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자호란8] 남한산성 46일-치욕의 역사도 우리역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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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 & 유투브]/[황현필 한국사]

[병자호란8] 남한산성 46일-치욕의 역사도 우리역사다.

by [수호천사] 2021. 5.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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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호란8] 남한산성 46일-치욕의 역사도 우리역사다.

 

 

이번 영상은 남한산성에서의 항쟁 47일간의 기록을 일자별로 정리하였다. 

 

 

1일차(12월 14일)

적이 개경에 왔다는 말을 듣고 비빈은 김경징(1589~1637)을 시켜 강화도로 보내고 늦게 출발했던 인조는 강화도를 포기하고 남한산성으로 들어간다.

백성의 통곡과 남한산성을 따라 들어가는 이는 수십 명에 그쳤다.

심야에 대책 회의를 하다

영의정 김류는 강화도로 가기를 청하다.

 

2일차(12월 15일)

새벽 7시 인조는 남한산성 남문을 나와 강화도로 향하지만 최악의 날씨로 다시 산성으로 돌아

최명길이 왕자와 대신들을 인질로 보내라는 청의 조건을 전달했다.

 

주화파(主和派) : 전쟁을 피하고 화해하거나 평화롭게 지내자고 주장하는 파
척화파(斥和派) : 적이나 상대와 화의(和議)하는 것을 거부하는 입장의 일파.

 

3일차(12월 16일)

인조가 산성 방어에 나서다. 성을 순시하고 병사를 위로하였다.

능봉군과 심집이 통역관 박난영과 적진으로 갔다.

거짓말을 했다고 용골대가 박난영의 목을 베었다.

 

4일차(12월 17일)

영의정 김류가 영남이나 호남으로 피난을 권한다.

세자를 인질로 삼는 문제를 논의하면서 인조 울먹였다.

 

5일차(12월 18일)

인조, 항전을 결의한다.

수성하는 장교들과 병사들을 위로한다.

 

6일차(12월 19일)

수성하는 병사들에게 5년간 세금 감면을 약속하고 천인들은 면천을 약속한다.

청이 남문 쪽으로 공격하자 화포를 쏘아 물리친다.

 

7일차(12월 20일)

청의 사자가 도착하자 김신국(1572~1657)과 이경직(1577~1640)을 보냈다.

마부대가 청나라 황제 홍타이지가 개성에 도착했음을 알렸다.

인조는 각 도에 비밀 문서를 보내 남한산성을 구원토록 했고 삼도의 수군을 징집시켰다.

 

8일차(12월 21일)

충청도 원병이 헌릉에 도착하여 불화살로 서로 호응한다.

 

9일차(12월 22일)

인조가 결전을 지시하고 자모군을 편성한다.

인조는 자모군에게 술과 음식을 내린다.

 

10일차(12월 23일)

자모군이 성 밖에 나가 청나라 병사 50여 명을 죽였다.

인조가 술과 음식을 내렸다.

 

11일차(12월 24일)

인조가 세자와 기청제를 드리며 절하다가 옷이 젖음에도 계속 울었다.

 

12일차(12월 25일)

온조에게 제사를 지내고 전의를 다지다

 

13일차(12월 26일)

군사 출정을 날씨로 인해 보류하고 다시 이경직을 청군에게 보내 강화를 논의하게 하다.

강원도 영장 권정길이 검단산에 도착했지만 패했다.

 

14일차(12월 27일)

성안의 말들이 굶어 죽었다. 그 말을 거둬 군사들이 먹었다.

인조는 청나라 장수에게 소 두 마리, 돼지 3마리, 10병을 보냈다.

용골대가 말했다. “굶주린 너희들이나 먹어라. 어차피 팔도의 술과 고기가 우리 것이다.”

 

15일차(12월 28일)

이조판서 최명길이 강화를 주장하다.

 

16일차(12월 29일)

유도대장 심기원(1587~1644)이 승리했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성 안의 사기가 진작되었다.

전시 사령관 김류가 북문을 통해 조선군을 강제 출정시켰다.

비장 유호를 시켜 나가지 않는 자를 목 베게 하였고, 유호는 만나는 사람마다 칼로 쳐 죽였다.

조선군은 성 밖을 나가면 죽을 줄 알면서도 밀려 나갔고, 매복한 적에게 200여 명이 몰사하였다.

 

17일차(12월 30일)

또 청 진영에 사신을 파견하였다.

 

18일차(1월 1일)

인조가 백관을 거느리고 명나라 황제에게 망궐례를 행했다.

 

* 망궐례(望闕禮) : 왕을 배알하지 못할 때 멀리서 궁궐을 바라보고 행하는 의례

 

19일차(1월 2일)

이경직이 청 태종의 답서를 받아왔다.

대청국의 황제는 조선의 관리와 백성에게 조유하노라짐이 이번에 온 것은 죽이기 좋아하고 얻기를 탐해서가 아니다그대 나라의 군신들이 스스로 재앙을 불렀을 따름이다그러나 그대들은 집에서 편히 생업을 즐길지어다망령되이 도망하다가 우리 군사들에게 해를 당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 항거하는 자는 반드시 죽일 것이요, 순종하는 자는 기필코 받아들일 것이며 도망하는 자는 기어이 사로잡을 것이니라.”

 

친명배금(親明排金) : 명과 친하게 지내고 금을 배척한다.
존명배청(尊明排淸) : 명나라를 섬기고 청을 배척한다
화이사관(華夷史觀) : 세상을 중화와 오랑캐로 나누는 사관

 

20일차(1월 3일)

오랑캐 진영에 국서를 보내다.

청나라 연호를 썼고 잘못했다고 비는 내용의 국서였다.

국서는 최명길이 썼다.

조선국왕 이종은 삼가 대청 황제께 글을 올립니다소방이 대국에 죄를 지어 스스로 병화를 불렀습니다그런데 듣자오니 황제께오서 궁벽하고 누추한 이곳까지 오셨다기에 반신반의하며 기쁨과 두려움이 교차하였습니다지난 날의 일에 대한 죄는 이미 소방이 알고 있나이다그러나 죄가 있다면 정벌했다가 죄를 때달으면 용서하는 것이야말로 천심을 체득하고 만물을 포용하는 대국이 취할 행동이라 할 것이옵니다그러나 대국이 기꺼이 용서해주지 않고 기필코 그 병력을 끝까지 쓰시려 한다면 소방은 사리가 막히고 형세가 극에 이르러 죽음을 무릅쓰고 싸우기를 기약할 뿐이옵니다.”

 

21일차(1월 4일)

김상헌과 윤집이 최명길을 비난했다.

 

22일차(1월 5일)

탈영병을 효시하였다.

전라 병사 김준룡(1586~1642)이 광교산에서 청군과 교전하여 승리하였다.

 

23일차(1월 6일)

함경감사 민성휘(1582~1647)의 군대가 강원도에 도착하였다 하여 인조가 기운을 얻었다.

 

24일차(1월 7일)

도원수 김자점과 전라감사의 장계가 오다.

 

25일차(1월 8일)

성 안의 식량 문제에 대해 논의하다.

온조 제사가 미진했다 하여 다시 지낼 것을 논의하다.

 

26일차(1월 9일)

김류와 최명길이 국서를 보내는 것을 윤허받자 김상헌이 반대하였다.

 

28일차(1월 11일)

원종의 영정 앞에서 제사를 지내다.

김류와 최명길이 국서를 수정하고 완성하였다.

 

30일차(1월 13일)

청의 선봉장 용골대와 마부대에게 은을 뇌물로 보내다.

 

31일차(1월 14일)

성 위의 군졸이 얼어 죽었다.

 

32일차(1월 15일)

경상좌병사 허완(1569~1637)이 쌍령에서 패했다는 소식과 충청감사 정세규(1583~1661)가 용인에서 패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33일차(1월 16일)

용골대가 무조건 항복을 강요하자 인조가 대신들과 논의하였다.

 

34일차(1월 17일)

청 태종 홍타이지의 글이 왔다.

지금 그대가 살고 싶거든 빨리 성에서 나와 귀순하고 싸우고 싶거든 속히 일전을 벌이도록 하라. 양국이 싸우다 보면 하늘이 처분을 내려줄 것이다.”

 

35일차(1월 18일)

예조판서 김상헌이 최명길이 지은 국서를 찢고 주벌을 청하다.

청 태종이 국서를 받지 않자 도로 가져와 폐하라는 두 글자를 더하다.

세자가 울었고 눈이 더 많이 왔다.

 

36일차(1월 19일)

오랑캐가 성 안에 대포를 쏘았는데, 대포의 탄환이 거위알만 했으며 더러 맞아서 죽은 자가 있었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놀라고 두려워하였다.

이조참판 정온(1569~1641)이 이조판서 최명길을 매국노라 비난하다.

 

37일차(1월 20일)

청나라가 사신을 보내 척화주전을 주장한 신하를 묶어보낼 것을 주장하였다.

그대가 정말로 성에서 나와 귀순하려거든 먼저 앞장서서 (척화를) 모의한 신하 두세 명을 묶어 보내도록 하라짐이 효시해 후인을 경계시키겠노라짐으로 하여 서쪽 정벌의 대사를 그르치게 하고 백성을 병화에 빠뜨린 자가 이들이 아니고 누구겠는가?”

 

38일차(1월 21일)

최명길이 조선 국왕이 성에서 나와야 한다는 용골대의 말을 아뢰다.

 

39일차(1월 22일)

세자가 스스로 성을 나가 청나라의 볼모가 되겠다고 하였다.

내게는 동생들이 있고 또 아들도 하나 있으니 역시 종사를 맡을 수 있습니다. 내가 비록 적에게 죽는다 해도 무슨 유감이 있겠습니까? 내가 성에서 나가겠다는 뜻을 저들에게 전하세요.”

 

40일차(1월 23일)

예조판서 김상헌이 죽게 해줄 것을 청하였다.

성 안의 장수와 병졸들이 척화신을 내보낼 것을 주장했다.

화친을 배척한 신하를 내보내겠다는 국서를 썼다.

 

41일차(1월 24일)

남문에서 적을 격퇴하였다.

 

42일차(1월 25일)

대포 소리가 종일 그치지 않았는데, 성첩이 탄환에 맞아 모두 허물어졌으므로 군사들의 마음이 흉흉하고 두려워하였다.

용골대가 최후 통첩을 하였다.

 

43일차(1월 26일)

훈련도감의 장졸 및 어영청의 군병이 성 위에서 서로 인솔하여 대궐문 밖에 모여 화친을 배척한 신하를 오랑캐 진영에 보낼 것을 청하였다.

최명길이 국왕 대신 세자 저하가 나와 사죄드린다는 말을 전하자 용골대가 반대하였다.

용골대가 봉림대군의 글을 전한다.

처음으로 강도(江都)가 함락되었다는 보고를 듣고 성 안의 사람들이 통곡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44일차(1월 27일)

인조가 황제의 약속을 확인하려는 국서를 보내다.

신은 성지를 받들고서부터 천지처럼 포용하고 덮어주는 큰 덕에 더욱 감격하여 귀순하려는 마음이 가슴속에 더욱 간절하였습니다.

그러나 신 자신을 살펴보건대 죄가 산더미처럼 쌓여있기에, 폐하의 은혜와 신의가 분명하게 드러남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지만, 조서를 내림에 황천(皇天)이 내려다보는 듯하여 두려운 마음을 품은 채 여러 날 머뭇거리느라 앉아서 회피하고 게을리하는 죄만 쌓게 되었습니다.

이제 듣건데 폐하께서 곧 돌아가실 것이라 하는데, 만약 일찍 스스로 나가서 용광(龍光)을 우러러 뵙지 않는다면, 조그마한 정성도 펼 수 없게 될 것이니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다만 생각건대 신이 바야흐로 3백 년 동안 지켜온 종사(宗社)와 수천 리의 생령(生靈)을 폐하에게 우러러 의탁하게 되었으니 정리(情理) 상 실로 애처로운 점이 있습니다.

만약 혹시라도 일이 어긋난다면 차라리 칼로 자결하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삼가 원하건대 성자(聖慈)께서는 진심에서 나오는 정성을 굽어살피시어 조지(詔旨)를 분명하게 내려 신이 안심하고 귀순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소서.”

 

45일차(1월 28일)

용골대가 청 황제의 칙서를 가지고 오다.

그대는 이미 죽은 목숨이었는데 짐이 다시 살아나게 했으며, 거의 망해가는 그대의 종사를 온전하게 하고, 이미 잃었던 그대의 처지를 돌려주었다.

그대는 마땅히 국가를 다시 일으켜준 은혜를 생각하라.

뒷날 자자손손토록 신의를 어기지 않는다면 그대 나라가 영원히 인정될 것이다.

짐은 그대 나라가 되풀이해서 교활하게 속였기 때문에 이렇게 교시하는 것이다.”

이조참판 정온과 예조판서 김상헌이 자결을 시도하다.

 

46일차(1월 29일)

윤집과 오달제가 하직인사를 하다.

청이 윤집과 오달제를 끌고 갔다.

 

47일차(1월 30일)

삼전도의 굴욕을 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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