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1] 신돈은 비난 받아야만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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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 & 유투브]/[황현필 한국사]

[조선1] 신돈은 비난 받아야만 하는가?

by [수호천사] 2021. 7.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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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1] 신돈은 비난 받아야만 하는가?

 

 

공민왕은 대단한 군주, 개혁군주였다. 공민왕은 원나라의 간섭기 80년을 끝낸 왕이었다. 그는 왕권을 강화시켰으며 반원 자주정책을 펼쳤다.

 

공민왕의 개혁작업

  • 권문세족(기철 일파) 숙청
  • 정방 혁파
  • 몽골풍 폐지
  • 관제 복구
  • 쌍성총관부 수복
  • 정동행성 혁파

 

공민왕은 사랑했던 아내 노국대장공주가 죽으면서 개혁은 개나 줘버리고 술에 의지하면서 맛이 가버렸다. 이때 공민왕은 신돈에게 개혁을 추진하도록 전권을 주었다.

 

 

공민왕이 처음 신돈을 만나기 전에 꿈을 꾸었는데 누군가가 자신을 죽이려고 했고, 어떤 스님이 자신을 구해준 뒤에 신돈을 만났다는 이야기가 있다. 신돈은 처음에 공민왕의 제안을 거절하면서, 만약 자신의 도움이 필요하다면, 자신을 죽이지 않겠다는 각서를 써달라고 했고, 공민왕은 각서를 써주고 궁궐에 집도 만들어 주었다.

 

신돈에데 부여된 직책은 다음과 같다.

  • 수정이순논도섭리보세공신
  • 벽사삼한삼중대광
  • 영도첨의사사
  • 판감찰사사
  • 취성부원군
  • 제조승록사사
  • 겸판서운관사

 

원나라에서는 신돈을 권력이 있는 왕이라는 의미로 권왕’(權王)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신돈은 ‘전민변정도감’을 설치하여 전민변정사업을 실시했다. 원간섭기에 권문세족들이 대농장을 소유하고 노비들로 하여금 경작하게 하였는데, 신돈은 토지를 농민들에게 나눠주었고 노비들을 자유민으로 풀어주었다.

 

충렬왕 때 안향에 의해 성리학이 수용되었고 신진사대부들이 성리학을 기반으로 하고 있었는데, 성리학이 위정척사 사상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신돈이었지만 권문세족을 견제하기 위해서 신진사대부를 양성할 것을 공민왕에게 건의하였다. 그리고 성균관을 개편하는 작업을 하였다(고려의 국자감이 충렬왕ㆍ충선왕 때 성균관으로 바뀌어 있었다). 이렇게 양성된 신진사대부들이 훗날 신돈을 요승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신돈은 또한 고려의 과거제도의 폐해인 ‘좌주(지공거)와 문생 관계’의 폐단을 없애려고 했다. 과거시험을 출제한 사람을 스승으로 모시고 한번 스승은 영원한 스승으로 모시면서 생긴 폐단은 고려 왕권 강화에 지대한 악영향을 끼쳐왔었다. 이후 조선에서는 최종 과거시험은 왕 앞에서 보는 것으로 바꿨는데, 이것은 신돈이 먼저 실시한 것이다.

 

이후 공민왕은 정사를 신돈에게 맡기고 술만 쳐먹다가 반야(노국대장공주와 닮은)라는 여인을 만나게 된다.

 

신돈의 권력이 강해지면서 나름 신돈도 선을 넘는 행동을 하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왕 앞에서 절을 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도 있고, 권문세족의 재산을 빼앗으면서 자신의 재산은 계속 늘여나갔다는 이야기도 있으며, 여색을 밝혔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물론 이후 신돈을 깎아내리려는 조선시대 유학자들의 작업일수도 있다)

 

결국 신돈은 공민왕에 의해서 죽임을 당한다. 공민왕은 이후 자신의 근처에 젊은 남자들을 모아서 개혁(?)을 하려고 하다가 남색에 빠지게 된다. 그리고 영화 [쌍화점]에서 한때 연인으로 등장했던 홍윤(조인성)에게 죽임을 당하게 된다.

 

 

그 이전에 공민왕이 빠져있었던 반야라는 여인에게서 나은 아들이 ‘모니노’였는데, 그가 훗날 우왕이다. 우왕이 공민왕의 자식인지 신돈의 자식인지는 밝혀진 바가 없지만 이후 이성계와 신진사대부들은 우왕을 신돈의 자식으로 주장하면서 우왕과 창왕을 폐하고 공민왕을 세운 것이다. 이후 조선에서 발간된 고려국사, 고려사에서는 우왕을 신돈의 아들로 단정하고 있다.

 

신돈은 고려가 낳은 최고의 개혁가이지만, 조선이 만든 최악의 요승이 된지도 모르겠다. 신돈이 이런 말을 했다고 전해진다.

 

“세상을 바꿀 것인지, 나를 바꿀 것인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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