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디언 연설문집] “나는 왜 너가 아니고 나인가”
시애틀 추장 외 | 류시화 엮음
총 900여 페이지에 달하는 이 책은 “수만 년 전부터 ‘거북이섬’이라는 이름으로 불린 북미 대륙에 터전을 잡고 살아온 수많은 원주민 부족의 삶과 문화에 대한 이야기이며, 총과 병균과 종교를 앞세우고 쳐들어온 백인들에게 터전을 빼앗기고 물러가면서 그들이 남긴 연설문들을 모은 것”이다.
자연과 하나된 삶을 살던 인디언들에게 얼굴 흰 사람들이 찾아왔고, 그들은 어느 순간 인디언들의 삶을 위협하기 시작했다. 결국 자유로운 대지를 여행하던 인디언들은 좁은 울타리에 갇히거나 어둠 속으로 사라져야만 했다. 이 책을 통해서 우리는 힘의 우열 관계에서 어쩔수 없이 밀려나고 소멸해가지만, 비굴하지 않고 당당하게 종말과 마주한 인디언들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그들이 남긴 연설문을 읽고 있으면 자연과 함께 호흡하면서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평화롭게 살아가려던 인디언들이 어느 순간 문명화를 강요당했고, 개종을 강요당했으며, 삶의 터전을 상실하기를 강요당하면서 느꼈던 감정을 조금은 다른 측면에서 바라볼 수 있었다. 흔히 자신의 것을 빼앗겼을 때 억울해하면서 복수심에 사로잡히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을 되찾을 힘이 없음을 느끼면서 인디언들은 자신들이 빼앗기는 자연과 삶의 터전은 그 누구의 소유도 아니기 때문에 그것을 빼앗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 백인들의 어리석음을 우회적으로 비판하고 있는 것 같다.
솔직히 방대한 분량과 내용에 압도되어 선뜻 도전하기 힘든 책이다. 연설문을 천천히 읽어가면서 특히 백인들이 전하는 기독교에 대해서 인디언들이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에 관심을 두면서 살펴보았다.
“어떻게 공기를 사고판단 말인가” -시애틀 추장(수콰미쉬 족과 두와미쉬 족)
... 위대하고 훌륭한 백인 추장은 아울러 우리의 땅을 사고 싶다고 제의했다. 그러면서 우리가 아무 불편 없이 살 수 있게 해주겠다고 덧붙였다... 우리는 우리의 땅을 사겠다는 당신들의 제안에 대해 심사숙고할 것이다. 하지만 나의 부족은 물을 것이다. 얼굴 흰 추장이 사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그것은 우리로서는 무척 이해하기 힘든 일이다. 우리가 어떻게 공기를 사고팔 수 있단 말인가? 대지의 따뜻함을 어떻게 사고판단 말인가? 부드러운 공기와 재잘거리는 시냇물을 우리가 어떻게 소유할 수 있으며, 또한 소유하지도 않은 것을 어떻게 사고팔 수 있단 말인가?
...
우리는 대지의 일부분이며 대지는 우리의 일부분이다. 들꽃은 우리의 누이이고, 순록과 말과 독수리는 우리의 형제다. 강의 물결과 초원에 핀 꽃들의 수액, 조랑말의 땀과 인간의 땀은 모두 하나다. 모두가 같은 부족, 우리의 부족이다.
...
세상의 모든 것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대지에게 일어나는 일은 대지의 자식들에게도 일어난다. 사람이 삶이 거미줄을 짜 나아가는 것이 아니다. 사람 역시 한 올의 거미줄에 불과하다. 따라서 그가 거미줄에 가하는 행동은 반드시 그 자신에게 되돌아오게 마련이다.
...
당신들의 신은 우리의 신이 아니다. 당신들의 신은 당신들만 사랑하고 우리는 미워한다. 그 신은 강한 두 팔로 얼굴 흰 사람들을 사랑스럽게 감싸 안으며, 마치 아버지가 어린 아들을 인도하듯 그들을 인도한다. 하지만 자신의 얼굴 붉은 자식들에 대해선 잊어버리기로 한 것 같다... 얼굴 흰 사람들의 신은 그의 얼굴 붉은 자식들을 사랑하지도 보호하지도 않는다... 만약 서로가 같은 신을 갖고 있다면, 그 신은 우리의 눈으로 보기엔 어느 한쪽만 편애하는 신이다. 그는 얼굴 흰 사람들에게만 왔다. 우리는 한 번도 그를 본 적이 없고, 그의 목소리를 들은 적도 없다. 그는 얼굴 흰 자식들에게는 법을 내려 주었지만, 하늘을 뒤덮은 별들처럼 이 대지를 가득 채우고 있던 얼굴 붉은 자식들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죽은 자라고 해서 아무런 힘을 갖지 않은 것이 아니므로, 당신들은 사라져 가는 우리 부족에게 공정하고 친절하게 대해야 한다. 그들은 단지 세상의 다른 이름으로 존재하고 있을 뿐이다. 아니, 지금 내가 ‘죽은 자’라고 말했던가? 그렇지 않다. 죽음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변화하는 세계만이 있을 뿐이다.
아메리카 인디언 연설문 중 가장 유명하며 가장 널리 인용되고, 더불어 가장 많이 논란의 대상이 된 시애틀 추장(1786~1866)의 연설은, 1854년 수콰미쉬 족과 두와미쉬 족(둘 다 ‘강 쪽에 사는 사람들’이란 뜻) 인디언들을 보호구역 안으로 강제로 밀어 넣기 위해 백인 관리 아이삭 스티븐스가 시애틀의 퓨젓사운드에 도착했을 때 행한 것이다. 이 추장의 절친이었던 헨리 스미스가 이 연설을 기록했다.
‘고상한 야만인’의 연설을 참을 수 없었던 백인 우월주의자들은 시애틀 추장 연설문의 신빙성에 대해 온갖 의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그가 실존 인물이긴 하지만 전혀 연설을 한 적이 없고, 연설문 원본이라는 것조차 ‘낭만적인 감상에 젖은 이류 시인이 지어낸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하지만 연설문 중에서 진위 여부의 논란이 되고 있는 부분은 고작 두세 단락에 불과하다. 또한 그것들 역시 다른 인디언 지도자들의 사상에서 빌려온 것일 뿐, 방송 작가의 독자적인 창작물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시애틀 추장은 죽어서 자신이 그토록 사랑하고 지키려 했던 수콰미쉬 족 땅에 묻혔다. 그의 묘지 건너편에는 그가 세상을 떠나기 1년 전 이 위대한 추장의 이름을 따서 붙인 거대한 시애틀 시가 자리잡고 있다. 하지만 얼마 후 시애틀 시에는 인디언들이 거주할 수 없다는 법안이 통과되었다.
시애틀 추장은 자신의 연설을 통해서 이미 힘의 우열이 드러난 상황에서 선택의 여지가 없음을 인정하면서도 백인들이 그토록 차지하고 싶은 땅은 자신들의 소유도, 그리고 백인들의 소유도 아니라고 말한다. 그리고 백인들이 그토록 자랑하는 문명이나 종교가 인디언들이 보기에는 덧없거나 무가치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백인들의 손에 이끌리어 전해지고 있는 그리스도의 복음이 얼마나 이중적이며, 이 상황에 대해서 진정 예수 그리스도가 살아있다고 한다면 (그렇게 전해진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인하여) 기뻐할 수 있을까?
“이 대지 위에서 우리는 행복했다” - 빨간 윗도리(사고예와타, 세네카 족)
... 당신은 말한다. 당신은 신의 마음에 들도록 기도하는 법을 가르치기 위해 우리에게 보내진 사람이라고. 그리고 이 시간 이후로 당신들의 종교를 우리 얼굴 붉은 사람들이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우리는 무척 불행한 삶을 살게 될 것이라고. 또한 당신은 말한다. 당신들의 종교는 옳고, 우리는 틀리다고.
그 말이 맞다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는가? 우리는 당신들의 종교가 위대한 책에 기록되어 있다고 들었다. 만약 그 책의 내용이 당신들뿐 아니라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것이라면, 신은 마땅히 우리에게도 그 책을 내려주었을 것이 아닌가? 아니, 우리뿐 아니라 우리의 조상들에게도 그 책에 대한 지식과 올바른 이해를 심어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다만 당신의 말을 통해 그것에 대해 들었을 뿐이다. 얼굴 흰 사람들에게 수없이 속아 온 우리가 어떻게 그 말을 믿을 수 있단 말인가?
당신은 말한다. 당신이 따르는 그 길만이 신을 믿는 유일한 길이라고. 이 길 외에 다른 길이 있을 수 없다고. 세상에 그런 것은 없다. 만약 그런 식으로 단 하나의 종교만 존재한다면, 왜 당신들 얼굴 흰 사람들은 종교에 대해 그토록 의견이 다른가? 당신들 모두 그 책을 읽을 수 있는데, 왜 서로의 해석에 동의하지 않는가? 우리는 도무지 그 점을 이해할 수 없다.
...
형제여, 당신들에게는 당신들의 종교가 더 옳은 것일 수도 있다. 그 종교는 당신들의 방식에 잘 어울린다. 당신들은 자신들이 위대한 정령의 외아들을 죽였다고 말한다.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당신들이 이 먼 나라까지 와서 온갖 고난과 불편을 겪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그 살인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우리는 그 자리에 있지도 않았다. 우리는 위대한 정령을 사랑하며, 당신들처럼 무자비하고 부당하게 행동한 적이 없다... 차라리 우리 쪽에서 선교사를 보내 그들에게 우리의 종교와 삶의 방식을 가르쳐 주고 싶을 정도다... 당신들이 우리의 종교를 받아들인다면, 당신들은 훨씬 더 행복하고 위대한 정령이 보기에도 훨씬 합당한 인간이 될 것이다...
...
당신은 우리의 땅을 빼앗거나 돈을 취하기 위해 온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속에 빛을 주기 위해 왔다고 말한다. 하지만 당신들의 예배 시간에 있어 봤기 때문에 하는 말인데, 당신들이 그 예배에 참석한 사람들로부터 돈을 걷는 것을 보았다. 그 돈이 정확히 어디에 쓰이는진 모르지만, 그것이 당신들이 먹고 살기 위한 것임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빨간 윗도리가 말을 마치자, 그 자리에 모인 인디언들은 악수를 하려고 백인 선교사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조셉 크램이라는 그 젊은 선교사는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며 악수를 거부했다. 그는 하느님의 종교와 악령들 사이에 우정이 있을 수 없다고 잘라 말했다. 그 말을 통역해 주자. 인디언들은 미소를 지으며 다만 평화롭게 그 자리를 떠났다(50쪽).
기독교가 유일한 종교라고 주장하는 것에 대해서 문제를 제기한다. 이것은 역사적으로 서양에서 서양의 문화 속에서 자란 기독교라는 종교가 바다를 건너 북미 대륙에 살고 있는 인디언들에게는 어떠한 종교로 인식이 되고 있었는지를 살펴볼 수 있게 해 준다. 만약 백인들이 전하는 종교가 유일한 종교라고 한다면, 백인들에게만 미리 전해준 그 신은 편향된 시각을 가진 분이고 어떻게 그런 신을 믿을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인디언의 영혼” - 오히예사(찰스 이스트먼, 다코다 족)
... 우리의 붉은 사람들의 종교는 어떤 특정한 교리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또한 받아들이길 거부하는 사람에게 그것을 강요하지도 않았다. 그러므로 우리의 종교에는 설교도 없고, 개종이나 박해도 없으며, 다른 사람의 종교를 무시하고 비웃는 일도 없었다. 무신론자라는 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우리의 종교는 교리가 아니라 마음 상태였다.
...
초기 기독교 속에는 인디언들의 사상과 매우 비슷한 것들이 많다. 부자들에 대해 예수가 한 말들은 특히 우리 인디언들이 특히 공감하는 내용들이다. 하지만 우리에게 많은 설교를 늘어놓으면서 한편으로는 전혀 다르게 행동하는 선교사들과 그 신도들을 지켜보면서 우리는 이미 오래전부터 그들의 종교에 대해 냉담한 마음을 갖기에 이르렀다. 그들은 자신을 과시하고, 권력을 추구하며, 무조건 남을 개종시키려 들고, 자기 종교를 제외한 다른 종교를 드러내놓고 무시한다. 우리가 보기엔 직업적인 목사들, 돈을 받고 하는 설교, 물질을 모으기에 급급한 교회들은 영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따라서 우리는 그들에게서 아무런 감화도 받을 수 없었다...
...
많은 전투에 참가해 얼굴이 흉터로 얼룩진 한 늙은 인디언 전사가 한 말을 나는 기억한다. 그때 나는 수 족, 샤이엔 족, 크리 족, 오지브웨 족 등 여러 부족에서 온 젊은이들과 함께 작은 통나무 교회에서 예수의 삶과 인격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다. 그때 그 늙은 전사가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
“우리는 지금 그대가 말하는 그 계율을 이미 수천 년 동안 지키며 살아왔다. 우리는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고 살아왔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창조주로부터 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먹을 것도 그냥 주어졌고, 햇빛이나 비처럼 땅도 무상으로 주어졌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을 누가 바꿔놓았는가? 바로 얼굴 흰 사람들이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신을 믿는다고 말하고 있다! 그들은 아버지이신 신의 그런 특성들을 조금도 물려받지 못한 듯하다. 뿐만 아니라 자기들의 형제인 그리스도조차도 본받지 않는다.”
또 다른 인디언 노인은 의견을 묻자 한참 동안 침묵을 지켰다. 마침내 그가 말했다.
“나는 그 예수라는 사람이 인디언이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그는 물질을 손에 넣는 것, 나아가 많은 소유물을 갖는 것에 반대했다. 그리고 평화에 이끌렸다. 그는 인디언들과 마찬가지로 계산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었고, 사랑으로 일한 것에 대해 아무 대가도 요구하지 않았다. 얼굴 흰 사람들의 문명은 그런 원리와는 거리가 멀다. 우리 인디언들은 예수가 말한 그 단순한 원리들을 늘 지키며 살아왔다. 그가 인디언이 아니라는 것이 이상할 정도이다.”
인디언들은 백인들이 전하는 종교에서 가장 핵심적인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는 크게 반감을 느끼지 않았던 것 같다. 아니, 오히려 깊은 동질감을 느끼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그러한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백인들은 전혀 복음적이지 않음을 지적하고 있다.
“나는 왜 너가 아니고 나인가” - 붉은 구름(마히피우리아 루타, 오글라라 라코타 족)
...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우리는 약속을 지키는데 당신들은 지키지 않는다. 나는 오늘 이 말을 하고 내일 저 말을 하는 점박이 꼬리(스포티드 테일)가 아니다. 나를 보라. 나는 가난하고, 몸에 걸친 옷가지도 많지 않다. 하지만 한 부족의 추장이다.
부라는 것은 좋은 것이 못 된다. 우리는 그것을 저 세상까지 갖고 갈 수도 없다. 우리는 부가 아니라 평화와 사랑을 원한다. 당신들의 목사 한 사람도 우리에게 말하기를, 우리가 이 세상에서 갖고 있는 재산은 다음 세상으로 갈 때 갖고 갈 수 없노라고 했다. 그런데 이상하지 않은가. 그 목사를 포함해 얼굴 흰 사람들 모두가 이 세상의 부를 우리에게서 강탈하는 일에만 몰두하고 있으니 무슨 까닭인가?
당신들은 하루 세 끼 밥을 먹고 행복하고 건강하게 자라는 아이들을 보면서 살기 때문에 인디언들이 얼마나 굶주리고 있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우리는 거의 굶어죽기 직전이며, 절망감으로 미쳐버릴 것만 같다. 죽어가는 아이들을 손에 안고 있으면 영혼이 떠나가면서 전율하는 어린 것이 느껴진다. 그러면 이내 우리 두 팔엔 죽은 육신만이 놓여 있다. 사방 어디를 둘러봐도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 신마저 우리를 잊은 듯하다.
...
붉은 구름의 연설은 구슬프다. 자신이 한 부족을 다스리는 추장이지만 한없이 보잘 것 없는 모습이라는 사실을 인정한다. 그리고 세상에서 얻는 부유함이 영원하지도 않다는 것을 이야기하면서 백인들이 전하는 기독교에서도 물질에서 자유함을 가르치는데, 정작 백인들이 물질에 집착하고 있는 모습을 지적하고 있다. 그리고 백인들의 물질적인 풍요함을 위해서 인디언들이 희생을 당하고 있는 것은 신이 자신들을 잊은 것이라고 언급한다. 그러한 신은 백인들의 신인가, 인디언들의 신인가?
캐나다 장로교 협회의 <우리의 고백> 선언문
책에서는 캐나다 장로교 협회에서 채택한 선언문을 소개하고 있다. 이 선언문은 어느 한 교파만의 선언서가 아니라 기독교 전체가 함께 공유하고 함께 고백해야 하는 선언문이라고 생각된다.
최근 캐나다 장로교 협회는 위니펙 정기총회에서 <우리의 고백>이라는, 인디언들에게 용서를 구하는 선언문을 채택했다. 다음은 그 선언문의 전문이다.
“성경을 통해 성경 속에서 말씀하시는 성령의 부름을 받아 캐나다 장로교회는 고백한다. 이 고백은 하느님의 말씀에 대한 응답이다. 우리는 원주민들의 증언을 통해 우리의 선교 활동과 성직을 새로운 방식으로 이해하게 되었다.
1. 우리 120차 캐나다 장로교 전체 회의는 하느님의 영이 우리를 안내하기를 간절히 원하며, 우리 자신이 지은 죄와 잘못들에 대해 인정하면서 우리가 사랑하는 교회에 대해 말한다. 우리가 이렇게 하는 것은 우리의 과거를 새롭게 이해했기 때문이지, 우리 자신이 우리보다 앞선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보다 더 우월하거나 우리라면 같은 상황에서 다르게 행동했으리라고 여기기 때문이 아니다.
2. 우리는 캐나다 정부의 공인된 정책이 원주민들을 백인들의 문화에 강제로 동화시키기 위한 것이었으며, 캐나다 장로교회가 그 정책에 협조했음을 인정한다. 우리가 원주민들에게 끼친 피해의 근원은 서구 유럽인들이 가진 식민주의 정책의 자세와 가치관에 있었으며, 우리의 모습대로 아직 만들어지지 않은 것은 발견해서 무조건 착취해야 한다는 가정에 있었음을 우리는 인정한다. 그 정책의 일부로서 우리는 다른 교회들과 함께 정부가 원주민들이 창조주 하느님 앞에서 경험했던 몇 가지 중요한 영적인 의식들을 추방하는 데 힘을 보탰다. 그 정책에 교회가 공범이 된 것에 대해 우리는 용서를 구한다.
3. 우리는 캐나다 장로교회 안에 선한 믿음을 갖고 자신들의 원주민 형제들과 누이들에게 사랑과 자비를 갖고 있던 많은 회원들이 있었음을 인정한다. 그들의 헌신을 인정하며 그들이 한 일에 찬사를 보낸다. 예언자적인 통찰력을 갖고, 이 땅에서 행해지고 있는 파괴력을 자각하고 항의했던 몇몇 사람들이 있었음을 인정한다. 하지만 그들의 노력은 좌절되었다. 우리는 그들의 통찰력을 인정한다. 그들을 적절히 지원하지도 않았고, 정의를 외치는 그들의 목소리를 듣지 않은 것에 대해 우리는 용서를 구한다.
4. 우리는 캐나다 장로교회가 삶에 무엇이 필요한지를 원주민들보다 더 잘 안다고 가정했음을 고백한다. 교회는 우리의 원주민 형제자매들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만약 그들이 우리처럼 될 수 있다면, 만약 그들이 우리처럼 생각하고 말하고 예배드리고 노래하고 일할 수 있다면, 우리가 하느님을 아는 것처럼 그들도 하느님을 알 것이고, 그들의 삶도 풍요로워질 것이다.’ 우리의 문화에 대한 이런 오만함 때문에 우리는 복음에서 대한 우리 자신의 이해가 문화적으로 조건지워진 것임을 알지 못했으며, 나아가 토착 문화에 대한 몰이해 때문에 우리는 복음서가 요구하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원주민들에게 요구했다.그럼으로써 자비롭고 고통스러운 사랑으로 자신을 통해 모든 사람이 하느님에게로 올 수 있도록 모든 인간을 사랑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잘못 소개했다. 교회가 그렇게 추정한 것에 대해 우리는 용서를 구한다.
5. 캐나다 정부를 격려하고 도와주고자 캐나다 장로교회는 원주민 아이들을 그들의 집과 고향에서 강제로 데려와 기숙사 학교에 집어넣은 것을 인정한다. 그 학교들에서 아이들은 전통적인 방식을 박탈당했으며, 그것들은 동화 과정에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유럽이 문화로 대체되었다. 그 과정을 수행하기 위해서 캐나다 장로교회는 원주민들에게 낯선 규칙과 훈련을 적용시켰으며, 보살핌과 규율에 대한 기독교적인 원칙을 뛰어넘어 신체적이고 심리적인 처벌을 가하고 공개적으로 억압했다. 복종과 묵인의 분위기 속에서 성적으로 학대할 기회가 있었으며, 몇몇 아이들은 실제로 성적 학대를 당했다. 이 모든 것의 영향으로 원주민들은 문화적인 정체성을 상실하고, 자신에 대한 안전한 확신을 잃었다. 교회의 그런 무감각에 대해 우리는 용서를 구한다.
6. 우리는 캐나다 장로교회의 선교 활동과 목사들에 의해 삶에 깊은 상처를 받은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참회한다. 교회를 대신해 우리는 하느님의 용서를 구한다. 우리가 그들의 상처를 치료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도록 은총의 하느님께서 자비로운 길로 우리를 인도해 주시기를 기도한다.
7. 우리는 또한 원주민들에게 용서를 구한다. 들어온 모든 것들이 사실임을 우리는 인정한다. 말로써 그들에게 너무 깊은 상처를 준 사람들도 우리가 인정하는 바를 받아들이기를 희망한다. 하느님의 인도하심을 받아 우리의 교회는 다 같은 하느님의 자녀로서 치료와 온전함에 이르는 길을 발견하기 위해 원주민들과 함께 걸어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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