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9월, 민주화의 봄을 짓밟고 일어선 신군부의 서슬퍼런 독재정권의 핵심인사가 강진읍교회에서 시무하던 윤기석 목사를 찾아와 정권에 협력하고 함께해 달라고 회유하였다. 윤 목사는 일언지하에 거절하며 서로 갈 길이 다르다고 강조하였다. 윤 목사는 당시 대통령 전두환과 육사 11기 입학 동기였다. 6.25로 동족상잔의 전쟁이 한창이던 시절에 나라를 구하고자 젊은 날을 함께하며 육사에서 동문수학을 같이하였으며, 똑같이 축구도 좋아했다. 육사팀의 축구부 수문장은 전두환이었고, 윤기석은 센터포워드로 각각 공수를 이끌었다. 전두환은 학교를 졸업하고 군에서 승승장구하며 쿠데타까지 이르러 권력 최고의 자리를 찬탈하는 데까지 올랐지만, 윤기석은 극심한 천식에 시달려 졸업을 1년 앞두고 중퇴해야 했다.
윤기석은 군인의 길이 좌절되자 신학대에 진학하여 목회자의 길을 걷게 되고 고향 시골인 강진에 내려와 사역하게 된다. 장군을 꿈꾸던 육사에서의 세상적 영웅심과 명예심이 육신의 아픔으로 좌절되는 아픔 속에 새삼 깨달음은 십자가의 겸손, 낮아짐이 그를 목양의 길로 이끌었다. 그리하여 윤 목사는 도시 목회를 마다하고 시골 가난한 농민들을 섬기는 복음 사역자로 나서게 되었다.
1931년 강진 도암 항촌 마을에서 태어난 그는 1958년 향리로 돌아와 도암 지석교회를 시작으로 목회자의 길에 들어섰으며, 이후 1966년 도암교회를 거쳐 1975년 강진읍교회에 부임한다.
이때는 박정희 유신정권이 한창이던 때였다. 전국에서 유신 반대와 민주화 운동이 분출하기 시작하였고, 대학가와 종교단체에서도 항거하는 일들이 벌어졌다. 1976년 8월 14일 광주 양림교회에서는 기장 전남노회 비상 노회가 열렸다. 그보다 4일 전에 열렸던 임시노회 기간 중에 기도회를 열어 유신에 반대했다는 이유로 노회 임원들이 구속되는 상황이었다... 1976년 평소 신념과 가르침대로 자신이 모범을 보이며 불의한 세상 앞에 나서며 결의하고 기도한 이유로 그는 구속되어 강신석 목사와 함께 5년형을 선고받고 1년을 복역했다.
윤 목사는 감옥에 있는 동안 특이한 체험을 하였다. 젊은 날부터 그토록 자신을 괴롭혔던 바울의 가시 같은 천식 발작이 사라진 것이다. 육사에서 장군의 꿈을 키우며 인내의 시간을 견디던 때, 그로 하여금 중도에 하차하게 한 것은 밤마다 찾아오는 천식 때문이었다. 좌절된 꿈을 접고 목회의 길을 들어섰고, 고난과 고통의 길을 마다치 않고 교회와 세상 앞에 목회자로서의 소명에 충실하느라 감옥에 붙잡히게 되었는데, 천식 발작이 거짓말처럼 없어진 것이다.
80년대 들어 옛 전우요 학우였던 전두환, 노태우 등이 쿠데타로 나라를 뒤흔들고 정권을 빼앗았을 때도 그들에게 동조하거나 부역하므로 얼마든지 영달의 길을 달려갈 수 있었겠지만, 나라의 정의와 민주화를 위하는 일에 변함없이 곧은 길을 걸었다.
윤기석 목사가 강진읍교회를 담임할 때 함께한 청년이 김영진이다. 김영진은 도암 출신으로 교회 청년회와 지역 청년회를 이끌며 함께 민주화 운동과 농민운동에 앞장섰고, 5선 국회의원과 농수산부 장관을 역임했다.
강진읍교회 황호신 장로 역시 독실한 신자였던 아버지 황복규 장로 때부터 대를 이어 교회와 지역사회를 섬겼다. 서울약대를 졸업한 지역 인재였던 황호신은 한국 동란 이후 고향에 내려와 읍내 동성리에 강진약국을 열면서 부친과 함께 여러 교회를 개척하며 섬기는 한편 민주화 운동에도 열심을 다했다.
김양호, [전남 기독교 이야기 1] 183-1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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