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통일11] 당태종vs연개소문,의자왕vs김춘추 (Feat 백제 멸망)
고당전쟁이 있기 전에 백제 의자왕이 윤충 장군을 시켜서 대야성을 점령하고 김품석과 고타소를 죽인다. 김춘추는 자신의 사위인 김품석과 딸인 고타소가 그렇게 죽은 것에 대해서 분노하고, ‘내 살아 생전에 백제의 멸망을 보리라’고 결심한다.
우선 고구려에 갔다가 간신히 도망쳐온 김춘추는 일본으로 건너가서 동맹을 맺으려고 했다가 바보취급을 받고 돌아온다. 그래도 의지의 김춘추는 또 다른 동맹을 찾아 바다를 건너 당나라로 건너간다. 당태종 이세민은 신라를 하찮게 여겨서 자신의 조카를 보낼터이니 왕으로 삼으라는 말을 하기도 했고, 선덕여왕을 무시하기도 했다.
김춘추는 신라가 앞으로 연호를 쓰지 않고 당나라 연호를 쓰겠다고 말하고, 신라 관료들의 공복을 당나라식으로 맞추겠다고 하였으며, 자신의 둘째 아들 김인문을 볼모로 잡혀놓겠다고 말한다. (이후에 이후에 강수라는 사람이 김인문을 돌려보내달라는 『청방인문서』를 쓴다) 정말 간도 빼주고 쓸개도 빼줄테니 백제만 멸망시켜 달라고 부탁한 것이다. 그래서 결국 당나라와 신라가 동맹을 체결하게 된다.
- 645년 안시성 전투
- 648년 나당동맹
- 649년 당태종 죽음
당태종이 죽고 그의 아들 당고종(재위 649~683)이 즉위할 때에 당태종은 고구려 침략을 하지 말라고 말하고 죽었다. 그리고 그 시기에 신라에서는 진덕여왕이 자식이 없이 죽자, 김유신 세력을 등에 업은 김춘추가 왕이 되었다(태종 무열왕, 재위 645~661).
이후 당나라는 신라에게 군량미를 지원하라고 하고 고구려를 공격한다. 이때 신라는 어렵게 군량미를 보냈는데, 당나라는 군량미만 먹고 후퇴하였다. 요즘으로 말하면 ‘먹튀’를 두 번이나 했다. 신라는 당나라와 신라가 연합해서 고구려를 공격할 때마다 백제가 옆구리를 치기 때문에, 차라리 백제를 먼저 멸망시키자고 제안을 한다.
백제 의자왕은 초기에는 정치를 잘했지만 후대에는 가족만 챙기고 향락에 빠진 면이 없지 않은 것 같다. 이때 백제의 충신인 성충(605~656년)은 감옥에서 죽었다(자결설과 단식죽음설). 성충은 죽기전에 당나라와 신라의 침공을 예상하고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긴다. “수군은 기벌포를 못 들어오게 하고 육군은 탄현을 넘지 못하게 하면 이길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 명의 충신 흥수(?~?)는 유배 중이었다.
나당연합군이 쳐들어올 때 당나라의 소정방이 예상보다 먼저 기벌포에 상륙을 했고, 신라의 김유신이 거드린 군대는 이미 탄현을 넘어버렸다. 신라군을 막기 위해서 계백이 5천의 결사대로 황산벌에서 신라군을 막게 되었다. 신라의 5만이 계백의 5천을 뚫지 못하고 있을 때, 화랑인 반굴(?~660년)과 김품일의 아들 관창이 단기필마로 불나방처럼 백제군에게 돌진하다가 죽임을 당한다.
젊은 화랑의 죽음에 신라군은 각성하고 결국 계백의 5천 결사대를 격파하게 된다. 그리고 부여성에 있던 태자 부여융이 항복하고, 웅진성으로 피신했던 의자왕도 항복하면서 백제는 660년에 멸망하게 된다.
백제가 멸망할 때 낙화암에서 3천 궁녀가 떨어졌다는 건 상식적으로 말이 안된다. 당나라 시인 백거이(772~846년)가 언급하고, 백제 의자왕의 사치를 강조하기 위해 만들어낸 이야기이다. 당시 3천 궁녀가 머물 수 있는 백제의 궁궐이 가능하지도 않았고, 낙화암은 단시간에 3천명이 올라가서 떨어질 정도의 여유공간이 없다.
소정방과 김춘추가 상석에 앉아 의자왕에게 술을 따르게 하고 그 술을 의자왕의 얼굴에 뿌렸으며, 김춘추의 큰아들 김법민(훗날 문무왕)은 백제의 부여융을 밧줄로 묵어 채찍으로 내려쳤다고 한다. 김춘추는 사위와 딸의 복수는 달성한 것이다. (이 복수 다음 해에 죽는다)
백제를 정벌한 당나라 장수 소정방은 정림사지5층석탑에 자신의 낙서를 새겨놓는다. (자기가 백제를 멸망시켰다는 글) 이로 인해서 ‘평제탑’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다.
의자왕이 정말 나라를 말아먹을 폭군이었을까? 부여 지역에서 내려오는 이야기는 의자왕이 당나라로 끌려갈 때 의자왕이 탄 배가 수평선에서 사라져갈 때 백제 백성들이 산을 기어올라서 의자왕을 부르면서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의자왕은 중국 땅에서 죽어 북망산에 묻혔다고 한다.
백제의 부흥운동은 복신, 도침, 왕자 풍이 주도한다. 일본의 4만 병력이 참가하는 백강전투(663년)가 벌어졌고, 뛰어난 무장인 흑치상지(630~689)도 백제 부흥운동을 전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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