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62] 노량해전(2) - 이 원수를 갚을수만 있다면...(짜릿함, 먹먹함, 반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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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 & 유투브]/[황현필 한국사]

[임진왜란62] 노량해전(2) - 이 원수를 갚을수만 있다면...(짜릿함, 먹먹함, 반전)

by [수호천사] 2021. 5.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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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62] 노량해전(2) - 이 원수를 갚을수만 있다면...(짜릿함, 먹먹함, 반전)

 

 

고니시 유키나가는 임진왜란이 1선발로 참전했고, 임진왜란 초기의 주요한 전투를 다 승리로 이끈 상징적인 장수였다. 조선의 조정 입장에서 복수를 위해 일본 열도를 공격하지는 못하더라도 돌아가는 왜놈들을 한 놈이라도 더 죽여야 한다는 생각을 하였고 특히 고니시에 대한 감정은 최악이었다.

 

공교롭게 고니시는 일본으로 가기 가장 어려운 지역에 있었다. 순천왜성이 있는 고니시는 병력 손실을 당하지 않고 일본으로 가고 싶은 생각에서 명나라의 유정과 진린 등에게 뇌물을 바친 것이다. 명나라 장수들에게는 조금 통했지만 이순신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사천에 있던 시마즈 요시히로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리고 사천의 남쪽에 남해에는 고니시의 사위였던 소 요시토시가 있었다. 시마즈는 고니시를 도와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거제도에 있는 다치바나 무네시게에게 와달라고 요청을 하였고, 부산에 있던 다카하시 무네마스도 고니시를 돕는데 합류하게 된다. 이들은 창신도라는 섬으로 모였는데 500여척의 규모였다. (순천왜성에 고니시가 15,000명의 병력에 300척을 갖고 있었다)

 

이순신은 80척의 판옥선을 갖고 있었고 작은 군함까지 합치면 거의 200척에 육박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명나라 수군이 2~300척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조명연합군 500척과 일본의 500척이 노량 앞바다에서 서로 맞붙게 되는 것이다.

 

처음에 일본군은 시마즈의 함대가 노량을 지나 이순신을 공격할 때, 고니시의 함대가 함께 에워싸서 공격을 하면 충분히 이순신의 함대를 무찌를 수 있다는 계산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순신은 에워싸이기 전에 먼저 시마즈의 함대를 공격하기로 결정하고 진린에게 함께 출동하자고 제안했다. 진린이 뇌물의 효과 때문에 주저하고 있을 때, 이순신은 단독으로라도 출정하겠다고 하였고, 어쩔 수 없이 진린도 함께 출정하게 된다.

 

 

왜군 500여척의 함대가 15981119일 새벽 2시에 노량을 통과하였다. 그런데 조선의 이순신은 노량을 통과한 지역의 남쪽에서 기다리고 있었고, 명나라의 진린은 북쪽을 지키고 있었다. (다른 기록에는 노량에서 판옥선으로 시마즈를 공격했고, 시마즈는 속도를 내서 판옥선을 향해 돌진했다고 한다) 일본은 상대적으로 약한 명나라 해군과 싸우려고 했다. 이때 명나라 함대의 부총관 등자룡(1531~1598, 등소평의 조상)이 이순신에게서 선물로 받은 판옥선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때 용감하게 돌진해서 적에게 함포사격을 하였다. 시마즈의 함대도 만만치 않았다. 일본 수군은 속도에는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에 빠르게 접근해서 등자룡의 판옥선을 에워쌌고 판옥선에 올라타서 백병전이 전개되어 등자룡이 전사하게 된다. (이순신이 전에 진린과 등자룡에게 판옥선을 선물해 주었기 때문에 이 전투에 진린과 등자룡은 각자 판옥선을 타고 전투에 임했다)

 

곧바로 일본의 세키부네들이 진린의 판옥선을 에워쌌다. 이 모습을 본 이순신이 판옥선을 이끌고 가서 진린을 구해주었다. 어떻게 보면 진린은 우정출연... 아니 우정참전을 해준 것이다. 당시 명나라의 입장에서는 일본이 물러가는 것이 목적이었기 때문에 괜히 도망가는 일본을 공격할 이유가 없었는데, 진린으로서는 이순신과의 관계 때문에 참전해준 것이었기에 이순신이 위기에 처한 진린을 구해준 것이다.

 

今日固决死願天必纖此賊
오늘 진실로 죽음을 각오하오니, 하늘에 바라옵건대 반드시 이 적을 섬멸하게 하여 주소서.”

 

이순신이 노량해전에 참가하기 전에 하늘에 제사를 드리면서 했던 말이라고 한다. 이순신은 전투에 승리하는 것 이상으로 한 놈이라도 더 죽이고, 왜선 한 척이라도 더 죽이는 것을 목적으로 이 전투에 임한 것이다.

 

이때 바람은 북서풍이 불었고(이것도 이순신이 계산한 것이다) 바람이 우리편이 되어서 일본의 배들이 화공의 공격으로 불에 타기 시작했다. 살아남은 일본의 수군은 남해를 돌아나가 도망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었다. 새벽 2시에 시작된 전투가 새벽 5~6시까지 진행되었고 아직 주변이 어두워서 도망치던 일본군은 남해의 관음포를 바다로 착각해서 그리로 들어가서 갇혀버리고 만다. (여기에서 살고자 육지로 올라갔던 일본군들은 나중에 조명연합군의 육군에게 처참하게 죽임을 당한다) 지금은 육지에 올라가 봤자 가망이 없다고 생각한 일본의 배들이 사생결단으로 포위망을 뚫고 탈출하려고 안간힘을 썼다.

 

 

이순신의 수군은 독안에 든 쥐꼴이 되어버린 일본군을 가둬놓고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때 일본군이 조선 수군의 대장선에 조총사격을 하였고 이때 이순신 장군이 조총에 맞고 쓰러진다. 주변에서 방패로 이순신 장군을 가렸다. 항상 이순신의 옆에 있었던 송희립 장군(1553~1623)은 이미 적의 조총에 맞고 쓰러져 기절해 있었다. 그래서 이순신의 아들 이회(1567~1625)와 조카 이완(1579~1627)이 이순신을 부축하였다. 이때 이순신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戰方急愼勿言我死
“싸움이 급하니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

 

이날 노량해전에서 왜선 500여척 중에 살아서 돌아간 배가 50여 척에 불과했다고 한다노량해전에서는 이순신 말고도 많은 지휘관들이 전사하였다. 나주목사 남유, 낙안군수 방덕룡, 가리포첨사 이영남, 통제영 우후 이몽구, 흥양현감 고득장, 초계군수 이언량 등이 전사하였고, 송희립(1553~1623)과 나대용(1556~1612) 등이 부상을 당하였다.

 

전투가 끝나고 진린 제독은 가장 먼저 이순신 장군을 찾았다. 이번 전투에서 다시 한번 이순신 장군이 자신을 살렸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순신의 전사 소식을 듣고 땅바닥에서 뒹굴면서 대성통곡을 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조선의 수군은 물론 명나라 수군들도 울부짖었다고 한다.

 

『징비록』
이순신이 명나라 장수 진린과 함께 바다 어귀를 지키다가 쳐들어가자 유키나가는 사천에 머물고 있던 시마즈 요시히로에게 구원을 청하였다. 이때 이순신이 요시히로를 공격, 적선 200여 척을 불태우고 수많은 왜적을 죽였으며, 도망치는 왜적을 노량까지 뒤쫓았다.
화살이 빗발치는 속에서도 이순신은 직접 나서 싸우다가 날아오는 총알에 맞고 말았다. 총알은 가슴을 관통하고 등 뒤로 빠져나갔다. 주위 사람들이 그를 부축해 장막 안으로 옮겨 놓자 그는, “지금 싸움이 급한 상태다. 내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라지 말라하고는 숨을 거두었다.
(중략)
왜적들이 달아난 후 진린은 사람을 보내 이순신에게 사례했다. 그때 이순신이 죽었다는 소식을 접한 그는 의자에서 떨어져 땅바닥에 주저 앉으며 통곡했다. “어른께서 오셔서 나를 구해 준 것으로 알았는데 이 무슨 일이란 말입니까?” 이 모습을 본 모든 군사가 엎드려 통곡하니 바다가 울릴 정도였다. 왜장 유키나가는 우리 수군이 적을 쫓아 진영을 지나간 틈을 이용해 빠져나갔다. 이순신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우리 군사와 명나라 군사들은 각 진영에서 통곡을 그치지 않았는데, 마치 자기 부모가 세상을 떠난 듯 슬퍼했다. 그의 영구 행렬이 지나는 곳에서는 모든 백성이 길가에 나와 제사를 지내면서 울부짖었다. “공께서 우리를 살려 주셨는데, 이제 우리를 버리고 어디로 가시나이까?” 수많은 백성이 영구를 붙들고 울이 길이 막히고 행렬은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할 지경이었다. 나라에서는 의정부 우의정을 추증했다. 그러자 형개(명나라 병부상서)가 나서 말했다.
당연히 그를 기리는 사당을 지어 충혼을 달래 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제안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훗날 명나라가 청나라에게 멸망하게 되었을 때 진린의 손자인 진영소(陳泳素)라는 사람은 오랑캐의 지배를 받을 수 없다고 하면서 할아버지인 진린이 이순신 장군과 함께 싸웠던 조선 땅에 살겠다며 조선의 고금도까지 왔다. 그리고 이들이 해남에 터를 잡고 살아가는데 이들의 후손이 오늘날 광동 진씨’(廣東 陳氏)이다.

 

시마즈는 나름 고니시를 구하고 고니시와 협공을 하기 위해 노량으로 온 것인데 고니시는 그대로 자기만 살려고 도망쳐버린 것이다. 자기 혼자 살겠다고 양아치짓을 한 것이다. 이것 때문에 일본에 가서 고니시는 탄핵받을 뻔하였고, 나중에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서군의 장수로 참전했었는데 부장마저 고니시에게 등을 돌리기도 했다.

 

그런데 과연 이순신 장군이 노량에서 진짜로 전사하였을까? (To be contin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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