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 처음 사람들] 4강. 평민을 위한 평민 전도인, 김세지 (2) - 이덕주 교수
맛집을 발견하면 누군가 데려가고 싶어한다.
은혜는 맛 본 사람이 전하게 되어 있다.
사랑은 받아본 사람이 하게 되어 있다.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는 것은 나누라고 주시는 것이다.
예수를 믿고 경험하고 자유를 맛본 여인들이 그 감격을 나누기 시작하였다. 이것이 전도의 시작이고 초기 한국 개신교 전도부인들의 활동이었다.
[김세지 약력]
1896년 10월 노블 목사에게 세례를 받고 ‘세디’(Sadie, 世智)란 이름을 얻음
1897년 11월 노블 부인의 여자사경회에 참석하여 성경과 교리 공부
전 처의 자식들
김득수 : 평양 YMCA 창설
매륜 : 감리교 감독 양주삼 목사의 부인
반석 : 감리교 감독 변홍규 목사의 부인
1902년 남편 사별
1903년 남산현교회 보호여회 조직, 회장 역임 (당시에 과부들이 방물장수로 자립할 수 있도록 돈을 빌려줌)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 때 영적 회심 체험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은 방언이나 신유가 아니라 회개 운동이었다. 기독교가 다른 종교와 근본적인 차이는 회개가 있다는 것이다. 평양대부흥운동 때 회개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드디어 기독교의 본질을 이해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회개를 통해서 거듭남을 통해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되었다. 기독교는 복 빌어주는 종교가 아니다. 회개가 사라진 곳에 물질적인 복이 들어가서 기독교를 오염시켰다.
요한계시록 2:2-5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2절)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3절)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4절)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기라(5절)
회개하고, 거듭나고, 거룩해지는 체험 : 기독교 복음의 핵심
* 양심전
원산 부흥운동은 하디의 회개에서 출발했다. 밖에서만 찾았던 목회 실패의 원인을 자기 안에서 발견함으로 시작된 회개의 역사였다. 코가 높았던 선교사가 자존심을 꺾고 한국인 회중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죄를 고백한 것이 회중들의 회개를 끌어냈다. 눈물과 회개는 전염성이 강해 눈물은 눈물을, 회개는 회개를 유도한다. 목회자의 눈물과 회개는 더욱 그러하다. 그래서 회개는 위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초기 부흥운동의 특징 중 하나는 보속(補贖) 행위였다. 회개한(repent) 교인들은 자기가 지은 죄를 보상(restitution), 혹은 배상(reparation)하기 시작했다. 전에 훔치거나 횡령한 돈이나 물건을 되돌려 주는 운동이 일어났다. 교인끼리만 그런 것이 아니라 믿지 않는 사람에게도 갚았다. 평양에서는 교인이 중국인 상점을 찾아가 수년 전에 훔친 것이라며 상당한 액수를 갚아 중국인을 감동시켰다. 공주에서는 교인들이 훔친 돈과 물건을 돌려주는데, 가까운 곳은 직접 찾아가 용서를 구하며 돌려주었고, 멀리 떨어진 곳은 우체국을 통해 소포로 보냈으며 주인을 찾을 수 없는 것은 예배당 제단에 갖다 바쳤다. 갚고 나서야 마음의 평화를 얻었다.
유명한 윤승근(尹承根)의 ‘양심전’(良心錢) 이야기도 이 때 생겼다.
경기도 벽제 출신 윤승근은 믿기 전 ‘불량배’ 소리를 들다가 예수를 믿은 후엔 전혀 새사람이 되어 각지를 다니며 전도하였는데 교통이 불편한 강원도 선교를 자원하여 지경터에서 가까운 김화 새술막(지금 학사리)을 거점으로 전도하고 있었다. 그도 1903년 9월 원산에서 열린 사경회에 참석했다가 은혜를 받고, 전에 선교사 몰래 쓴 7달러를 갚으면서 용서를 구했다. 그는 새술막으로 돌아오는 내내 기도하였다.
“하나님이시여, 과거에 지은 모든 죄를 기억나게 하사 해를 입힌 자들에게 사죄하게 하소서.”
그리고 집에 도착했을 때, 20년 전에 지은 죄가 생각났다. 예수 믿기 전 인천에 있던 주전소(鑄錢所)에 근무할 때 정해진 봉급보다 많은 돈을 받고도 그 돈을 돌려주지 않고 쓴 것이 생각났던 것이다. 윤승근은 그 돈을 갚기로 하고 20원 돈을 마련하여 인천 주전소를 찾았으나 폐쇄된 지 이미 오래였다. 그는 포기하지 않고 주전소 기능을 흡수한 탁지부(度支部, 후의 재무부)를 찾아가 사정을 말하고 돈을 내밀었다. 탁지부 관리는 의아했다.
“대저 나랏돈이라면 누구나 거저먹으려고 하거늘 예수교인은 어찌된 일인지 20년 전에 정부 잘못으로 나간 돈마저 갚으려 하는가?”
탁지부에서는 윤승근이 가져온 돈을 ‘양심전’이라 하였다. 탁지부에서 발행한 ‘양심전’ 영수증은 하디 목사가 기념으로 가져갔다.
1911년 한국교회 최초 영아부 조직
1916년 평양 과부회(과부들의 자립과 구제를 위한 조직) 조직
1919년 남산현 교회 감리교 신홍식 목사가 민족대표 33인으로 활약. 당시에 김세지 전도부인도 3ㆍ1운동 참여하였다.
개성의 독립운동과 어윤희 전도사
3ㆍ1운동 당시에 개성에서는 독립의 취지는 찬성하자 시위에 소극적이었다. 아무도 독립선언서를 배분하려고 들지 않았다. 선언서의 보관을 누구의 집에 할 것이냐를 두고 다투던 이들은 결국 북부예배당에 감추어 두기로 의견을 모았다. 결국 선언서는 예배당 지하 석탄광 속에 파묻혀 버렸다. 이때 나선 이들이 개성의 여성들이었다. 북부예배당의 어윤희 전도사는 선언서를 배분할 사람이 없었다는 핑계를 듣고 “그처럼 선언서를 배부할 사람이 없으면 독립선언에 찬성하는 제가 배부하는 역할을 맡을게요”라고 말했다. (그녀는 결혼 3일만에 남편이 동학군에 가담했다가 죽음을 당하고 과부가 되었다) 개성 예수교 부속 호수돈 여학교 생도 35명은 3일 오후 2시경부터 삼삼오오 대를 이루어 찬미가며 독립가르 부르며 만세를 고창하면서 시위운동을 개시함으로써 경찰서에 연행되어 훈계를 받았다. 당시에 남학교를 지날 때 가위를 흔들었다고 한다.
1919년 삼일운동 직후 대한애국부인회 조직에 참여하여 대한애국부인회 재무부장으로 활동하다가 체포되어 투옥됨
3ㆍ1운동 이후 평양에서 기독교에 대한 인식이 바뀌었다. 교회 안에서가 아니라 세상 속에서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한다.
김세지, “나의 과거 생활”(1927)
내가 주의 일을 시작한 후에 도라다니며 일하던 곳은 대동간 건너 잇는 복룡동, 칠산리 밋 그 밧게 일곱 곳을 합하야 아홉 곳으로 9년 동안 단니며 순회전도를 하는 가운데 완전히 교회 설립 된 곳이 여섯 곳이요
또 성외 효자문동에 8년 동안 나니며 기도회를 인도하엿고 평양서 40리 되는 큰귀암과 30리 되는 사랑골도 난니며 전도하엿는데 사랑골은 특별히 노블 부인이 나를 보내여 기도방을 시작케 한 곳이니 오날은 두 곳에 다 교회가 설립이 되엿고
또 15년 동안을 두고 사경회와 성경공부를 식히려 다닌 것이 22처인대 대개는 핍박이 극심하엿스며 처음에는 극심하게 핍박하던 것도 나종에는 우리를 환영한 곳이 만헛섯다. 나에게 전도를 듯고 예수를 믿음 사람의 총수는 똑똑이 기억하기 어려우나 수 천 명에 달할 줄로 믿는다.
그러나 끗긋내 믿어서 완전한 그리스도인 된 남녀 교우의 수를 도합하면 적게 잡아도 7, 8백명은 의심 업시 될 줄로 안다.
내가 처음 다닐 때는 하로도 멧 번식 수욕과 핍박을 당하지 아니할 때가 별로 업섯다.
그러나 어려운 일을 당할 때는 답답할 적이 만치만은 그것을 이기고 날 때에는 마음이 상쾌하여지고 오히려 자미가 낫다
나는 지난 일을 생각할 때마다 이갓치 일할 권능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의 찬송을 들인다.
요한복음 11:25-26, “...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25절)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26절)”
자유와 해방의 복음, 이름을 얻은 여인의 감격으로 자존감있게 신앙생활을 하면서 교회와 사회, 민족을 위해 삶을 바친 여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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