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2년 임진왜란 발발 20일만에 5월 3일에 조선의 수도인 한양에 왜군이 입성한다. 선조는 한양에서 개경으로, 개경에서 평양으로, 평양에서 의주로 피난을 가게 된다.
육지에서 조선군이 삽질하고 있을 때, 수군은 달랐다. 전라좌수사 이순신은 1차 출정에서 옥포(5.7), 합포(5.7), 적진포(5.8)에서 승리를 거두었으며, 2차 출정에서 사천(5.29), 당포(6.2), 당항포(6.5), 율포(6.7)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2차 출정에서 조선의 함대는 피해가 없었으며 일본의 함대는 67척이 격침되었고, 조선군 13명이 사망한 반면 일본은 8~9,000명이 사망하였다고 한다.
이순신은 당시 사망한 조선군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기록해서 선조에게 올려보냈다.
“이들은 모두 날아오는 화살과 총알을 무릅쓰고 죽음을 각오하고 나아가 싸우다가 혹은 죽고 혹은 부상당한 것이므로, 죽은 사람의 시체는 따로 작은 배에 싣고 가서 고향에서 장사 지내주고, 그 처자들은 구휼하는 법에 따라 시행하라고 각기 그 장수들에게 지시하였습니다” 『당포파왜병장』
처음에 자신의 수군이 방심해서 졌다고 생각했던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상황의 심각성을 깨닫게 된다. 그는 책사 구로다 간베에(1546~1604)에게 이순신의 존재에 대해서 물어보지만, 구로다는 조선인 포로들에게 물어봐도 신립(1546~1592)과 이일(1538~1601)은 알아도 이순신은 잘 모른다고 한다는 보고를 하였다. 이에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일본 수군의 최고 권위자인 구키 요시타카(1542~1600)를 부른다. 구키 요시타카는 솔직히 같은 함대의 숫자로는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이순신 함대의 두 배의 함대를 주면 이순신의 목을 잘라 오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에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부산에 주둔해 있는 70여척의 전함에다가 전진기지 나고야에서 추가로 70척의 전함을 보내 140여척으로 만드는 동시에 용인전투에서 공을 세운 와키자카 야스하루에게 이순신을 잡으라고 명령한다. 와키자카는 일본의 아와지섬을 지배하던 영주였는데, 해군 집안... 아니 엄밀히 말하면 해적 집안이었다.
이순신 역시 선조의 명을 받고 3차 출정을 하게 된다(1592.7.6). 이순신은 7월 4일에 전라좌수영(여수)에서 전라우수사 이억기를 만나 7월 5일 하루종일 작전회의를 하였고, 7월 6일에 출정을 하게 된다. 노량에서 원균을 만났는데 이때 원균의 판옥선이 7척으로 늘어나 있었다. 그런데 어디선가 수리한 흔적이 있는 배였다고 난중일기에 이순신이 적어놓는다. 대략 60척의 배를 가지고 와키자카의 73척의 배가 만나는 한산도로 향한다.
이순신의 수군은 7월 6일 창신도에서 하룻밤을 지내고, 7월 7일 당포에서 하룻밤을 보낸다. 이때 근처 목동이었던 김천손(?~?)이라는 사람이 견내량 북쪽 바다에 왜군 함대 70여척이 있다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한산도대첩(1592.7.8)
일본 수군은 구키 요시타카(1542~1600), 가토 요시아키(1563~1631), 와키자카 야스하루(1554~1626)의 연합부대였는데, 와키자카가 공을 세우려는 욕심에 구키 요시타카의 말을 듣지 않고 단독행동을 하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견내량이 좁고 암초가 암초가 많은 것으로 유명하다. 이런 상황에 원균은 상황파악을 못하고 돌격하자는 주장을 한다. (난중일기에 이순신이 원균은 병법을 모르는 것 같다고 적어놓았다) 견내량은 폭이 1.5~2km 정도였다.
이순신은 이억기 부대를 통영 쪽에 매복시켜놓고, 원균의 부대는 화도 쪽에 매복시켜 놓았다. 그리고 이순신의 함대가 북상하면서 광양현감이었던 어영담(1532~1596)에게 5척의 판옥선을 주고 와키자카를 유인하도록 시켰다.
용인전투의 경험으로 조선군을 얕보고 있던 와키자카는 과감하게 돌격을 시도하였다. 와키자카는 행여 견내량을 통과하는 지점에 조선의 수군이 매복해 있을지도 몰라 걱정했지만 막상 매복이 없는 것을 보고 이순신도 별수 없다는 생각을 하면서 더욱 기세 등등하게 조선의 수군을 추격하였다.
와키자카가 주둔해 있던 견내량 위쪽에서 한산도까지는 18km의 거리였기 때문에 일본 수군의 노젓는 병사들은 무척 힘들었을 것이다. 한산도 근처까지 내려온 이순신의 함대가 학익진을 펼치고 와키자카의 함대를 향해 함포사격을 하게 된다. 정면에서 함포를 사격하고 좌열로 돌아서 좌측면에서 함포사격을 하면서 함포의 장전 시간을 절약하였다. 와키자카는 일단 학익진을 뚫어서 둘로 나누면 승산이 있다고 생각하고 빠르게 이순신의 함대를 향해 돌진했지만 이순신은 학익진을 깨기 위해 달려드는 선두의 배를 집중 공격하였다. 이때 이억기의 함대와 원균의 함대가 학익진을 펼치며 좌우에서 달려들게 되면서 와키자카의 함대는 멘붕에 빠졌고 73척의 함대 중에 59척이 바다에 수장되었다.
와키자카는 간신히 헤엄을 쳐서 한산도에 들어갔는데, 당시 한산도는 무인도였기 때문에 미역을 먹으면서 10일을 버텼다. 10일동안 섬을 포위했던 원균이 포위를 풀게 되어 와키자카는 간신히 한산도를 빠져나갔다. 한산도에서 이순신을 경험하기 전에는 무조건 돌격을 감행했던 와키자카는 이후 매우 신중하고 겸손해졌다고 한다. 7월 8일이 되면 모든 후손들은 미역만 먹으라고 지시했을 정도이다.
다음은 와키자카가 했던 말이라고 한다.
“내가 제일 두려워하는 사람은 이순신이며,
내가 가장 미워하는 사람도 이순신이며,
내가 가장 좋아하는 사람도 이순신이며,
내가 가장 흠숭하는 사람도 이순신이며,
내가 가장 죽이고 싶은 사람 역시 이순신이며,
내가 가장 차를 함께 마시고 싶은 사람도 바로 이순신이다.”
한산도대첩 이후에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수륙병진작전을 포기하고 조선의 수군과는 교전하지 말라고 명령한다. 이후 일본의 수군은 이순신에 대한 공포감으로 감히 바다에 나서지도 못했다고 한다.
한산도대첩(1592.7.8)은 진주대첩(1592.10.6)과 행주대첩(1593.2.12)과 함께 임진왜란 3대 대첩으로 불리며, 을지문덕의 살수대첩(612)과 가감찬의 귀주대첩(1018)과 함께 우리나라 3대 대첩으로 불리고 있다.
[이순신 장군이 견내량에서 와키자카 함대를 유인하려고 했던 가장 큰 이유는 왜군이 패했을 때 육지로의 도망을 막고자 함이었으며, 이순신은 왜군을 바다에 빠뜨리거나 무인도에 갇혀 굶겨죽일 생각으로 한산도 넓은 바다로 왜군을 끌어들인 것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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