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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것1676

[이덕일의 한국통사] 일본이 단군은 가짜라고 떼쓰는 진짜 이유? 삼국사기 동국통감 제왕운기 단군왕검을 인정하는데 일본이 조선을 정벌하기 위해 만들어진 논리를 추종하는 교원대 #8 고조선에 대해서... 중국 시진핑이 미국의 트럼프를 만나서 옛날에 북한이 중국의 영토였다고 말한적이 있는데, 위만조선을 무너뜨리고 세운 한사군의 위치가 북한지역이라는 주장을 근거로 하고 있는 것이다. 이 위만조선의 위치, 낙랑군의 위치가 어딘가에 대해서 많은 논란들이 있다. 독립운동가들은 낙랑군의 위치가 중국 하북성 일대라고 보고 있는데, 남한의 강단사학자들은 낙랑군의 위치가 지금의 평양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한국 고대사에 관한 논쟁의 대부분은 제국주의 시절에 일본인 식민사학자들이 만들어 놓은 것으로 아직도 극복하지 못하고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는 것이다. 그 논쟁들은 ‘고조선, 단군조선이 언제 건국했느냐’는 문제와 ‘고조선의 서쪽 강역, 즉 고조선과 중국의 국경이 어디냐’는 문제, ‘낙랑군은 어디에 있었.. 2021. 4. 21.
[임진왜란32] 함경도를 탈환하다 (Feat. 북관대첩비) 끝까지 보셔야 할 영상 │황현필 한국사 정문부 장군의 하이라이트는 북관대첩(1592.9~1593.2)인데 이 북관대첩은 정문부가 함경도를 수복하면서 승리한 여러 전투를 총칭한 명칭이다. “함경도의 적세는 다른 도보다 강합니다. 안변에서 육진까지 모두 왜장을 배치하고 각기 3~4백명의 군사를 주둔시켰으며, 또 민간에 사람을 내보내 필요한 물건들을 날마다 빼앗아 가고 있습니다. 요해처에는 복병을 많이 배설하여 사람들이 통행하지 못하게 하고 있으며 살육과 약탈이 끝이 없습니다. 우리 백성들은 모두 분발할 것을 생각하면서 애타게 중국군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선조수정실록』 길주 이북의 상황이 궁금한 일본군은 길주에서 최정예병력 92명을 경성 근처까지 보내보지만, 정문부가 92명을 다 잡아서 죽여버린다(경성전투, 1592.9.16). 장평(장.. 2021. 4. 21.
[임진왜란31] 정문부의 함경도 순왜 척결과 6진 회복(선무1등공신 누구여야?)│황현필 한국사 가토가 함경도를 장악하고 여진족까지 공격했다가 패하고 길주까지 내려왔다가 가장 따뜻한 안변까지 내려가 있었다. 일본군과 왜군? 당시 사료에는 ‘왜군’이라고 표현되어 있었다. ‘왜’(倭)는 일본을 낮잡아 부르는 말이고, 왜구(倭寇)는 일본의 해적을 일컫는 말이었다. 그리고 일본(日本)은 7세기 중반 이후 사용된 왜(倭)의 국호(國號)였기 때문에 임진왜란 때 쳐들어 온 적을 ‘왜군’이나 ‘일본군’이라고 부르는 것은 크게 틀린 것은 아니다. 함경도는 왜 반역의 땅이 되었을까? 원래 이성계는 함경도에 있는 군사력으로 출발했다. 그런데 단종 때 수양대군이 김종서 등을 죽이고 정권을 잡은 계유정난(1453)이 발생하였고, 이때 김종서의 부하였던 6진의 책임자 이징옥(1399~1453)이 난을 일으켰다(1453). .. 2021. 4. 21.
윤주경, 독립운동가의 후손이라면 후손답게 행동해야 한다. 광복회 17개 지부장이 윤주경 국민의힘 의원에게 쓴소리를 했다. 광복회, "윤주경, 부끄러운 줄 알면 나대지 마라" [오마이뉴스 기사] 역사적 핏줄을 타고난 독립운동가의 후손이라고 해서 모든 것이 다 존중받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독립운동은 조상이 한 것이고 본인이 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조상이 독립운동을 하면서 상대적으로 대한민국의 사회에서 ‘기회균등’에서 소외되고 해방 이후의 역사적 공간에서 제대로 대접을 받지 못했던 것은 우리 역사가 앞으로 꾸준히 해결해야 할 숙제라고 생각된다. 친일파 청산과 독립운동가에 대한 제대로 된 대우는 여전히 우리 민족에게 남아있는 숙제라고 할 수 있다. 독립운동가의 후손이라면 나름대로 자신의 부모나 조부모가 어떤 신념을 갖고 독립운동을 했는지는 잘 알고 있을 것.. 2021. 4. 20.
[임진왜란30] 가토(가등청정)의 함경도 점령과 여진족 공격, 그리고 새로운 영웅의 등장 │황현필 한국사 함경도는 조선에서 가장 넓은 지역이면서 가장 차별받았던 지역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 초기에 김종서 장군으로 하여금 함경도의 북쪽에 6진을 개척하도록 하였는데 오늘날의 부령, 회령, 종성, 은성, 경흥, 경원이다. 세종은 4군 6진을 개척하고 삼남지방의 주민들을 북방으로 이주시키는 ‘사민정책’을 썼다. 그렇게 해서 함경도에 정착한 사람들은 과거에 낙방한 사람들이나 땅이 없는 소작인들, 노비들이 나름 혜택(?)을 받기 위해 함경도로 이주했다고 한다. 그래서 당시 조선 사람들은 북쪽(4군과 6진)에 사는 사람들이 뿌리가 별로 좋지 않다는 인식을 하고 있었다. 임진왜란 때 가토 기요마사(1562~1611)가 함경도로 진출하였는데, 함경남도 병마절도사인 이혼은 도망쳐 버렸고, 함경북도 병마절도사 한극함(?~15.. 2021. 4. 18.
[임진왜란 29] 진 주 대 첩 (feat.김시민 - 30분울컥순삭ver.) │황현필 한국사 임진왜란이 시작되면서 1선발 고니시와 2선발 가토, 3선발 구로다가 한양으로 진격하였다. 그리고 고니시의 부대는 계속 북상해서 평양까지 진격하였고, 2선발 가토는 함경도 쪽으로, 4선발 시마즈는 강원도 쪽으로 향하였다. 평안북도의 북쪽 지역과 전라도만 남은 상황이 되었다. 조선은 이순신이 옥포(1592.5.7), 합포(1592.5.7), 적진포(1592.5.8)에서 승리를 거두었고, 2차 출정에서 사천(1592.5.29), 당포(1592.6.2), 당항포(1592.6.5), 율포(1592.6.7)에서 승리를 거둔 후에 7월 8일에 한산도에서 승리를 거두면서 남해와 서해바다의 제해권을 지켜낼 수 있었다. 그리고 웅치(1592.7.7)와 이치(1592.7.8)에서 황진 장군이 승리를 거두면서 전라도를 구해냈.. 2021. 4. 18.
[임진왜란 28] 9월대반격 - 박진의 경주성 탈환(feat.비격진천뢰&사야가)│황현필 한국사 1592년 4월에 임진왜란이 시작되고 초반에는 조선이 어처구니 없이 밀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런데 7월에 웅치ㆍ이치에서 황진 장군에 의해 호남이 지켜지게 되고, 이순신 장군이 한산도대첩에서 승리하면서 일본의 수륙병진작전에 차질이 생겼으며, 전쟁의 양상이 일본 입장에서는 꼬이기 시작했다. 이제 9월부터는 본격적으로 조선의 대반격이 시작된다. 이순신 장군이 부산포해전(1592.9.1)에서 적의 본진인 부산포를 작살냈고, 같은 9월 1일에 연안성을 이정암 장군이 지켜냄으로 인해서 황해도 서쪽의 연백평야가 지켜지게 되었다. 그리고 9월 8일에 비격진천뢰를 사용하여 박진이 경주성을 탈환해버렸다. 9월 하순경 함경도에서 가토 기요마사가 정문부 등의 공격으로 철수하게 된다. 명나라가 참전하기 전부터 조선이 스스로 .. 2021. 4. 18.
[임진왜란 27] 공성전 승리 - 영천성 전투(적을 전멸시키다.) │황현필 한국사 1592년 9월 1일에 이순신이 적의 본진이라고 할 수 있는 부산포를 작살냈으며, 같은 날 황해도 연안성에서 이정암 장군(1541~1600)이 일본의 3번대 구로다 나가마사(1568~1623)를 막아냈다. 며칠 뒤인 9월 8일 혹은 9일에 경주성을 박진 장군(1560~1597)이 탈환하려는 이야기 하기 전에 7월에 경주성의 옆에 있는 영천성을 권응수 장군(1546~1608)이 탈환한 이야기를 먼저 해야할 것 같다. 임진왜란 조선 3대 장수를 선정하라고 하면, 황진(1550~1593), 권응수(1546~1608), 정기룡(1562~1622)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권응수는 선무 2등공신에 선정될 정도의 활약을 하였다. 임진왜란이 발발한 직후에 경상도가 초토화 되었다. 경상우수사 원균과 경상좌수사 박홍의 .. 2021. 4. 17.
[임진왜란 26] 임진년 9월 대반격의 서막 - 이정암의 연안성 전투 │황현필 한국사 훗날 광해군은 연안성 전투를 임진왜란사의 ‘안시성전투’라고 표현하였는데, 연안성 전투에서의 승리한 사람은 의병장 이정암(1541~1600)이었다. 조선은 임진왜란이 끝나고 문무관료들이 공신을 책정하였는데, 선조와 함께 도망다녔던 신하들을 높여서 왕을 호위한 ‘호성공신’으로 86명을 책정하였고, 전쟁을 수행했던 영웅들을 ‘선무공신’으로 18명을 선정하였다. (이러한 선무공신에 ‘박진’, ‘황진’, ‘정기룡’ 등이 들어가지 않은 것은 아쉬운 일이다) 선무 1등공신은 이순신과 권율, 그리고 원균(?)이었다. 2등공신에 진주대첩의 ‘김시민’, 그리고 전라우수영으로 이순신과 함께 많은 공을 세운 ‘이억기’, 그리고 연안성 전투의 ‘이정암’이 선정되었다. 이정암은 의병장이지만 원래 문신관료 출신이었다. 당시 참의(.. 2021. 4. 17.
대통령(정부)과 여당을 호구로 보는 언론 문득 SNS에 돌아다니는 사진 중에서 일본의 천황을 찬양했던 조선일보가, 전두환을 찬양하고, (논란이 있지만) 한국전쟁 당시에 김일성을 찬양했다는 사진이 있다. 언론은 당시나 요즘이나 정보력을 최대한 활용해서 그 당시에 가장 강력한 권력을 가지고 있는 힘있는 자가 누구인지를 제일 먼저 알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강자에 대해서 어떤 입장을 취할 것인지를 가장 빨리 선택할 수 있는 특권(?)이 있다. 강자일지라도 올바른 소리를 한다면 그야말로 언론이 제역할을 하는 것이고, 강자에게 납작 엎드리는 건 나름 생존방식을 선택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흔히 강자로 보이는 당시 정권에게 저항한다는 것은 그만큼 위험을 감수해야만 하는 일이다. 그래서 과거 혹독한 군사정부 시절에 어쩔수 없이 언론이 납작 엎드렸다는 것.. 2021. 4.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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