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영상은 아마도 고구마를 몇 개 먹는 느낌일 것이다... 미리 각오하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순신은 구국의 영웅이었다. 이순신이 없었으면 전쟁의 양상이 어떻게 되었을지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왕은 도망자였고, 백성까지 버리고 명나라로 망명까지 생각한 자였다. 그런데 자신보다 백성을 더 끔찍이 여겼고 지키기 위해 노력했고 자신보다 더 백성들에게 신망을 더 받고 있는 장수가 등장했다(이순신). 열등의식에 사로잡힌 왕 선조가 이순신에게 시기 질투를 느끼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이순신이 1593년 8월에 삼도수군통제사에 임명되었고, 무모한 출전명령을 장문포에서 왜선 2척을 격침시킨다. 그런데 이때부터 원균과의 사이가 노골적으로 안좋아지기 시작했다.
<선조의 이순신에 대한 최초 의심 발언> 선조실록 1594년 8월 21일
상이 이르기를 “이순신이 혹시 일을 게으르게 하는 것이 아닌가?”
성룡이 아뢰기를 “만약 이순신이 아니었다면 이만큼 되기도 어려웠을 것입니다. 수륙이 모든 장수 중에 순신이 가장 우수합니다.”
<이순신과 원균의 다툼에 대한 최초 언급> 선조실록 1594년 11월 12일 (장문포해전 직후 상황)
상이 이르기를 “이들은 무슨 일로 서로 다투는가?”
김응남이 아뢰기를 “이순신의 공이 매우 크지도 않은데 조정에서 이순신을 원균의 윗자리에 올려놓았기 때문에 원균이 불만을 품고 서로 협조하지 않는다 합니다.”
정곤수가 아뢰기를 “(이순신의 첫 출전은) 정운이 출격을 협박했기 때문에 이순신이 부득이 가서 격파하였다 합니다.”
<이순신과 원균이 다툼에 대한 선조의 의중> 선조실록 1594년 11월 28일
두 사람의 틈이 벌어져 분쟁이 멈추게 해야 함에 있어 상이 말하기를 “나의 생각에는 이순신은 대장으로서 하는 짓이 잘못된 것 같으니, 그 중 한 사람을 체직시키지 않을 수 없다. 혹 이순신을 체차할 경우는 원균을 통제사를 삼을 수 있거니와, 혹 원균을 체차할 경우는 다른 사람을 차출해야 할 것이니, 참작해서 시행하라”
(이후 원균은 충청도 병마사로 발령받게 된다)
<원균에 대한 탄핵을 반대하는 선조> 선조실록 1595년 8월 15일
사헌부가 아뢰기를 “충청병사 원균은 사람됨이 범람하고 탐욕 포학하기까지 합니다. 또 무리한 형벌을 행하여 잔혹한 일을 자행하여 죽은 자가 잇달고 앓다가 죽는 자도 많아서 원망하고 울부짖는 소리가 온 도에 가득합니다. 이와 같은 사람은 통렬히 다스리지 않을 수 없으니 파직하고 서용하지 마소서.”
상이 답하기를 “원균이 사람됨은 범람하지 않다. 이런 시기에 명장을 이처럼 해서는 안된다. 윤허하지 않는다.”
사헌부가 원균의 탄핵을 재차 아뢰니 상이 답하였다. “오늘날의 장수로서는 원균이 으뜸이다. 설사 정도에 지나친 일이 있었다 하더라도 어찌 가벼이 논계하여 그의 마음을 풀어지게 해서야 되겠는가. 윤허하지 않겠다.” [영웅은 영웅을 알아보고, 찌질한 자는 찌질한 자를 영웅으로 알아본다!]
<이순신에 대한 선조의 불신 발언> 선조실록 1596년 6월 26일
상이 이르기를 “이순신은 처음에는 힘껏 싸웠으나 그 뒤에는 작은 적일지라도 잡는데 성실하지 않았고, 또 군사를 일으켜 적을 토벌하는 일이 없으므로 내가 늘 의심하였다.”
김응남이 답하기를 “원균이 당초에 사람을 시켜 이순신을 불렀으나 이순신이 오지 않자 원균은 통곡을 하였다 합니다. 원균은 이순신에게 군사를 청하여 성공하였는데 도리어 공이 순신보다 위에 있게 되지 않자 두 장수 사이가 서로 벌어졌다 합니다.”
상이 답하기를 “이순신의 사람됨으로 볼 때 결국 성공할 수 있는 자인가? 어떠할지 모르겠다.”
<원균에 대해서는 극찬하는 선조> 선조실록 1596년 10월 21일
상이 이르기를 “원균은 국사를 위하는 일이 매우 정성스럽고 또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한다.”
이원익이 아뢰기를 “원균은 전공이 있기 때문에 인정하는 것이지 그렇지 않다면 결단코 기용해서는 안되는 인물입니다.”
김순명이 아뢰기를 “충청도 인심이 대부분 불편하게 여긴다고 합니다.”
상이 이르기를 “원균은 마음은 순박한데 고집이 세기 때문이다.”
당시 정3품 이상의 당상관은 발령받을 때 왕을 알현해야 했다. 그런데 이순신은 갑작스런 승진이라 미처 선조를 알현하지 않았고, 선조는 이순신을 본 적이 없다. 이원익이 체찰사였을 때 1595년 8월에 이순신의 수군에게 잔치를 열어준 적이 있다. 이원익은 이원익은 이순신과 원균을 직접 만나본 사람이다.
<이순신이 나은가, 원균이 나은가. 논의를 주도해가는 선조> 선조실록 1596년 11월 7일
상이 이르기를 “원균은 어떠한 사람인가”
류성룡이 아뢰기를 “지친 군졸을 어루만지는 것이라면 감당할 수 없을 것입니다. (중략) 이순신에게 발끈하여 노기가 있습니다”
상이 “이순신도 원균에게 그러한가?”
이원익이 아뢰기를 “이순신은 스스로 변명하는말이 별로 없었으나 원균은 기색이 늘 발끈하였습니다.”
상이 이르기를 “내가 들으니 군사를 청하여 수전한 것은 원균이고 이순신은 따라간 것이니, 공을 이룬 것은 실로 원균에게서 비롯하였다 한다.”
이원익이 아뢰기를 “이순신은 호남으로 적의 배가 돌진해오면 적이 충만해질 우려가 있기에 늦게 출정했던 것입니다. 원균은 당초에 많이 패하였으나 이수신만은 패하지 않고 공이 있었으므로 다투는 시초가 여기에서 일어났습니다” 하였다.
<가토를 요격하지 않은 이순신을 탓하는 선조> 선조실록 1597년 1월 23일
상이 이르기를 “왜추(고니시 유키나가)는 손바닥을 보듯이 가르쳐 주었는데 우리는 해내지 못했으니, 우리나라야말로 정말 천하에 옹렬한 나라이다. 지금 장계를 보니, 행장 역시 조선의 일은 매번 이렇다고 조롱까지 하였으니, 우리 나라는 행장보다 훨신 못하다. 한산도의 장수는 편안히 누워서 어떻게 해야 할 줄을 몰랐었다. (중략) ... 우리 나라는 이제 끝났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렇게까지 나라를 걱정하시는 분이 전쟁 초기에 요동으로 튀려고 생각했었는가?]
당시 항왜(降倭)자는 왜란 당시 항복한 일본인을 말하는 것이고, 순왜(順倭)자는 왜란 당시에 조선인으로서 일본에 협력한 자를 말한다. 고니시 유키나가 휘하에 있었던 요시라(?~1598)라는 인물은 조선에 유리한 정보를 흘려서 조선 정부에 신임을 얻고 있었는데, 주전론자였던 가토가 언제 어디에 와 있을 것이라는 정보를 흘렸다. 이 정보를 가지고 선조가 이순신에게 출동명령을 내렸다. 그런데 이 정보가 참인지 함정인지 애매한 상황이었기에 이순신은 출전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것은 요시라의 간계였다는 것이 정설이다.
<이순신을 파직하거라> 선조실록 1597년 1월 27일
상이 이르기를 “중국 장수들이 못하는 짓이 없이 조정을 속이고 있는데 이런 습성을 우리나라 사람들도 모두 답습하고 있다. 이순신이 부산 왜영을 불태웠다고 조정에 속여 보고하였는데(부산 왜영 화공 사건, 1596.12), 지금 비록 그의 손으로 청정의 목을 베어 오더라도 결코 그 죄는 용서해 줄 수 없다” 하니
윤두수가 아뢰기를 “이순신의 죄상은 상께서도 이미 통촉하시지만 이번 일은 온 나라의 인심이 모두 분노해 하고 있으니 (중략)... 위급할 때 장수를 바꾸는 것이 비록 어려운 일이지만 이순신을 체직시켜야 할 듯합니다.”
[부산 왜영 화공 사건에 대한 신조실록이 기록] 선조실록 1597년 1월 1일
12월 27일에 성첩한 통제사 이순신의 서장은 다음과 같다.
... 거제 현령 안위 및 군관 급제 김난서, 군관 신영학이 여러 차례 밀모하여 은밀히 박의검을 불러 함께 모의했습니다.
경상 수영 도훈도 김득이 부산에 머물러 있었는데 그날밤 불타는 모습을 보고는 이날 12일 2경에 부산의 왜적 진영 서북쪽 가에다 불을 놓아 적의 가옥 1천여호 및 군기와 잡물, 화포, 기구, 군량 곳집을 빠짐없이 잿더미로 만들었습니다. 그러자 왜적들이 서로 모여 울부짖기를 ‘우리 본국의 지진 때에도 집이 무너져 사망한 자가 매우 많았는데 이번에 이곳에서 또 화환을 만나 이 지경이 되었으니, 우리가 어디서 죽을지 모르겠다...’ 라고 했다 합니다.
이 말을 믿을 수 없지만 또한 그럴 리가 전혀 없는 것도 아닙니다.
안위, 김난서, 신명학 등이 성심으로 힘을 다하여 일을 성공시켰으니 매우 가상하며, 앞으로 대처할 기밀의 일도 한두 가지가 아니니 각별히 논상하여 장래를 격려하소서.
유성룡이 아뢰기를 “이순신은 성품이 가의하여 남에게 굽힐 줄을 모르는데, 신이 수사로 천거하여 임진년에 공을 세워 정헌까지 이르렀으니 매우 과람합니다. 무릇 장수는 뜻이 차고 기가 펴지만 반드시 교만하고 게을러집니다.”
정탁이 아뢰기를 “위급할 때에 장수를 바꿀 수는 없습니다.”
이정형이 아뢰기를 “이순신이 한산도를 지키려 한 것은 합당한 선택입니다. 원균을 통제사로 하면 일이 이루어지지 않을까 싶으니 경솔하지 말고 자세히 살펴서 해야 합니다” (이정형은 연안성 전투를 승리로 이끈 이정암의 동생이다)
상이 이르기를 “이순신은 용서할 수가 없다. 무장으로써 어찌 조정을 경멸하는 마음을 갖는가.”
<이순신을 잡아오거라>
선조실록 1597년 2월 6일
“이순신을 잡아올 때 원균과 교대한 뒤에 잡아올 것으로 말해보내라. 또 이순신이 만약 군사를 거느리고 적과 대치하여 있다면 잡아오기에 온당하지 못할 것이니, 전투가 끝난 틈을 타서 잡아 올 것도 말해보내라.”
선조실록 1597년 3월 13일
“이순신이 조정을 기망한 것은 임금을 무시한 죄이고, 적을 놓아 주어 치지 않은 것은 나라를 저버린 죄이며, 심지어 남의 공을 가로채 남을 무함하기까지 하며 방자하지 않음이 없는 것은 기탄함이 없는 죄이다.
이렇게 허다한 죄상이 있고서는 법에 있어서 용서할 수 없는 것이니 죽여 마땅하다. 신하로서 임금을 속인 자는 반드시 죽이고 용서하지 않는 것이므로 지금 형벌을 끝까지 시행하여 실정으로 캐어내려 하는데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대신들에게 하문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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