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60] 히데요시 죽음. 조명연합군 13만명의 4로병진책
임진왜란의 주범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1598년 8월 18일에 사망한다. 그가 죽을 때 남긴 절명시는 아래와 같다.
몸이여, 이슬로 와서 이슬로 가나니.
나니와(=오사카)의 영화여, 꿈 속의 꿈이로다.
한 명의 싸이코(똘아이)의 야욕 때문에 일어난 전쟁으로 수많은 조선의 백성이 죽음을 당한 것을 생각하면 이러한 전쟁광인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인들에게 존경을 받는다는 사실 자체가 짜증이 난다. (당시 조선의 인구 20~50%가 죽었다고 한다)
어쨌든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어렵게 낳은 토요토미 히데요리는 아직 너무 어렸다.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자신의 믿을만한 가신들을 조선 정벌에 참여하게 하였고, 조선을 점령했을 때 영지를 하사하고 나름 가신들의 세력을 키우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오히려 자신의 가신들의 병력 손실이 생기고 세력이 줄어드는 상황이 발생하였다. 그리고 전쟁에 참전하지 않은 동쪽의 토쿠가와 이에야스의 세력이 점점 커지는 불안감이 그를 엄습한다.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을 때 이시다 미쓰나리(1560~1600)와 도쿠가와 이에야스(1543~1616)가 그의 임종을 지켰다고 한다. 이후 이들은 세키가하라 전투(1600.9.15)에서 서군의 총사령관 이시다 미쓰나리, 동군의 총사령관은 도쿠가와 이에야스로 나뉘어 대결하게 되었고 결국 최종 승자인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에도막부’를 세우게 된다.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은 후에 이시다 미쓰나리는 당시 조선에 출정 중이던 고니시, 시마즈, 가토에게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죽음을 감추고, 마치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령인 것처럼 위조하여 철병하되 싸움에서 우위를 점하고 철병하라고 한다. (가오있게 도망치라는 말)
이때 당시 명나라 만력제는 조선에 엄청난 병력을 보내고 있었다. 10만의 병력이 조선에 들어와 있었고, 조선군까지 합쳐서 13만의 조명연합군이 일본의 왜성을 공격하려고 준비하고 있었다.
이때 공격의 대상은 가토가 지키고 있는 울산왜성, 시마즈가 지키고 있는 사천왜성, 고니시가 지키고 있는 순천왜성이었다. 이때 명나라의 경리 양호와 형부상서 형개는 13만을 4개로 나눠서 공격하기로 결정한다.
가토(1만)의 울산왜성은 명나라의 마귀(2.4만)와 조선의 선거이, 김응서(1.5만)가 공격하게 하고, 시마즈(1만)가 지키고 있는 사천왜성은 명나라의 동일원(3.7만)과 조선의 정기룡(3천)이 공격하고, 고니시(1만 5천)가 지키고 있는 순천왜성은 명나라의 유정(2.5만)과 권율(1만), 그리고 수군에서 명나라의 진린(1만), 조선의 이순신(5천)이 합세하여 공격하기로 하였다. 그런데 당시 일본군이 만든 왜성은 수성하는 데에는 특화된 성이라는 것을 간과한 것이다.
가토 기요마사는 한번 울산왜성에서 크게 혼이 난 상태로 서생포왜성으로 피신해 있었는데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울산왜성을 지키라고 명령을 내려서 울며 겨자 먹기로 다시 울산왜성으로 들어갔다. (물론 이때 넉넉한 군량미와 물을 확보해서 들어갔을 것이다) 울산왜성을 공격하던 조명연합군은 결국 실패하고, 선거이가 전사하고 마귀는 다시 경주로 물러나게 된다.
시마즈 요시히로는 일본 내에서 가장 용맹하다는 사쓰마번의 장수들을 데리고 왔지만,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보기에 별다른 활약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2차 진주성 전투에서 이름값 하라고 명령했고, 시마즈가 진주성 점령의 선봉이 되기도 했다. 그리고 엄밀히 말하면 칠천량에서 시마즈의 공이 제일 컸으며, 이후 노량해전은 이순신과 시마즈의 대결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이순신이 전사했지만 시마즈의 부대는 거의 궤멸되었다)
시마즈에 대항한 명나라의 동일원이 너무 무능했었다. 도중에 명나라의 군량미가 불타고, 명나라 부대의 화약고가 터지면서 명나라 군사가 당황할 때 시마즈가 돌격해서 1만을 쓸어버렸고 조명연합군은 패하고 물러나게 된다.
고니시 유키나가가 지키는 순천왜성을 공격하기로 한 유정은 나름 명나라에서 용맹한 장수였지만 남의 나라에서 전투하기는 싫었던 것 같다. 그래서 고니시에서 회담을 하자고 제안하였고 고니시도 그것에 응하기로 했다. 그런데 명나라는 나름 매복해서 고니시를 잡으려고 준비하고 있었는데 뜻밖에 명나라에서 총기 오발사고가 나서 고니시가 순천왜성으로 도망쳐 버렸다.
순천왜성은 이순신과 진린의 수군도 함께 공격하였다. 이순신과 진린의 수군은 순천 앞바다에 있는 ‘장도’의 군량미 창고를 불태우고 왜선 30척을 격침시키며 일본 수군 1천명을 저세상으로 보냈다. 이때 명나라 진린의 39척과 조선의 판옥선 3척이 썰물로 옴짝달싹 못하게 되는 상황이 발생하였다. 이때 일본군이 왜성에서 쏟아져 나와 공격하기 시작했고, 이순신은 진린을 구하기 위해서 멀리서 함포사격으로 엄호하였다. 이때 명나라 수군 800여 명이 죽게 되었다. (그런데 조선의 판옥선 3척은 그 와중에도 일본군의 공격을 막아내었다) 다시 밀물 때가 되어 이순신이 들어가서 판옥선 3척과 명나라 제독 진린을 구해내었다.
진린과 이순신이 이렇게 근거리까지 접근한 것은 육군이 함께 공격하기로 약속을 한 상황이었고 육군이 왜성을 거의 점령한 것으로 착각했기 때문이다. (명나라 육군은 함성만 질렀다) 전투 이후에 진린은 비록 계급은 유정이 높았지만 유정의 진까지 가서 따졌다고 한다.
“유정과 수로군이 비밀리에 통하여 밤중에 조수가 들어올 때를 이용하여 수륙에서 협공하자고 약속하니 진린이 허락하였다. 밤 2경쯤 되어 여러 배를 몰아, 조수를 타고 육박하여 수채를 침공하였으나, 육지의 군사는 단지 나팔소리만 내어 상응할 뿐이었다. 수병들은 육지의 군진이 벌써 적의 성 안으로 들어간 것으로 생각하고, 먼저 올라가기를 다투어 죽을 각오하고 혼전하였는데, 밤 조수가 갑자기 밀려나 배들은 육지에 있었다.”
조경남 『난중잡록』, 3권, 정유년 10월 3일
진린이 대노하여 육지로 올라가 유정의 진에 이르러 수(帥)자 기를 손으로 찢고 그에게, “배짱이 좋지 못하다”고 책하고, 즉시 유정의 앞에서 사실을 갖추어 군문에 자문을 보내니, 유정의 얼굴빛이 흙처럼 되어 한 마디 말도 못하고, 다만 손을 들어 가슴을 두드리며 크게 부르짖기를, “장관(將官) 중에 사람이 없는데, 어찌 나 홀로 당할 수 있소” 하였다.
조경남 『난중잡록』, 3권, 정유년 10월 4일
만약 조명연합군 13만명 분산되어 공격하지 않고 하나의 성만 공격했더라면 성공했을지도 모른다. 하나만 공격한다고 치면 사천왜성이 가장 좋은 목표가 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순천왜성의 고니시는 고립되는 것이고 이후 부산까지 진격할 수 있는 교두보가 되었을 것이다)
어쨌든 조명연합군을 막아낸 고니시는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 최고의 목표가 되었다. 그는 어떻게해서든지 살아서 돌아가고 싶어서 나름 진린에게 뇌물을 쓰고 퇴각할 때 공격을 받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그런데 고니시를 쉽게 보내주지 않으려는 사람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이순신이다. 이순신이 고니시를 막으려다 벌어진 전투가 노량해전(1598.11.19)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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