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일 동안의 광복] 다큐멘터리 광복, 그날
한반도의 오늘을 결정지은 시간들 / 길윤형 지음
일본의 반격
70만 일본 민간인들의 생명과 재산에 본격적인 위협이 가해지자 총독부도 대응에 나설 수 밖에 없었다. 엔도는 17일 밤 나가사키 경성 보호관찰소장을 불러내 여운형과 만나 “(총독부는) 연합국이 접수할 것이다. 건국준비위원회의 활동은 어디까지나 치안 유지에 대한 협력의 한계를 넘으면 안된다”는 점을 주지시키라고 했다.
니시히로 경무국장도 나가사키와 백윤화를 대동하고 18일 오후 3시 회현동에 있던 요정으로 안재홍을 불러내 이틀 전 방송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건국준비위원회의 해산을 요구했다. 이같은 요구에 건준이 선선히 응낙할 리 없었다. (205-206)
미국과 제대로 한번 싸워보지도 못하고 패전을 맞이한 제17방면군은 끓어오르는 혈기를 다스리지 못했다. 게다가 군 당국은 엔도가 15일 새벽 여운형을 만나 치안협력을 의뢰했다는 사실 자체를 모르고 있었다. 군이 이 충격적인 사실을 파악한 것은 16일 안재홍의 연설을 들은 뒤였다... 이들은 총독부에 항의하면서, 앞으로 군이 전면에 나서 치안유지를 담당하겠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총독부는 군과 조선 민중이 정면 충돌하면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대형 참사가 발생할 수도 있다는 이유로 반대 의사를 밝혔다. (206-207)
해방 직후 건국준비위원회와 조선총독부ㆍ일본군 사이에 발생한 대립은 〈매일신보〉 17일자 지면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날 1면 머리기사는 안재홍의 전날 라디오 방송 내용을 정리한 ‘호해의 정신으로 결합, 우리 광명의 날을 맞자’였고, 두 번째 기사는 ‘민족해방의 사자후 – 우리들 이상의 낙토 세우자’는 여운형의 휘문중학 운동장 연설이었다. 이 기사만 보면, 조선 독립이 이제 곧 실현될 것만 같은 희망적 느낌이 든다. 하지만 ‘경거망동을 삼가라’는 16일 일본군의 포고 ‘관내 일반 민중에게 고함’이 실려 있다. 군은 조선인들에게 “만약, 민심을 착란하여 치안을 해하는 것과 같은 일이 있다면, 군은 단호한 조처를 취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며 ‘시위운동 일체불허’, ‘인심착란 치안 방해엔 단호 조처’, ‘민중들은 절대자제’ 등을 요구했다. 군이 취하게 될 ‘단호한 조처’란 무력사용을 암시하는 것이었다. (207)
치안 공백을 두려워한 총독부는 15일 당일 경비소집을 실시해 입대했던 일본인 경찰관 4000명을 원직 복귀시켰다. 하지만 일손은 여전히 턱없이 부족했다. 엔도는 군의 제안을 받아들여 군인 9000명을 추가로 제대시켜 ‘특별경찰대’란 이름을 붙여 경찰에 전속시켰다... 경성 시내에 살기 등등한 일본군 병력이 배치되기 시작한 것은 17일부터였다... (208)
경성방송국... 오전 10시께 군인들이 몰려와 조선군관구사령부 “나가야 보도부장의 명령”이라며 방송국을 재접수했다.
“방송국은 이 시간부터 일본군이 접수한다. 점령한 곳의 주민은 포로나 마찬가지 처분을 받는 게 통상적이다. 그러나 여기 직원들은 점잖으니 그렇게까지는 하지 않겠다. 사실이 그렇다는 점은 분명히 알아둬라.” (208-209)
나가야 보도부장은 18일 경성방송국을 통해 다음과 같은 살벌한 경고방송을 쏟아냈다.
“일당 일파가 목전의 야망에 휩쓸려 사회질서를 문란하게 하고 어떻게든 제 이익을 얻으려 하기 때문인지 동아시아의 이 비극을 기화로 식량을 농단하고 교통, 통신기관을 파괴하며 약탈ㆍ횡령을 기도해 치안에 해가 되는 비적 같은 행위를 하고 있다. 조선군은 엄연히 건재하다. 지금 그 잘못됨을 깨닫지 못한다면 장소를 가리지 않고 단호 무력사용을 금하지 않을 것임은 어제 군당국의 발표를 봐도 명료하다.” (210)
해방의 환희로 밭아던 경성 거리엔 계엄령이 선포된 것 같은 살벌한 분위기가 내려 앉앗다. 조선의 치안은 16일 ‘아주 잠깐’ 건준으로 건너왔다가 다시 일본군의 손으로 넘어갔다. (212)
1897년 개성에 태어난 최근우는 도쿄 상과대학을 졸업한 뒤 프랑스ㆍ독일에서 공부한 지식인이었다. 그는 도쿄 유학시절 1919년 3ㆍ1운동의 도화선이 된 도쿄 유학생들의 2ㆍ8독립선언에 참여했고, 이후 상하이로 건너가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활동했다... 여운형과의 인연은 그 무렵 시작됐다... 일제 말기엔 일본의 괴뢰국인 만주국 안둥성 민정청 사무관, 만주의 어용단체인 만주국 협화회의 안둥성 사무장 등으로 훌륭했다. 이는 분명한 친일 활동이지만, 뒤로는 건국동맹에 참여해 만주의 사정을 여운형에게 보고하며 일본의 패망에 대비하고 있었다. (이런 점들을 고려해 민족문제연구소는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될 예정이었던 최근우를 최종 명단에서 제외했다) (215)
최근우는 용산으로 달려가 이하라 참모장과 마주했다. 이하라는 “참모들을 통제하기 어려운 형편이다. 직접 만나달라”며 흥분한 젊은 참모들에게 책임을 돌렸다. 최근우는 결국 고급참모인 간자키 대좌, 마루자키 중좌를 상대해야 했다... 간자키는 흥분해서... 일본도의 손잡이에 손을 대며 최근우를 위협했다.
“대권은 아직도 천황에 엄존한다. 누구라도 달려드는 자는 가차 없이 단칼에 베겠다.”
“뭐라고? 벨 테면 베어봐. 네 놈들이 의기양양할 때도 너희들과 싸워 온 우리들이다. 하물며 전쟁에 진 주제에 무슨 건방을 떠느냐. 네가 칼로 벤다면 나는 이빨로 물어뜯겠다.”
최근우의 예상치 못한 강경 반응에 놀란 간자키는 동작을 멈췄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이어 최근우에게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일본이 패전한 마당에 이 이상 사태를 악화시켰다간 뒷 감당이 힘들 것이라 판단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215-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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