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통일5] (역사적)지역감정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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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 & 유투브]/[황현필 한국사]

[삼국통일5] (역사적)지역감정의 시작?

by [수호천사] 2021. 7.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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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통일5] (역사적)지역감정의 시작?

 

 

살수대첩 때 우중문이 평양성을 공격하려고 했다가 돌아갈 때 청천강(살수)에서 을지문덕이 강의 수위를 얕게 둑을 만들었다고 하는데, 지금으로부터 1300년 전에 그런 것이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이 내용은 삼국사기삼국유사에는 나오지 않고 단재 신채호의 조선상고사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살수대첩 시기에 백제의 왕은 무왕(재위 600~641)이었다. 무왕의 아명이 서동이다. 백제의 왕자 서동과 신라 진평왕의 셋째 딸 선화공주에 얽힌 이야기가 전해진다(서동요... 삼국유사).

 

진평왕

  • 큰딸 : 천명공주(김춘추 母)
  • 둘째 : 덕만공주(선덕여왕)
  • 셋째 : 선화공주

 

 

삼국유사에는 무왕이 선화공주와 익산 지역을 가다가 익산 미륵사 터에다가 절을 세우고 석탑을 세웠다(익산 미륵사지 석탑)는 기록이 있다. 훗날 미륵사지 석탑이 무너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일제가 시멘트로 발라 놓았다. 그것을 복원하는 과정에서 사리장엄구를 발견하였다. 거기에 쓰여져 있는 문구에는 “무왕의 왕비 사택적덕의 딸”이라고 쓰여있었다. ‘사택은 백제의 귀족 가문의 성씨이다. (그 이전까지 무왕의 아내는 선화공주라고 알려져 있었는데, 학계는 혼란에 빠진다. (선화공주가 진평왕의 딸인지... 사택적덕의 딸이 무왕의 둘째 부인인지... 아니면 서동이 무왕인지...)

 

 

여하간 무왕이 죽고 그의 아들 부여의자가 왕이 되었으니 그가 의자왕(재위 : 641-660)이다. 의자왕의 별명은 해동증자라고 한다. 의자왕은 신라를 상당히 괴롭혔다. 의자왕이 윤충을 시켜서 1만의 병력으로 대야성(경상남도 합천)을 공격하여 함락시킨다. 이때 대야성의 성주는 김품석이었는데, 김춘추의 딸 고타소의 남편이었다. 김품석과 고타소는 자결하였고, 백제는 이들의 목을 베어서 백제인들이 다니는 길에 묻어버린다.

 

의자왕이 이렇게 한 이유는 백여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6세기 신라의 전성기를 이룬 진흥왕(재위 : 540~576)과 성왕(재위 : 523~554)이 나제동맹으로 통해서 한강유역을 고구려로부터 빼앗았다. 그런데 이때 진흥왕이 성왕의 뒤통수를 치면서 백제가 확보한 한강 하류지역을 빼앗아 버렸다. 결국 나제동맹은 깨지고 백제와 신라가 대결하는 양상이 되었다.

 

 

당시 성왕의 아들이 신라를 공격하는 사령관(훗날 위덕왕)이었다. 성왕은 자신의 아들을 격려하기 위해서 4명의 좌평과 호위병력 30여 명과 함께 전선으로 향했다. 그런데 우연히 신라 장군 고도(노비 출신)가 이끄는 300여 신라군을 만나서 사로잡히게 된다. 이때 성왕은 차라리 자결하겠다고 칼을 달라고 했지만, 고도는 거절하고 자신이 몸소 성왕의 목을 쳤다. 그리고 성왕의 시신을 신라 진흥왕에게 보냈다. 진흥왕은 성왕의 목을 궁궐 뜰에 묻어버리고 신하들이 신라의 왕을 만날 때마다 성왕의 시신을 발로 밟고 만나게 했다고 한다. 이후부터 백제의 왕들은 신라에 대해서 복수의 칼을 갈게 되었다. (이것이 지역감정의 시작은 아니다. 엄밀히 말하면 지역감정은 솔직히 박정희 정권이 들어서면서 생겼다)

 

자신의 딸과 사위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김춘추는 하루종일 나무 기둥에 기대서 눈을 깜빡이지 않았다고 한다. (이건 솔직히 뻥이라 생각된다... 하루종일 눈을 깜빡이지 않을 수는 없기에...) 그리고 김춘추는 결심한다.

 

“내 살아 생전에 백제 멸망을 보리라!”

 

이후 신라만의 힘으로 삼국을 통일했으면 좋았을텐데, 김춘추에 의해 삼국의 역사가 더럽게 꼬이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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