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23] 호남방어전(웅치.이치전투), 육전 최고의 승리? 영웅 이름? 4대대첩으로 바뀌어야 │황현필 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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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23] 호남방어전(웅치.이치전투), 육전 최고의 승리? 영웅 이름? 4대대첩으로 바뀌어야 │황현필 한국사

by [수호천사] 2021. 4.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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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이 일본에게 멸망당하지 않았던 전투는 무엇일까? 임진왜란을 안다고 자부하는 사람들 중에 웅치전투(1592.7.7)와 이치전투(1592.7.8?)를 아는 사람은 몇이나 있을까? 만약 황진(1550~1593) 장군을 모르는 사람은 임진왜란을 언급할 자격이 없다고 볼 수도 있다.

 

왜군이 한반도에 상륙해서 20일 만에 한양에 입성했는데 왕이 도망치고 없었다. (이것이 왜군에게는 멘붕이었다고 한다) 이후 누가 왕을 잡으러 갈 것인가를 놓고 제비를 뽑았는데 고니시가 이겨서 고니시가 선조를 추격하기로 하고, 가토는 함경도쪽으로 가기로 했다. (가토는 함경도에서 선조의 아들 임해군을 잡기도 했다)

 

4군단 시마즈 요시히로(1535~1619)는 강원도로 진격했고, 3군단 구로다 나가마사(1568~1623)는 충청도를 거쳐서 경기도로 진격했었기 때문에 유일하게 왜군의 말발굽에 밟히지 않은 지역은 전라도(호남)라고 할 수 있다. 당시 전라도는 인구밀집도 1위였고, 단위면적당 농업생산량이 1위였기 때문에 임진왜란의 배후 기지 역할을 하게 된다. (식량과 무기공급)

 

 

당시 조선에 상업이 발달되지 않았기 때문에 도로사정이 좋지 않아서 세금은 수로나 해로를 이용하는 것이 빠르고 편했다고 한다. 일본이 조선을 거쳐 명나라로 건너가려고 했을 때 수륙병진작전은 필수적이었다. 그런데 조선의 수군 이순신에게 막혔고, 임진왜란 초기에 전라도로 진격하던 왜군이 의병장 곽재우에게 막혔다. [훗날 제대로 전라도를 공격하기 위해 대군이 동원되었는데 이때 진주성 전투(1592.10.6)에서 김시민 장군(1554~1592)에게 막혀서 전라도로 진출하지 못하게 된다.]

 

전라도에서 관찰사 이광이(1541~1607)이 대병력을 모집해서(5) 북상하다 용인전투(1592.6.6)에서 말아먹었는데(임진왜란 20편 참조), 이때 패잔병들이 여전히 전라도를 지키고 있었다. 이때 왜군이 전라도를 장악하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왜군의 6군단 고바야카와 다카카게(1533~1597)는 임진왜란 참전 장수들 중에 지명도 1위의 장군이었다. (전국시대 3대 무사 중 한명이었다고 함) 그는 토요토미 히데요시 하에서 강력한 권력을 가진 다이묘인 오대로까지 지낸 인물이다. 임진왜란 당시 60이 넘었기 때문에 거의 아들뻘되는 장수들하고 임진왜란을 치룬 것이다. 고바야카와는 15천의 병력을 거느리고 남진하여 무주를 점령하고 무주의 서북쪽에 있는 충청남도 금산을 점령하였다.

 

 

조선군으로서는 전주성을 지키기 위해서는 조선군으로서는 대둔산과 운장산 사이의 이치 고개와 운장산과 마이산 사이의 웅치 고개를 막아야 했다. 당시 전라도 관찰사는 이광이었는데, 그는 이정란(1529~1600)과 함께 전주성을 지키고 있었다. 이광은 김제군수 정담(?~1592)과 나주목사 이복남(1555~1597), 의병장 황박(?~?)에게 웅치고개를 지키게 하였고, 이치고개는 당시 도절제사로 승진한 권율(1537~1599)과 동복현감 황진(6)에게 지키게 하였다. (현령 밑의 현감이었던 황진은 이후 6개월만에 충청도 병마절도사까지 승진할 정도로 활약하게 된다)

 

충남 금산에 있던 고바야카와는 자신이 이치를 공격하고, 부장이자 승려인 안코쿠지 에케이(1539~1600)에게 웅치를 공격하게 하였다. 웅치전투는 77~8일로 기록되어 있고, 이치 전투는 78(?)로 알려져 있다. (78일은 바다에서 이순신이 한산도에서 와키자카를 무찌른 날이다. 그런데 이치 전투가 8일에 있었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그리고 안코쿠지는 임진왜란 이후 일본에서 있었던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에 동군의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서군대장 3명을 죽이는데 미츠나리, 고니시, 그리고 안코쿠지였다고 한다) 

 

이때 고바야카와가 남원을 돌아 남쪽에서 전주성을 공격할 것이라는 거짓 정보를 흘리게 되고, 이광이 황진을 급하게 남원으로 급파한다.

 

[웅치전투]

 

웅치전투(1592.7.7~8)에서는 용인전투에서 패배한 전라도의 병사들이 용인전투의 패배를 발판으로 삼아 약간의 경험치가 쌓였고, 사생결단의 의지로 강력하게 저항하였다. 아마도 왜군은 이전까지 만났던 조선의 병사들과는 다른 모습이기에 놀라고 당황했을 것이다. (고바야카와가 재수가 없는 것이었다)

 

웅치에서 조선군은 1선에 황박, 2선에 이복남, 3선에 정담이 지키고 있었다. 77일에 왜군 1만의 병력이 1선도 돌파하지 못하고 돌아갔다. 다음날 새벽에 1선의 황박이 무너지고, 2선의 이복남도 무너졌을 때, 퇴각하자는 주변의 주장에 대해서 김제군수 정담은 퇴각하느니 한 명의 왜군을 더 죽이고 죽겠다. 내 갑옷에 내 이름을 새겨놓았으니 자식들이 내 시신을 수습해 줄 것이다라며 끝까지 싸우다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조선군의 저항에 놀란 왜군은 조조선국충의간담(弔朝鮮國忠義肝膽) - 조선국의 충의지사를 기린다는 푯말까지 세웠다고 한다.

 

일단 웅치를 돌파한 안코쿠지는 전주성 근처의 안덕원에 진을 치게 된다. 이때 남원에 급파되었던 황진이 돌아왔고, (이광은 이정란에게 성을 맡기고 피신) 황진의 부대가 새벽에 안코쿠지 부대를 급습해서 3천명을 죽이는 승리를 거둔다. 웅치전투는 엄밀히 말하면 웅치 고개에서의 패배와 안덕원에서의 승리로 말할 수 있다.

 

[웅치전투의 황진 이야기]

 

안방준의 임진전사, 호남절의론의 기록 : “진안을 석권했던 왜군이 전주성을 침공하려고 웅치를 넘어오면서 전추를 벌여 우리측의 정담 이하 많은 장병이 전사하며 전열이 무너지게 되었는데, 이 다급한 시기에 황진 군대의 명쾌한 전승 소식은 하나의 희소식이었다.”

 

최수지라는 인물이 전주 부윤에게 올린 글 : “황진 장군이 안덕원에서 일기당천으로 적병을 궤멸시켰다.”

 

『무민공실기 : “황진 장군이 전라감사 이광의 명에 따라 전주에 도착했을 때 왜적은 이미 안덕원에 진을 치고 있었는데, 황진은 안덕원의 적을 쓸어버렸다.”

 

『단조보감』 : “동복현감 황진이 홀로 왜적 떼를 맞아 곧바로 내쳐 적장 한 놈과 왜군 3천명을 죽였다.”

 

[이치전투]

 

이치전투는 78일이 아니라 20일 이후라는 설이 있다. (78일이면 웅치전투에서 활약한 황진이 이치전투까지 날라다닐 수 없지 않을까?)

 

이치전투는 조총을 활로 이겼던 최초의 전투라고 할 수 있다. 조선군은 왜군이 조총을 쏠 때에는 나무 뒤에 숨었다가 조총 소리가 끝남과 동시에 활을 쏘았다. 황진의 사수가 3명이었으며, 황진은 너무 많은 화살을 쏘아서 엄지손가락이 살이 문드러지고 뼈가 드러날 정도였다고 한다. 이때 황진이 허벅지에 총알을 맞았고, 머리에 총을 맞고 쓰러졌으나 다행히 죽지는 않고 기절했다고 한다. 이때 황진의 부하 공시억, 위대기 등이 독려해서 이치를 지켜냈다고 한다. (다른 기록에는 권율이 후퇴하는 병사들의 목을 베면서 전투를 독려했다고 나오기도 한다. 권율이 승리한 전투로 나오기도 하는데, 아마도 당시에 황진의 벼슬이 현감이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권율이 이치 전투에 있었는지도 의문이라는 주장도 있다)

 

권율의 사위 이항복은 내가 가장 공을 크게 세운 것은 행주대첩이 아니라 웅치였다. 웅치에서 승리하지 않았더라면 조선은 전라도를 왜군에게 빼앗겼을 것이다는 장인어른의 말을 전했는데, 권율이 당시에 웅치에는 없었기 때문에 웅치와 이치를 혼동했던 것 같다.

 

여하간 이치 전투에서 황진은 조총을 머리에 맞았지만 총알이 투구를 뚫고 들어오다가 힘이 빠져 치명상은 입히지 못하고 기절했다가 일어나게 된다. 전주의 백성들이 황진 장군에게 고마워하면서 꿀물을 타줬다고 한다.

 

[이치전투의 황진 이야기]

 

『선조수정실록』 : “왜장이 또 대군을 출동시켜 이치를 침범하자 권율이 황진을 독려하여 동복현의 군사를 거느리고 편비 위대기, 공시억 등과 함께 재를 점거하여 크게 싸웠다. 적이 낭떠러지를 타고 기어오르자 황진이 나무를 의지하여 총탄을 맞으며 활을 쏘았는데 쏘는 대로 맞지 않는 것이 없었다. 종일토록 교전하여 적병을 대파하였는데, 시체가 쌓이고 피가 흘러 초목까지 피비린내가 났다.”

 

일본 승려 화안의 이야기 : “임진년에 일본국이 크게 패한 곳이 세 곳인데, 그 중에 이치를 첫째로 삼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임진왜란 3대 대첩은 한산도대첩(1592.7.8), 진주대첩(1592.10.6), 행주대첩(1593.2.12)이지만, 일본이 생각하는 임진왜란 3대 승리는 벽제관전투(1593.1), 칠천량해전(1597.7), 울산성전투(1597.12)를 꼽는다. 그런데 임진왜란 육지 전투에서의 첫 승리이자 전라도를 지켜낸 전투인 웅치와 이치전투도 그런 대첩과 비교해서 손색이 없을 것이고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전투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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