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24] 의병장 총집합 - 곽재우, 고경명, 김천일, 조헌, 정문부, 서산대사, 사명당...그리고 김덕령 │황현필 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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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24] 의병장 총집합 - 곽재우, 고경명, 김천일, 조헌, 정문부, 서산대사, 사명당...그리고 김덕령 │황현필 한국사

by [수호천사] 2021. 4.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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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은 5월부터 7월까지 총 3번 출정한다. 1차 출정에서 옥포(5.7), 합포(5.7), 적진포(5.8)에서 승리를 거두었고, 2차 출정 때 사천(5.29), 당포(6.2), 당항포(6.5), 율포(6.7)에서 승리를 거두었으며, 3차 출정에서는 한산도(7.8), 안골포(7.10)에서 승리하면서 완전히 해상을 장악해 버렸다.

 

왜군은 육지를 통해 호남을 공략하려고 했으나 웅치(7.7)와 이치(7.8)에서 황진 장군의 영웅적 활약으로 물러나면서 호남이 지켜졌다.

 

이순신이 약무호남 시무국가(若無湖南是無國家, 호남이 없으면 나라가 없다)”라고 말했지만, 호남을 지키기 위해서 호남만 노력한 것이 아니었다. 충청도와 경상도의 여러 의병의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임진왜란 초창기에 일본이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지만, 우리가 멸망 당하지 않은 세 가지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 왕이 도망친 것이다. 이것은 진짜 일본이 대비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일본은 413일에 부산에 상륙한 이후에 초고속으로 북진하여 53일에 한양을 점령하였다. 그들은 한양을 점령해서 왕만 잡으면 전쟁이 끝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이것은 백여년 전국시대의 관습에 젖은 멍청하고 한심한 생각이었다. 이들은 한양까지의 지도는 정밀하게 준비했지만, 한양 이후의 북쪽에 대해서는 까막눈이었다. 그래서 평양까지 점령하는데(613)는 상당한 시간이 걸린 것이다.

 

우리나라 역사를 보면 외적이 쳐들어왔을 때 왕이 피신했던 적이 있었다. 3세기 고구려 동천왕(재위 227~248)은 위나라 관구검의 침략 때 수도를 버리고 동해안까지 피신했다. 4세기 고국원왕(재위 331~371) 때 중국 전연이 침략해서 수도가 털리고 미천왕의 무덤이 파헤쳐지는 수모를 당하기도 했다. 장수왕(재위 412~491)이 한강유역을 점령할 때 백제 개로왕(재위 455~475)이 죽음을 당하고 수도인 한성을 빼앗겼지만 아들 문주왕(재위 475~477)이 웅진에 가서 백제를 재건하였다. 고려의 세종이라고 불리우는 현종(재위 1009~1031)은 거란의 2차 침략(1010) 때 나주까지 피신했으며, 몽고의 침략 때 최우(1166~1249)는 고종(재위 1213~1259)과 함께 강화도로 피난했다. 고려말 공민왕(재위 1351~1374)이 홍건적 2차 침략(1360) 때 안동까지 피신했었다.

 

따라서 선조가 피신한 것을 놓고 욕할 수는 없지만 선조의 피신은 국가보다는 자신의 안위만 우선하는 모습을 보였다. 평양을 사수하자는 의견에 동의하는 듯 하다가 밤에 도망쳤으며, 자기 혼자 살겠다고 의주에서 요동까지 도망치려고 했던 인물이다.

 

두 번째는 이순신의 활약이다. 당시 조선은 상업이 발달하지 않아서 육로 보급이 어려웠기 때문에 군량미와 무기를 해로나 수로로 보급하는 것이 더 수월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일본도 수륙병진작전을 구사했던 것인데 이순신으로 인해서 그것이 막히게 된 것이다.

 

세 번째로는 명나라의 참전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논란이 많다. 조명연합군이 4차 평양성전투(1593.1.6)로 평양성을 탈환했다고 하지만 당시 고니시의 부대는 굶어죽기 일보직전이었으며, 평양성을 탈환한 명나라 군대가 일본군을 추격하다가 벽제관에서 패한 이후에 명나라는 일본과 제대로 싸우지 않고 외교적으로 해결하려고 했다. 그리고 선조가 명나라만 대접하고, 의병들 알기를 하찮게 여기면서 의병들의 사기가 저하되기도 했다.

 

진정한 세 번째 원인은 ‘의병의 활약’이라고 할 수 있다. 일본은 100여년의 전국시대를 경험했지만 의병이라는 것을 전혀 경험해보지 못했다. 성주가 항복하거나 죽거나 할복을 하면 영내의 농민들은 새로운 성주를 모시는 것이 당연했다. 그런데 조선은 도망친 왕에게 충성을 다짐하면서 무기를 들고 달려든 것이다.

 

[조선이 지켜졌던 3가지 이유]

 

    1. 왕의 파천

    2. 이순신의 활약

    3. 의병들의 봉기

 

 

임진왜란의 의병들은 스님이었던 서산대사와 사명당, 영규를 제외하면 나머지는 모두 유생들이었다. 조선 후기 성리학적 명분론이 국가와 민족의 발전에 저해가 되었지만, 임진왜란 당시에 성리학적 명분론은 국난 극복의 원동력이 되었던 것이다. 지배(수탈)를 받던 피지배층이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나라를 구하기 위해 들고 일어나는 독특한 유전자가 우리 한민족에게 흐르고 있는 것이다.

 

곽재우(1552~1617)

 

곽재우는 남명 조식(1501~1572)의 손녀 사위다. 남명 조식은 항상 긴 칼을 차고 다녔으며 충의와 절의를 중시했다고 한다. 조식의 제자들이 나중에 북인을 형성하고 광해군 때 집권 세력이 된다. 곽재우는 문과에 합격했지만, 과거시험 답안지에 왕이었던 선조를 비판하는 글을 썼기 때문에 합격이 취소되었다고 한다. 곽재우가는 당시 군역의 의무를 했던 경험이 나중에 의병장 활약에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유생 의병자들의 한계는 왕과 국가에 대한 충성심 때문에 목숨을 아깝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적은 병력으로 조총을 소유한 왜적과 맞짱을 뜨려고 했다. 그런데 곽재우는 현실적이고 실용적으로 움직였다. 곽재우는 정안진전투(1592.5.24) 등에서 승리하였는데 철저하게 게릴라전을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웅치전투의 안코쿠지 에케이(1539~1600)는 훗날 세키가하라전투(1600)에서 승리한 동군의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참수한 3명의 서군 장수에 포함될 정도로 영향력이 있는 장수였다. 당시 참수된 서군의 장수들은 이시다 이츠나리(1560~1600), 고니시 유키나가(1555~1600), 안코쿠지 에케이(1539~1600)였다. 이러한 안코쿠지가 호남을 공격하려고 하는 것을 지속적으로 막아낸 것이 곽재우였으며 초기에 이순신이 활약할 수 있는 여유를 제공하였다.

 

안코쿠지가 대규모 부대의 이동이 편리하게 하기 위해 말뚝을 박아놓았는데 곽재우가 그 말뚝을 늪지대로 옮겨 왜적이 늪지대에서 허우적거릴 때 활로 공격하기도 하였고, 왜적의 보급품이 남강이나 낙동강을 통해서 올라갈 때 강 밑에 말뚝을 꽂아놓아서 배들이 엉키게 만들기도 하였다.

 

당시 경상도 관찰사 김수(1547~1615)가 도망쳤을 때 김수를 잡아죽이라는 격문을 올릴 정도였는데, 김수가 선조에게 곽재우를 좋게 보고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훗날 2차 진주성전투를 앞두고 황진 장군과 곽재우의 대화가 기록으로 전해지는데 이것은 나중에 소개하도록 하겠다. (참고로 황진은 왜적을 상대하기 위해서 진주성으로 들어가고, 곽재우는 대규모의 병력을 맞서서 싸우는 것은 승산이 없다고 진주성으로 들어가지 않는다)

 

 

고경명(1533~1592)

 

고경명은 담양에서 거병했는데 당시 7천명이 모였다고 한다. 한양을 탈환하기 위해서 북상해서 충청도까지 올라갔는데, 당시 고바야카와 다카카게(1533~1597)와 안코쿠지가 호남을 공격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고바야카와가 충청남도 금산을 점령했는데(당시에는 전라도 금산이었다) 고경명이 금산성을 공격하려고 했다. 고바야카와가 지속적으로 호남을 공격하지 못한 이유가 고경명의 금산성 공격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왜적과 싸우는 것은 수성도 힘든데 성을 공격한다는 것은 무모한 일이라고 하면서 주변의 장수들이 군사를 물려서 관군과 합세하자고 제안을 했으나 공격을 시도했고, 패했을 때 후퇴하자는 제안에 대해서 패장이 자기 한 목숨 중하게 여겨서야 되냐며 끝까지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아까운 병력)

 

김면(1541~1593)

 

김면은 경상도 최고 만석군이었는데 의병 활동하면서 재산을 탕진하였고, 부인과 자식들이 문전걸식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김면은 오로지 나라걱정만 하다가 결국 전염병으로 죽게 된다. 이때 그는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한다. 다만, 나라있는 줄만 알았지, 내 몸 있는 줄은 몰랐다.” 후에 김면의 휘하 병력이 곽재우에게 몰려갔다고 한다.

 

 

정인홍(1535~1623)

 

정인홍은 남명 조식의 수제자라 할 수 있다. 정인홍은 김면, 곽재우와 함께 고바야카와의 부하 안코쿠지의 전라도 진격을 막아낸 경상도 의병장이다. 전쟁 후에 광해군이 집권을 하고 영의정까지 오른 인물로 인조반정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이황이나 이이처럼 대우를 받았을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단재 신채호가 존경하는 인물이 이순신, 을지문덕, 정인홍이라고 할 정도였다고 한다. 선조에게 직언(광해군에게 왕위를 물려주라, 당신 때문에 나라가 망하기 일보직전이다)을 해서 유배를 가기도 했다. 그런데 집권 후에 오로지 북인만 생각하며 서인과 남인을 압박한 아쉬움이 있다.

 

 

최경회(1532~1593)

 

최경회는 전남 화순에서 거병하였다. 고경명이 금산에서 전사할 때 아들 고인후(1561~1592)도 함께 죽었으나 또 다른 아들인 고종후(1554~1593)는 살아남아서 최경회와 함께 의병활동을 했다고 한다. 훗날 제2차 진주성전투에 참가하여 전사한다.

 

김천일(1537~1593)

 

김천일은 나주에서 거병하였고, 한양 탈환을 위해 북상해서 강화도를 점령하였다. 이후 의주에 있는 왕의 명령을 호남에 전달하고, 호남의 상황을 왕에게 보고하는 고량 역할을 하였다. 선조가 김천일에게 한양을 점령해서 자신에게 한강과 삼각산을 보게 해달라는 뻔뻔한 명령을 하였다. 김천일이 한양을 되찾지 못하자 선조가 비판하는 내용이 실록에 나온다. 나중에 김천일과 최경회와 고종후는 2차 진주성전투(1593.6.22) 때 호남을 지키기 위해 전사한다.

 

조헌(1544~1592)과 영규(?~1592)

 

서인이었던 조헌은 동인이었던 정여립을 비판하기도 했고, 지부상소(持斧上疏, 도끼를 들고 가서 상소를 올림)을 할 정도로 강단이 있는 인물이다. 그는 임진왜란 전에 왜적의 침략을 예상하고 친구들 중에 지방관으로 가 있는 사람들에게 편지를 써서 대비하라고 했으나 당시 지방관들이 그런 조헌의 조언을 무시했다고 한다. 이때 조헌의 조언을 들은 단 한 명의 사람이 연안성의 성주였던 신각(?~1592)이다. 신각은 한강 방어전 때 해유령전투(1592.5.16)에서 왜군 70명의 목을 베어 승리하고도 목이 잘린 인물이다. 신각이 연안성을 견고하게 쌓아 두었기 때문에, 나중에 이정암(1541~1600)500명으로 5천의 왜군을 막아내게 된다.

 

조헌은 고경명이 금산으로 출격할 때 함께 가려고 했으나 의병이 모이지 않아서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이후 1,600~1700명을 모집하고 스님이었던 영규(?~1592)2천명과 합세하여 청주전투(1592.8.1)에서 승리하고 청주성을 탈환했다. 조헌의 부대는 700명 정도로 줄었고, 영규의 부대는 800명이 남았다.

 

이때 조헌은 고경명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금산으로 향한다. 당시 전투지휘 능력은 영규가 뛰어난 것 같았다. 영규가 지금의 병력으로는 어렵다며 말렸으나 조헌은 고경명과의 약속을 지키겠다는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결국 영규의 부대도 합류해서 금산으로 향한다.

 

고경명의 1차 금산전투(1592.7.9)에 이어 2차 금산전투(1592.8.18)에서 조헌과 영규의 부대는 결국 전멸하였는데, 당시 조헌과 영규의 부대와 싸운 왜군이 질려버릴 정도로 끝까지 물러나지 않았다. 아마 고바야카와의 부대는 상당히 짜증이 났을 것이다. 고니시와 가토의 부대는 조총만 쏴도 도망쳤던 조선군이 고바야카와 부대하고 싸울 때는 사생결단으로 싸웠던 것이다. 조선이 사대부들의 나라이기 때문에 조선과 7백의총으로 기념하고 있는데 불교계에서는 영규의 800명을 포함해서 ‘천오백의총’으로 수정할 것을 요구하기도 했다. (엄밀히 말하면 천오백의총이 맞다)

 

정문부(1565~1624)

 

함경도 지방관으로 있었던 정문부는 당시 전쟁이 발발하고 군대도 도망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이때 2선발 가토가 함경도로 쳐들어왔다. 선조는 첫째 아들 임해군(1572~1609을 함경도로 보내고, 여섯째 아들 순화군(1580~1607)을 강원도로 보냈었다. 그런데 강원도가 점령당하게 되자 순화군이 함경도의 임해군과 합류하였다. 그런데 이들은 전쟁통에 양아치같은 행동을 계속적으로 해서 함경도의 주민들이 임해군과 순화군을 잡아서 가토에게 넘기게 된다. 이러한 과정에서 함경도에도 의병이 일어나게 되었고, 함경도 의병들이 정문부를 대장으로 추대하였다. 정문부는 함경도를 탈환하는 과정에서 임해군과 순화군을 잡아 바친 반역자들을 처단하였으며, 북관대첩(1592.9.16)에서 가토를 물리쳤다. 이때 세운 북관대첩비를 일제강점기에 일본이 가져다가 야스쿠니 신사에 갖다놓았는데 노무현 대통령이 요청해서 받아서 북한의 김정일에게 넘겨주었다고 한다.

 

 

서산대사 휴정(1520~1604)과 사명대사 유정(1544~1610)

 

이우혁의 왜란종결자에 보면 서산대사가 조금만 젊었다면 왜놈들은 혼났을 것이라는 대목이 나온다.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서산대사는 70이 넘은 나이에 묘향산에서 거병을 하였다. 서산대사의 제자였던 사명대사 유정(1544~1610)은 금강산에서 거병하였다. 서산대사와 사명대사는 명나라 이여송(1549~1598)과 유성룡의 조명연합군이 평양성을 공격할 때 평양성 수복전투(1593.1.6)에 참전해서 활약했다고 한다. 그리고 전쟁 후에 사명대사 유정은 일본에 건너가서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만나고 조선의 포로들 3,500명을 데리고 왔다.

 

실제로 사명대사 유정은 가토를 만나서 이런 대화를 주고 받았다고 한다.

가토 : 조선에서 가장 중히 여기는 보물이 무엇입니까?

유정 : 조선에서 가장 중히 여기는 보물은 현재 일본이 소유하고 있습니다.

가토 : 그것이 무엇입니까?

유정 : 조선이 가장 중히 여기는 보물은 가토 당신의 머리입니다.

 

김덕령(1567~1596)

 

김덕령은 정유재란 무렵의 의병장으로 활약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김덕령은 형인 김흥령과 함께 고경명 휘하의 병력으로 합류하였다. 고경명의 부대가 금산성을 공격하기 전에 김덕령의 형이 김덕령에게 어머니를 모시라고 해서 금산성 전투에는 참가하지 못했다.

 

이후 김덕령은 담양에서 거병해서 정유재란 때 활약하게 된다. 선조가 후에 이순신에게 김덕령의 부대에 합류하라고 했을 때 신에게는 12척의 함대가 있습니다라고 말하면서 거절하였다.

 

1596년에 충청도에서 이몽학의 난이 일어났을 때 선조는 김덕령에게 난을 진압하라고 명령하였다. 이때 선조는 이몽학의 난이 진압되는 과정에서 김덕령도 이몽학과 한편이라고 생각하고 잡아다가 고문을 하였고 결국 김덕령은 옥사하게 된다. 이러한 김덕령의 죽음은 당시 곽재우나 이순신에게 상당한 충격이 되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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