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2년 4월에 임진왜란이 시작되고 초반에는 조선이 어처구니 없이 밀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런데 7월에 웅치ㆍ이치에서 황진 장군에 의해 호남이 지켜지게 되고, 이순신 장군이 한산도대첩에서 승리하면서 일본의 수륙병진작전에 차질이 생겼으며, 전쟁의 양상이 일본 입장에서는 꼬이기 시작했다.
이제 9월부터는 본격적으로 조선의 대반격이 시작된다. 이순신 장군이 부산포해전(1592.9.1)에서 적의 본진인 부산포를 작살냈고, 같은 9월 1일에 연안성을 이정암 장군이 지켜냄으로 인해서 황해도 서쪽의 연백평야가 지켜지게 되었다. 그리고 9월 8일에 비격진천뢰를 사용하여 박진이 경주성을 탈환해버렸다. 9월 하순경 함경도에서 가토 기요마사가 정문부 등의 공격으로 철수하게 된다. 명나라가 참전하기 전부터 조선이 스스로 전쟁의 양상을 바꿔나가고 있었다
박진(1560~1597)은 이미 7월에 권응수(1546~1608)를 보내서 영천성 전투(1592.7.26)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밀양부사에서 경상좌병사로]
밀양부사였던 박진은 동래성에서 송상현과 합류해서 싸우려고 했으나 동래성이 이미 고니시의 부대에 의해 포위되어서 합류하지 못했다. 동래성이 함락된 후 북상하는 고니시의 부대를 500명의 소규모 부대로 공격했다가 중과부적으로 패하게 된다(소산역전투, 1592.4). 남은 병력을 수습해서 다시금 낙동상 상류의 잔도(길이 좁고 험함)에서 다시 고니시 부대의 발을 묶어놓으려고 시도하였으나, 고니시의 부대가 우회하여 공격하면서 또 다시 패하게 된다. 박진은 밀양을 불태우고 후퇴하게 된다. 이때 김성일(1538~1593)이 ‘박진이 싸우지 않고 도망쳤다’고 잘못 보고하기도 했다. 그런데 진정한 ‘도망왕’은 경상좌병사 이각이었고, 이각이 잡혀서 참수된 후에 비어있는 경상좌병사에 박진이 임명된다.
[권응수를 보내 영천성을 회복함]
초기에는 경상도 의병들과 경상좌병사 박진 사이에 불협화음이 있었다고 한다. 어쨌든 4천명의 의병이 모여졌을 때 의병을 지휘할 사람을 요청하게 되고 박진은 권응수 장군을 보냈으며, 권응수 장군이 영천성을 회복하게 된다. 이때 박진이 장계를 올릴 때 자신의 공이 아니라 권응수와 의병이 열심히 싸운 결과라는 보고를 정확하게 하였고, 이후 의병들도 박진을 믿고 따르게 되면서 1만의 병력이 모이게 된다.
임진왜란의 전투들을 살펴보면, 소규모일 때에는 지휘가 나름 쉬웠으나 대규모 병력이 모였을 때는 오합지졸로 변하는 모습이 자주 나타나게 된다. 용인전투(1592.6.5)가 그 대표적 예라고 할 수 있다.
[제1차 경주성전투 패배, 1592.8.20]
박진은 권응수를 선봉장으로 삼고, 의병장 정세아 등과 함께 경주성을 공격하였다(제1차 경주성 전투). 당시 경주성에는 일본군 2천 병력이 있었으며 성을 지키는 장수는 일본의 5선발이자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칠본창(七本槍) 중 하나인 후쿠시마 마사노리(1561~1624)였다고 한다. (후쿠시마 마사노리의 부장이있던 타가와였다는 설도 있음)
경주성 전투는 1592년 8월 20일에 시작되었다. 이때 후쿠시마가 성 안의 병력 중의 일부를 몰래 성 밖의 산 아래에 매복시켜 놓았었다. 조선군이 성을 공격할 때 성 밖의 매복병이 공격하면서 양쪽에서 협공을 당하면서 조선군은 패하고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이때 의병장 정세아(1536~1612)의 아들 정의번(1560~1592)이 전사하였다.
“박진이 16고을 군사 1만여 명을 합쳐서 권응수로 선봉을 삼고 곧장 경주의 적에게 육박하였다. 그러나 적이 먼저 길 아래 산골짜기에 군사를 잠복시켰다가 전투가 한창 어우러졌을 때 뒤에서 돌진해 들어왔다. 이에 관군이 크게 패하여 전사한 자들이 즐비하였으며, 박진 등은 도망하여 돌아왔다.”
『선조수정실록』
경주성에서는 총 4번 일본과 전투가 벌어졌다. 1차 경주전투(1592.4)에서는 싸워보지도 못하고 그냥 일본군에게 털렸던 전투다. 2차 경주전투(1592.8)는 박진의 ‘1차 경주성 전투’로 매복한 일본군에 의해 패한 전투다. 3차 경주전투(1592.9)는 박진의 ‘2차 경주성 전투’로 비격진천뢰를 사용한 박진이 승리한 전투다. 그리고 4차 경주전투(1593.8)는 이후 조명연합군이 가토의 공격을 방어한 전투다.
박진은 조선군을 다시 수습하고 비장의 무기를 들고 2차 경주성 전투를 준비하게 된다. 비장의 무기는 이장손(?~?)이라는 사람이 개발했다는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였다.
[2차 경주성 전투 승리, 1592.9.8]
9월 8일, 박진은 다시 경주성을 공격하였다. 이때 북쪽에서 결사대 천 명과 함께 비격진천뢰를 들고 가서 공격을 했는데, 떨어진 포탄이 터지면서 왜군 수십 명이 죽거나 부상을 당하게 되었다. 생전 보지도 못한 폭탄으로 사기가 크게 떨어진 일본군은 성을 버리고 도망쳐 버렸고, 박진은 9월 9일에 경주성에 입성하게 된다. 이때 일본군이 서둘러 도망치는 바람에 군량미로 쌀 1만섬을 획득하였다.
경주성 전투(1592.9.8)에 대한 『징비록』의 기록
“밤중에 또 군사를 성 밑에 잠복시켰다가 비격진천뢰를 쏘게 하여 성안 객사 뜰 가운데 떨어지자, 적병은 그 제작법을 알지 못해 다투어 모여들어 구경하며 서로 굴려보기도 하고 들여다 보기도 했다. 조금 있다가 포가 그 속에서 폭발하여 그 소리가 천지를 진동시키고 쇳조각이 별처럼 무수히 부서져 흩어졌다. 맞아서 곧바로 죽은 적병이 30여 명이나 되고, 맞지 않은 적병 또한 쓰러졌다가 한참만에 일어나자 놀라고 두려워하지 않는 적병이 없었으나, 그 제작법을 알지 못하여 모두 신이 하는 일이라 여겼다.”
비격진천뢰는 대완구에 비격진천뢰를 놓고 쏜다. (일종의 박격포) 날아가는 거리는 약 300보 정도로 약 300미터에서 400미터 정도의 사정거리를 갖고 있다. 이 비격진천뢰는 이후 진주성전투(1592.10.6)에서 활용되기도 한다.
“그 체형은 박과 같이 둥글고 부리는 네모가 졌으며, 그 부리에는 손잡이가 달린 뚜껑이 있다. 내부에는 도화선인 약선을 감는 목곡이 있고, 또한 목곡이 들어가는 죽통이 있으며 내부에는 빙철이 채워진다. 특히 목곡은 폭파시간을 조절하는 장치로서 그 재료는 단목을 사용하며, 그 골을 나사모양으로 파서 폭파를 빠르게 하고자 할 때 심에 꿰고, 또 한 끝은 죽통 위 개철 밖으로 내되 두 치를 넘지 못하게 하며, 이때에 죽통과 개철 주위에는 홈이 생기지 않도록 종이로 밀봉한 뒤 화약은 허리구멍으로 채워넣고 격목으로 구멍을 막은 뒤 완구에 실어 발사하되 불꽃을 막으려면 진천뢰 심지에 불을 붙인다.” 『화포식언해』
[비격진천뢰의 위력]
“적진에서 괴물체가 날아와 땅에 떨어져 우리 군사들이 빙둘러 서서 구경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폭발해서 소리가 천지를 흔들고 철편이 별가루처럼 흩어져 맞은 자는 즉사하고 맞지 않은 자는 넘어졌다.” 『정한위략』 - 일본측 기록
“비격진천뢰가 터지자 맞고 넘어져서 즉사한 놈이 20여 명이나 됐다. 온 진중이 아찔하여 거꾸러져서 놀라고 두려워하지 않는 놈이 없었다. 왜적들은 그 까닭을 알지 못하고 귀신의 조화라고 하면서 이튿날 성을 버리고 서생포(울주)로 도망갔다. 박진은 경주성에서 곡식 1만여 섬을 얻었다.” 이긍익(1736~1806)의 『연려실기술』
박진에게 항복했던 사야가는 이후 김충선(1571~1642)이라는 이름으로 조선군에 도움을 주게 된다. 박진은 박진은 나중에 병조참판까지 승진하였는데, 명나라 장수 환영대회를 제대로 못했다고 해서 명나라 장수 누숭선(?~?)에게 맞아 죽게된다. 당시 사인은 폭행치사(구타후유증)였다. 박진이 선무공신에 들어가지 못한 이유는 명나라 장수에게 맞아죽은 장수를 선무공신으로 세우면 명나라에게 항의하는 꼴이 되어서 선무공신이 되지 못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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