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폴 앤더슨, 좀비 보다는 외계 생물을 선택하다 - [에이리언 VS 프레데터]
<레지던트 이블>로 새로운 좀비 영화를 탄생시킨 폴 앤더슨 감독은 차기 작품으로 <레지던트 이블 2>에서는 한 걸음 물러나 제작자와 각본을 담당하였고 감독은 알렉산더 위트에게 맡겼다. 그가 <레지던트 이블 2>에서 한 걸음 물러날 수 있었던 것은 <에이리언 vs 프레데터>의 감독을 맡았기 때문이다.
폴 앤더슨으로서는 자신이 만든 <레지던트 이블>의 속편에도 욕심이 있었겠지만, 이미 ‘에이리언’과 ‘프레데터’는 그 존재감 하나만으로도 많은 팬을 확보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두 우주괴물을 한 장소에 불러들이는 것만으로도 최소한의 흥행은 보장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결국 그는 자신이 창조한 좀비 부대와 인간의 대결이 아닌, (20세기 폭스사에서 보유하고 있는 우주 괴물의 두 가지 브랜드 상품인) ‘에이리언’과 ‘프레데터’의 대결을 선택했다. 그렇지만 그는 위에서 언급했듯이 <레지던트 이블 2>에서 완전히 발을 뺀 것이 아니었다. 제작과 각본을 담당했기 때문에 언제라도 다시 복귀하여 다음 시리즈를 이어나갈 수 있는 꼼수를 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에이리언 vs 프레데터>는 개봉 이전에 이미 많은 팬을 확보하고 있었기 때문에, 흥행에서는 손해보지 않았다. 그러나 평론가들에게는 그다지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워낙 ‘에이리언’과 ‘프레데터’라는 캐릭터가 독보적이었기 때문에 영화 한 편에서 두 괴물의 특징을 완벽하게 그린다는 것은 무리라는 이야기다.
이 영화는 철저하게 반(反)에이리언적이고, 친(親)프레데터적인 영화다. 에이리언은 무조건 악이고, 프레데터는 악을 물리치는 존재이기에 선에 가까운 캐릭터가 되었다. 그러나 인간의 입장에서는 어떨까?
# 인간의 입장에서는 우울하게 출발한 영화
그러나 영화의 포스터는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WHOEVER WINS... WE LOSE.”
이것은 다음과 같이 번역되어 전해졌다.
“누가 이기든 미래는 없다!”
인간의 입장에서 보면 상당히 우울한 상황이다. 에이리언과 프레데터의 싸움에서 누가 이기던지 인간에게는 상실 그 자체라는 말이다. 그런데 이러한 헤드 카피와는 달리 영화는 친프레데터적인 구성으로 진행되고 있다.
# 공공의 적이 되어버린 에이리언
에이리언과 프레데터가 왜 싸우는가? 영화에서는 에이리언이 프레데터의 스파링 파트너이고 인간은 그러한 에이리언을 키우는 숙주 역할에 불과하다고 설명한다. 프레데터로서는 자신이 위대한 전사임을 입증하기 위해서는 에이리언과의 싸움에서 승리해야 했다. 그것을 위해서 에이리언과 인간은 이용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영화에서는 에이리언의 폭주를 막기 위해서 인간과 프레데터가 서로 손을 잡는다. 최강의 종족인 프레데터가 조금 열등한 종족인 에이리언에게 밀리기 시작했을 때, 인간은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 프레데터와 손을 잡은 것이다.
애초에 질서라는 것을 깨뜨린 것은 프레데터였다. 그들은 자신들의 사냥을 위해서 인간을 미끼로 사용했고, 사냥의 긴장감을 높이기 위해서 에이리언이 인간을 숙주로 사용해서 거듭나도록 방관한 것이다.
물론 에이리언 시리즈를 통해서 에이리언에게 형성된 이미지는 이성이 없이 파괴 본능만을 가지고 있는 종족이다. 이에 반하여 프레데터는 향상된 문명 세계를 창조한 수준 높은 종족으로 이미지가 형성되어 있다.
영화는 처음에 악을 제공한 프레데터에게는 면죄부를 주고 이용당하던 에이리언의 힘이 강해지면서 에이리언을 공공의 적으로 부각시킨다.
# 왜 에이리언이 공공의 적이 되어야 하는가?
여주인공 우즈는 에이리언의 힘이 강해지는 상황에 대해서 ‘피라미드는 마치 감옥과 같고 자신(인간)들을 간수(프레데터)들의 총을 가져갔고, 죄수(에이리언)들이 날뛰는 상황’으로 이해했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에서 질서를 찾기 위해서는 간수들에게 총을 되돌려 주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 영화에서 가장 나약한 종족으로 선택된 인간으로서는 이제 선택의 길만 남았다. 여주인공 우즈는 결국 간수들에게 협조하는 것을 선택했다.
‘나의 적’의 적은 ‘나의 친구’다. 여기에서 ‘나의 적’이라 함은 에이리언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처음에 인간을 공격한 것은 프레데터 종족이었다! 물론 대원들이 흩어진 이후에 에이리언의 공격을 받고 살해되기는 했지만 세바스찬과 우즈는 그때까지 에이리언이 인간을 죽이는 것은 목격하지 못했다!
에이리언이 무조건 악한 종족이라는 선입견은 그 생김새 자체가 애초부터 ‘대화가 불가능한 종족’이라는 느낌을 주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그렇게 형성된 ‘나의 적’(에이리언)의 적은 당연히 프레데터를 말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프레데터는 대화가 통할 수 있다는 일종의 기대감 때문일 것이다.
# 약한 자의 생존 방식, 대화가 통하는 강자와 손을 잡아라?
결국 이렇게 에이리언을 견제하기 위해서 프레데터와 손을 잡기로 결정한 인간은 프레데터와 힘을 합하여 에이리언을 물리쳐야 했다. 비록 약한 전투력이었지만 이후의 싸움에서 많은 보탬이 되었던 것은 영화를 본 사람들이라면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연합이라는 것이 단지 무기만 덜렁 건네주고 끝나는 것은 아니다. 공공의 적인 에이리언을 함께 퇴치하려는 적극적인 행동이 수반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인정을 받는 것이다.
이 영화는 강한 종족들의 싸움에 휘말린 약한 종족이 생존하기 위해서는 둘 중 어느 한 종족에게 자신들의 운명을 맡겨야 한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갈 수는 없다. 그렇다면 둘 중에 이길 놈에게 붙어야 한다. 만약 에이리언이 대화가 가능한 종족이었다면 인간은 고민했을 것이다. 그런데 영화는 간단하게 미리 답을 던져놓고 있다. 에이리언과 손을 잡을 수도 없을뿐더러 잡는다고 해도 별다른 소득이 없다는 것은 이미 형성된 캐릭터의 이미지를 통해서 다 아는 사실이다.
여기에서 약한 종족인 인간은 최선이 아닌 차선을 선택한다. 최악이 아닌 차악을 선택한 것이다. 에이리언의 승리는 절대로 용납할 수 없다. 그러나 프레데터라면 승리 이후에 우리 약한 인간을 조금이라도 이해해 줄 것이라는 기대감을 가지게 된다.
영화는 프레데터와 손을 잡는 것 말고는 다른 대안이 없다는 인식에서 출발한다. 이후는 프레데터가 인간과 대화가 통하기를 바라는 것 뿐이다. 말이 아니면 행동으로 그것을 보여주어야 했다. 여주인공 우즈는 이후에 프레데터보다 훨씬 뛰어난 활약을 하면서 공공의 적을 물리친다. 이러한 활약 때문에 프레데터 종족으로부터 우호의 표시인 창까지 수여받는다.
이러한 상황이 언제까지 지속될 것인가? 이것은 아마도 프레데터 종족의 이익에 부합되어야 가능할 것이다. 인간으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어지는 것이다. 인간으로서는 프레데터가 계속 절대 강자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면서 인간을 보호해 주기를 바랄 뿐이다. 때로 가끔 다시 프레데터가 인간들의 안전을 보장하면서 제물을 요구할 경우에도 기꺼이(!) 제물을 바치면서 안전을 보장받아야 가능한 이야기다.
영화는 결국 에이리언의 패배로 끝났지만, 상황으로 본다면 영화 헤드카피처럼 인간에게 있어서 미래는 사라진 것이다. 이 영화를 보면서 오늘날 약소국이 살아가는 방식이 얼마나 우회적으로 표현되어 있는지 생각해 보았다. 에이리언처럼 절대 악으로 비춰지고 있는 국가와 프레데터처럼 대화가 통하는 강자는 다양한 모습으로 우리 주변에 존재하고 있다. 약소국인 우리나라는 다양한 불합리한 조건들, 그리고 우리의 미래까지 포기하면서 강대국과의 끈을 놓치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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