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2] 최영 VS 이성계,,.그리고 정도전, 위화도, 최영묘의 공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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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 & 유투브]/[황현필 한국사]

[조선2] 최영 VS 이성계,,.그리고 정도전, 위화도, 최영묘의 공포

by [수호천사] 2021. 7.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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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2] 최영 VS 이성계,,.그리고 정도전, 위화도, 최영묘의 공포

 

 

신돈을 죽인 후 공민왕은 노국공주를 떠올리게 하는 반야라는 여인을 떠나보내고, 반야가 남긴 다섯 살짜리 모니노를 자신의 아들이라고 어머니인 명덕태후에게 맡긴다. 공민왕은 홍윤에게 죽임을 당한다.

 

당시 고려 권력자인 이인임(미상~1388)이 모니노를 강하게 왕으로 몰아붙여서 10살인 모니노가 왕이 되었다(우왕). 이후 이인임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차지하게 된다. 이인임은 쌩양아치는 아니었지만 그의 옆에는 염흥방, 임견미 등의 쓰레기들이 있었다. 당시 제2의 권력자는 최영’(1316~1388)이었다.

 

 

최영은 공민왕에게는 고마운 존재였다. 공민왕이 기황후의 오빠인 기철 일파를 숙청하자 기황후의 분노에 의해 몽고군 1만여명이 쳐들어왔는데, 이들을 격파한 사람이 최영이다. 그리고 홍건적 2차 침략 때 공민왕이 개경을 떠나 안동까지 피난 갔는데, 이때 홍건적을 작살낸 인물도 최영이다. 그리고 공민왕이 안동에서 개경으로 돌아오면서 흥왕사에서 잠깐 머물렀을 때 김용이라는 권문세족이 쿠데타를 일으킨 것을 최영이 막아내었다(흥왕사정변, 1363).

 

한편 공민왕이 쌍성총관부를 공격하고 철령 이북을 수복하려고 할 때, 이성계의 아버지인 이자춘은 원나라 쌍성총관부 넘버3였다. 이자춘은 아들인 이성계와 논의하고 자체 쿠데타를 일으켜서 쌍성총관부를 공민왕에게 바쳤다. 그리고 이성계와 이자춘을 위해서 개경에서는 환영식까지 열리게 된다. (당시 이성계는 체두변발과 몽고식 복장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고려 말에 신흥 무인들이 많이 등장하면서 홍건족과 왜구를 물리쳤는데 고려의 병사들도 백성들을 많이 괴롭혔다고 한다. 그런데 이성계의 부대는 규율이 잘 되어 있어서 백성들을 괴롭히지 않았고 그만큼 백성들의 신망을 얻었다고 한다.

 

 

당시 정도전은 과거에 급제한 총망받는 젊은이였다. 성리학을 기반으로 한 신진사대부였던 정도전은 권문세족인 이인임의 권력에 반기를 든다. 이인임은 정도전을 전라도 나주까지 유배를 보냈다. 정도전은 백성들을 위하는 정치, 성리학적 통치 이념에 입각한 민본적 국가를 만들어보려고 생각하였고, 그러기 위해서는 역성혁명즉 고려가 아닌 새로운 나라가 들어서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왕의 재질을 갖고 있는 사람을 물색하다가 이성계를 발견한다. 이성계를 만난 정도전은 이성계의 군대를 보고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장군, 이 군대로 하지 못할 일이 뭐가 있으리오.”

 

(정도전을 만나기 전에 최영과 이성계가 힘을 합해서 이인임을 제거했는데, 최영이 이성계보다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이성계는 살짝 미끄러진 상황도 있었다)

 

이자춘은 죽으면서 이성계에게 최영을 큰형님처럼 모시라고 하였다. 기본적으로 최영도 권력자였음은 부정할 수 없다. 최영은 이인임을 제거하고 권력을 잡은 뒤에 자신의 딸을 우왕에게 시집보내서 왕의 장인이 되었다. 그리고 왕을 만나러 갈 때 칼을 차고 있었다고 한다.

 

이때 중국에는 주인이 바뀌면서 주원장의 명나라가 중원을 장악하고 원나라는 북쪽으로 쫓겨나는 상황이 벌어졌다. 명나라는 옛 원나라 땅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면서 철령이북의 땅을 자신들이 지배한다며 철령위설치를 통보하였다. 당시 고려의 권력자였던 최영은 요동정벌을 꿈꾼다. 그리고 그 정벌의 선봉장으로 이성계와 조민수를 낙점한다.

 

신진사대부의 지지를 받고 있는 이성계는 애초부터 요동정벌을 반대했다. (요동정벌의 선봉장인 이성계는 지면 패전의 책임을 면할 수 없었고, 이기더라도 병력의 손실을 감수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4대 불가론

  1. 작은 나라로서 큰 나라를 공격할 수 없다.
  2. 농사철에 군사를 동원할 수 없다.
  3. 온 나라 군사를 동원하여 멀리 정벌하면, 왜적이 그 허술한 틈을 탈 것이다.
  4. 지금 한창 장마철이므로 활은 야교가 풀어지고, 많은 군사들은 역병을 앓을 것이다.

 

이성계는 위화도까지 진군했다가, 회군하여 최영을 유배보내고 조민수와 함께 권력을 잡는다. (해방 이후 김일성은 국경선을 놓고 압록강에 있는 섬들은 다 북한의 영토가 되도록 마오쩌뚱과 협상을 하였고, 결국 위화도가 북조선의 땅이 되는 데 역할을 하였다)

 

 

권력을 잡은 뒤에 우왕은 신돈의 자식이기에 왕의 자격이 없다고 하면서 우왕을 폐했지만, 그 이후에 우왕의 아들 창왕을 왕으로 세웠다. (우왕의 자식은 신돈의 손자인데...) 이후 이성계는 조민수를 제거하고 유배 중이던 최영을 불러들여 참수하였다. 최영은 죽기 전에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한다.

 

“내가 조금이라고 권력에 욕심이 있었더라면 내 무덤에 풀이 날 것이다.”

(실제로 조선왕조 시대에는 풀이 나지 앟았다고 한다)

 

한편 최영은 이런 말도 남겼다. 황금보기를 돌 같이 하라”

 

실제로 최영은 청렴결백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어떤 학자는 최영을 가리켜 “청렴한 권력자”라는 표현을 쓰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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