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통일12] 열국시대가 맞다(Feat. 백제부흥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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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 & 유투브]/[황현필 한국사]

[삼국통일12] 열국시대가 맞다(Feat. 백제부흥운동)

by [수호천사] 2021. 7.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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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통일12] 열국시대가 맞다(Feat. 백제부흥운동)

 

 

백제가 멸망당한 이후 당나라가 백제를 직접 지배하려는 야욕을 부리면서 660년에 웅진도독부를 설치하였다.

 

고구려, 백제, 옥저는 뿌리가 부여계로 같다. 부여는 5세기 말(494) 고구려의 문자명왕 때 멸망당했다. 금관가야는 532년 신라 법흥왕에게 멸망당했고, 대가야는 562년 신라 진흥앙에게 멸망당했다. 따라서 솔직히 삼국시대는 대가야가 멸망당하는 562년부터 백제가 멸망당하는 660년까지로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삼국시대라고 보기보다는 열국시대로 보아야 할 것이다.

 

중국 한나라가 세운 낙랑군은 고구려 대무신왕 때 호동왕자에게 멸망당했고, 우리 민족이 세운 낭락국은 고구려 미천왕 대 멸망당했다.

 

한강유역에서 출발한 백제는 수도를 웅진으로 천도하고 훗날 성왕이 사비로 천도한다. 지금의 전라도는 근초고왕이 마한을 복속(369)하면서 백제의 영토가 되었기 때문에 백제의 근거지는 충청도라고 해야 맞을 듯 하다.

 

신라가 외세를 끌어들여서 백제를 멸망시킨 것이 신라 입장에서는 최선을 다한 거지만 우리 민족의 역사 입장에서는 아쉬움이 있다.

 

백제의 부흥운동은 주류성에서 복신과 도침, 임존성에서 흑치상지와 지수신이 주도했다. 조선상고사에서는 복신을 상당히 높이지만 흑치상지는 배신자로 낙인을 찍었다.

 

 

한때 백제의 200여 성을 복신과 흑치상지가 다시 장악하였다. 그때 당나라는 백제 땅에 13만을 주둔시킬 수가 없어서 3만을 남겨놓고 10만이 당나라로 돌아갔다. 유인궤(602~685)가 남아있는 당나라의 부대를 이끌었는데 백제 땅에서 개고생을 한다. 신라가 군량미를 조달했지만, 복신은 전면전을 하지 않고 신라에서 건너오는 군량미를 끊는 작전을 펼쳤다.

 

당시 백제의 상좌평 출신인 복신의 작전은 주효해서 하마터면 당나라 3만이 백제 땅에서 다 굶어죽을 뻔했다. 이때 만약 고구려가 백제의 부흥운동을 지원했더라면 성공했을지도 모른다. 665년에 연개소문이 죽은 걸로 나오는데, 조선상고사는 연개소문이 백제 멸망 이전인 657년에 죽었다고 본다. 그렇다면 연개소문의 아들 연남생(634~679)이 무능했다는 말이다.

 

복신도 왕족이었다(무왕의 조카). 충분이 스스로 왕이 될 수 있었지만, 그는 당시 일본에 있던 왕자 부여풍(재위 660~663)을 왕으로 세웠다. 이후 복신이 승려였던 도침을 죽였다. 부여풍은 일본에서 보내온 병력으로 당나라와 신라를 공격하려고 하였다. 복신은 지구전을 편다면 당나라는 스스로 물러갈 것이고 이후에 신라는 해볼만한 상대라고 생각해서 전면전을 반대했다. 그런데 부여풍이 복신을 죽여버린다. 이것이 백제 부흥운동의 실패 원인이다.

 

이후 복신을 지지했던 사람들이 부여풍에게서 등을 돌려버리고, 복신을 지지했던 흑치상지(630~689)는 당나라에 투항해 버린다(중국에서 의자왕이 항복하라는 편지를 보냈다는 설도 있다).

 

이후 당나라가 회유하는 과정에서 의자왕의 아들 부여융(615~682)을 데리고 와서 웅진도독부를 관리하게 하면서 백제 세력의 분열을 꾀한다.

 

웅진도독부(부여융)의 세력을 남백제라 하고, 복신 세력(후에 부여풍)을 서백제라고 한다. 이후 서백제가 일본과 손을 잡고, 남백제는 당과 신라와 손을 잡고 백강에서 자웅을 벌였고, 결국 남백제가 승리하면서 부흥운동은 좌절되고 만다.

 

부여풍과 지수신은 고구려로 도망쳤고, 흑치상지는 복신이 죽은 뒤에 항복하여 중국 당나라로 건너가서 무장으로 활약하다가 측천무후(재위 690~705)가 다스리던 시대에 반란에 연루되어 죽임을 당한다. (이후에 흑치상지의 아들에 의해서 누명은 벗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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