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수립8-2] 찬탁이 옳아? 반탁이 옳아?(Feat. 검찰개혁이 옳아? 조국사퇴가 옳아?) 2편
동아일보가 호외로 낸 기사는 역사적인 오보였는데, 그 내용의 요지는 “미국은 즉각 독립을 주장했고, 소련은 신탁통치를 주장했다”는 것이었다.
처음에 이 사실을 접한 우익과 좌익은 모두 다 반탁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런데 우익은 한 발 더 나아가서 신탁통치를 주장했던 소련을 나쁜 나라로 인식하고 반탁운동을 ‘반소, 반공’운동으로 확산시켰다.
그런데 실제로 미국이 신탁통치를 주장했고, 소련은 즉각 독립을 주장했었다. 소련의 입장에서는 즉각 독립을 하는 것이 자신들에게 유리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실제 독립운동을 가열차게 진행했던 대부분은 사회주의자들이었으며, 이들이 조선 백성들에게 나름 인정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독립운동가가 다 사회주의자는 아니지만 독립운동가의 대부분은 사회주의자라고 할 수 있으며, 민족주의계의 우익이 다 친일파는 아니지만 우익의 대부분은 친일파였다.
3ㆍ1운동을 가열차게 진행했지만 결국 독립을 쟁취하지 못하고 허무에 빠진 조선의 엘리트들이 사회주의 사상을 받아들이고 가열차게 독립운동을 전개하게 되었다.
소련의 입장에서는 빨리 나라가 만들어지면 사회주의 국가가 만들어질 것이고 그러면 자신들의 위성국가가 하나 세워지는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야말로 날로 먹는 것이다. 당시의 분위기 때문에 일본 관동군 출신인 박정희 조차 남로당에 가입했던 것을 보면 당시 사회주의가 얼마나 인기있었는지를 알수 있었을 것이다.
반면 미국의 입장에서는 반공태세를 갖추는 데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에 신탁통치를 주장했던 것이다.
나름대로 억울한 소련이 모스크바삼상회의의 전문을 공개하였지만, 당시 조선의 문맹률이 높아서 글을 읽고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대부분 글을 읽을 줄 아는 엘리트 들은 사회주의자들이었다. 다음은 모스크바삼상회의의 결정에 대한 전문이다.
- 조선을 독립국가로 재건설하며 그 나라를 민주주의적 원칙하에 발전시키는 조건을 창조하고 가급적 속히 장구한 일본의 조선통치의 참담한 결과를 청산하기 위하여 조선의 공업, 교통, 농업과 조선인민의 민족문화의 발전에 필요한 모든 시책을 취할 조선 임시 민주주의 정부를 수립할 것이다.
- 조선 임시정부 구성을 원조 및 적절한 방책의 초안 구체화를 위하여 남조선 미합중국 사령구, 북조선 소련 사령부의 대표자들로 공동위원회가 설치될 것이다. 제안서 준비에 대해 위원회는 조선의 민주주의 정당 및 사회 단체와 협의할 것이다. 위원회가 작성한 건의서는 공동위원회에 대표를 둔 두 정부의 최후 결정 전에 미ㆍ영ㆍ소ㆍ중 정부의 참작을 위해 제출되겠다.
- 조선 인민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진보와 민주주의적 자치 발전 및 조선 독립 국가수립을 돕고 협력(신탁통치)하기 위한 방안을 만드는 것은 조선 임시 민주주의 정부 및 조선 민주주의 단체의 참여하에 공동위원회가 할 역할이겠다. 공동위원회의 제안은 최고 5년 기간의 4개국 신탁통치 협약을 작성하는 데 대해 미ㆍ영ㆍ소ㆍ중 정부와 공동으로 참작할 수 있게 조선임시정부와 협의후 제출되겠다.
- 남북 조선과 관련된 긴급한 제 문제 고려 및 남조선의 미합중국 사령부와 북조선의 소련 사령부 사이의 행정ㆍ경제 문제의 영원한 조화를 확립하는 조치의 구체화를 위해 2주 이내에 미국과 소련 사령부 대표 회의가 소집될 것이다.
이 전문이 분단을 막고 통일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과정이라는 사실을 바르게 읽고 이해한 사회주의자들은 신탁통치는 기분 나쁘지만 분단을 막기 위해 신탁통치를 찬성하게 된다(이것을 ‘삼상지지선언’이라고 한다). 사회주의자들은 신탁통치가 기분은 더럽게 나쁘지만 분단이 되면 민족의 비극이 더 커지기 때문에 신탁통치를 찬성했던 것이다. (분단이 되면 전쟁은 필연이기 때문에 분단시킨 이승만은 역사의 심판을 받야야 한다)
그런데 이후 반탁이 애국이고 찬탁이 매국이라는 프레임으로 진행되었다. 일제강점기에 열심히 독립운동을 했던 사회주의자들이 갑자기 매국노가 되고, 일제강점기에 친일했던 사람들은 갑자기 애국자가 된다. 애국자(?)인 노덕술이 매국노(?) 김원봉을 잡아다 고문하는 상황까지 일어났다.
역사를 조금만 공부한 사람이라면 당시에 반탁보다는 찬탁이 옳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당시 남한과 북한에 정부가 수립되는 것은 1948년이었기에 어차피 병신처럼 군정의 신탁 통치를 받은 것 아닌가?) 분단을 막기 위해서는 찬탁이 옳았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민족의 지도자들은 어떤 행보를 했을까를 살펴보아야 하는데, 이 과정에서 민족지도자이며 우익의 대표인 김구가 큰 실수를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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