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통일8] 연 개 소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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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 & 유투브]/[황현필 한국사]

[삼국통일8] 연 개 소 문

by [수호천사] 2021. 7.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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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통일8] 연 개 소 문

 

 

중국의 소설 중에 장열의 규염객의 주인공은 중국 역사를 통틀어 무술 실력이 가장 뛰어난 인물이었는데, 중국의 황제가 되려고 했지만 잘난 사람(당태종)이 있어서 양보하고 동쪽으로 가서 왕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규염객이 연개소문은 아닐까?)

 

갓쉰동전이라는 소설이 있다. 중국사람들은 연개소문을 캐쉰이라고 발음하기 때문에 연개소문을 모티브로 한 소설일지도 모른다.

 

소설에 의하면 갓쉰동의 아버지는 ‘연국혜’라는 사람인데 나이 50에 아들을 얻었다. 태어난 아들이 나라를 구할 상인데 단명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 먼 곳에 보내서 신분을 속이고 다른 사람의 손에 키우게 하라는 조언을 듣고 등에 ‘갓쉰동’이라고 새긴 후에 원주 지역의 호족집 앞에 놓았다. 갓쉰동은 거기에서 자라면서 머슴으로 살게 된다. 도중에 산에서 도인을 만나서 무술, 병법, 천문, 지리를 익혔다. 이 원주 호족의 셋째 딸 영희와 갓쉰동이 사랑에 빠지게 되는데, 영희는 갓쉰동의 신분이 어떠하든지는 상관이 없고 사나이답지 못하면 시집가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갓쉰동은 당시에 나라를 괴롭히는 달딸국을 정벌하고 싶다는 이야기를 했고, 영희는 달딸국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서는 달딸국에 가서 그 나라의 정보를 얻어야 한다고 말한다. 갓쉰동은 달딸국에 가서 우여곡절 끝에 달딸국의 왕의 집 머슴이 된다. 그런데 달딸국의 둘째 아들이 갓쉰동을 불편하게 생각해서 모함하여 감옥에 가두게 된다. 갓쉰동은 감옥에서 새장에 갇혀있는 매를 풀어준다. 달딸국의 공주가 이상히 여겨 갓쉰동에게 물어보자, ‘내가 나를 감옥에 가둔 사람을 원망하는데, 새장에 갇힌 새를 풀어주지 않으면 원망할 자격이 없다’고 대답한다. 달딸국의 공주는 갓쉰동에게 호감을 느끼고 그를 풀어준다. 고국으로 돌아온 갓쉰동은 영희와 재회하고 아버지 연국혜와 재회하게 된다.

 

박은식 선생은 연개소문을 천개소문이라고 표현했다. 그런데 연걔소문이 맞는 것 같다. (연자유-연태조-연개소문) 아마도 당나라 초대 황제 고조의 이름이 이연이기 때문에 연개소문을 천개소문으로 바꿔 불렀던 것 같다.

 

 

고구려 5부족 연맹체

  • 계루부 - 현 왕족 고시 : 1대(동명왕), 6대(태조왕)
  • 소노부 - 전 왕족(비류부, 연노부) : 2대 유리왕부터 5대 모본왕까지
  • 절노부 - 왕비족 : 명림씨 집안
  • 관노부
  • 순노부

 

연개소문은 소노부(연노부) 출신인 것 같다. 당시에 막리지는 군대지휘관이었고, 연개소문의 아버지 연태조가 막리지였기에 연개소문도 막리지의 자리를 물려받을 수순이었다. 그런데 연개소문을 경계한 귀족들이 그것을 반대하고 있었다. 삼국사기의 기록에 의하면 연개소문은 막리지 자리를 얻기 위해 귀족들에게 굽신거렸고, 막리지 자리를 얻자마자 귀족들을 싹 죽이고 영류왕까지 죽인 악인으로 등장한다.

 

수나라를 물리친 영웅 중의 한 명인 고건무가 영류왕이 되었는데(618~642) 그는 서수남진 정책을 추진하였다. 당시 고구려 군부에서는 수나라가 멸망하고 다시금 통일왕조가 들어서서 정비되기 전에 중국을 쳐야 한다는 분위기가 있었다. 아마도 이들의 중심에 연개소문이 있었을 것이다. 연개소문은 중국을 지배하려는 야욕을 가지고 있었다.

 

연개소문은 신라와 백제는 같은 민족이기에 중국과 싸우자는 서진남수 정책을 주장했다가 천리장성 축조 책임자로 쫓겨나게 될 팔자가 되었다. 16년 동안 천리장성을 축조했다고 하는데, 천리장성을 축조하면서 민생이 피폐해진 것은 너무나 당연한 상황이었다. 그리고 연개소문에 대해 불편하게 생각한 영류왕과 귀족들이 연개소문을 제거할 계획을 세웠다. 이것을 사전에 알게 된 연개소문은 쿠데타를 일으켜 영류왕과 귀족을 죽여버린다.

 

 

연개소문이 왕을 죽였으면 당시 지방의 군대 지휘관들(욕살, 대모달, 말객, 처려근지)은 상당수 고씨 성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가만히 있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연개소문의 쿠데타에 반기를 든 사람이 없었던 것을 보면 연개소문의 주장이 상당히 지지를 받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연개소문은 대대로(총리)와 막리지(군대지휘관)을 통합해서 대막리지에 오른다.

 

그런데 아쉬운 것은 살수대첩 이후 골든타임을 놓쳐버린 것이다. 단재 신채호는 연개소문이 10년만 일찍 권력을 잡았더라면 뭔저 중원을 쳐들어갔을 것이라고 보았다.

 

이러한 시기에 김춘추가 고구려와 동맹을 맺고 백제를 멸하려고 생각해서 고구려를 방문한다. 이 당시 고구려의 왕은 영류왕의 조카 보장왕(642~668)이었는데, 김춘추에게 죽령 이북의 땅을 토해내면 생각해 보겠다고 하였다. 김춘추는 영토 문제는 자기 권한 밖이라고 해서 감옥에 갇힌다. (삼국사기에는 이것이 모두 연개소문의 생각이었다고 한다) 이후 김춘추는 별주부전을 읽고 꾀를 내어 고구려를 탈출했다고 한다.

 

그런데 당시 권력자인 연개소문이 바보는 아니기 때문에 삼국사기의 기록에는 상당한 허점이 있다. 신채호의 『조선상고사』에 의하면 이 당시 백제 성충이 연개소문을 만나 동맹을 맺자고 하는 상황에서 김춘추가 고구려를 방문하였고, 연개소문은 김춘추를 자기 집에 모시고 한달 두달 대화를 나누었다고 한다. 이때 백제의 성충이 연개소문에게 백제가 당나라에 식량 수송해도 돼?”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전통적으로 한번 뒤통수를 친 전력이 있는 나라이기에 믿을 수 없다고 말한다. 연개소문은 신라보다 백제와 동맹을 맺는 것이 유리하다고 생각했고, 명분을 얻기 위해서 김춘추에게 죽령 이북의 땅을 내놓으라고 요구한 것이다.

 

당태종 이세민은 당나라 건국 일등공신이었는데, 무문의 변(626)을 일으켜 황제가 되었다. 그는 수문제가 시도했던 정책을 정비해서 완성시켰고, 국력을 확장하여 주변 지역을 평정하기 시작했다. 흔히 그를 전투형 군주라고 하는데 주변을 다 복속시켰고 이제 마지막 남은 나라가 고구려였다. 그런데 당시 당나라 승상은 당태종 이세민의 스승인 위징(580~643)이라는 사람이었는데 고구려 정벌을 결사적으로 반대한 인물이다. (중국 속담 중에 해서는 안되는 일을 하려고 할 때 위징이 버선발로 달려온다는 말을 하기도 한다)

 

 

위징이 죽은 뒤(643) 당태종 이세민은 결국 고구려 정벌을 감행한다(고당전쟁, 645)

 

중국인들이 기억하는 연개소문은 어떠한가? 명나라 시대 장편 희극 중에 연개소문은 당태종을 소진왕으로 낮춰서 부르면서 ““네가 투항하지 않는다면 당나라를 방목장으로 만들어 버리겠다고 위협한 인물로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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