다. (348)

 

미군정은 19469-12, 여운형의 정치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옛 총독부 고관들을 대상으로 한국민주당이 주장하는 친일행적을 조사했다. 미군정에서 파견된 조사관들은 우가키, 고이소, 아베 전 총독, 엔도 전 정무총감, 니시히로 전 경무국장 등을 조사했다. 여운형을 친일파로 몰려는 미군정의 우문에 옛 총독부 고위 관계자들은 예상 밖의 현답을 내놓았다.

여운형은 천성적으로 온화하기 때문에 전쟁후 한국인들의 지도자가 될 자격이 있다고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졌다” (고이소)

전쟁이 끝난 후 젊은 사람들은 여운형을 높이 평가하고 그들의 운동에 적극적이었다” (아베)

그는 극단적 반일주의자였다. 만약 한국에 정치적 힘이 있다면 그가 한국의 지도자로서 적합한 사람이었다고 나는 믿는다” (우가키)

그에게 돈을 준 적이 없다. 나는 그가 순수한 민족주의자라 확신한다. 그는 일본 정부 또는 총독부의 얘기를 듣지 않았다. 일본은 그를 중요한 직책에 앉히고 싶어했다. (엔도)

일본의 전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협조를 얻으려고 그와 얘기했다. 불가능했다. 그는 독립을 원했다” (니시히로)

여운형은 인민공화국 설립과 관련해 매일신보의 질문에 조선 독립은 단순한 연합국의 선물인 것은 아니다. 우리 동포는 과거 36년간 유혈의 투쟁을 계속해 온 혁명에 의하여 조선의 자주독립을 획득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혁명에는 기탄이 필요치 않다. 혁명가는 먼저 정부를 조직하고 뒹데 인민의 승인을 받을 수가 있다. 급격한 변화가 있을 과도기에 비상조치로서 생긴 것이 인민공화국이었다고 덧붙였다.

... 그의 신념은 지옥 같던 36년을 치열하게 살아낸 한 사람의 조선인 혁명가가 가질 수 있는 당연한 생각이었지만, 소의 동의를 끌어낼 수 있는 현실적 사고방식은 아니었다. (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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