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대첩(5일 버팀) vs 2만(사상자 수 천)
행주대첩(12시간 버팀) vs 3만(사상자 천)
제2차 진주성 전투(9일 버팀) vs 10만(사상자 3만 8천)
제2차 진주성 전투(1593.6.22~6.29)
비변사가 아뢰기를, “삼가 권율의 장계를 보니 왜적이 온갖 방법으로 진주를 공격하고 있는데, 명군은 아직까지 달려가서 구원하지 않고 있다고 합니다. 왜적과 대진하고 있는 의원으로는 오직, 선거이, 이천, 홍계남 뿐으로 그 형세가 매우 외롭고 약하다고 합니다. 권율의 생각은 다만 요해처를 지켜 호남을 보전하고자 할 뿐, 군사를 보내어 진주를 구원할 의사가 없는 듯합니다. 진주를 구원하는 것이 바로 호남을 보전하는 길이니, 이런 뜻으로 급히 권율에게 하유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선조실록 40권, 선조 26년』
당초에 황진이 진주로 나아가려 할 때 의병장 곽재우가 황진을 만류하며 말하기를, “진주는 의로운 성이니 지켜낼 수가 없다. 그리고 공은 충청도 절도사를 맡고 있는 만큼, 진주를 지키다 죽는 것은 직분에 걸맞지 않는다”고 하였으나, 공은 말하기를 “이미 창의사에게 승낙하였으나, 비록 죽는 한이 있어도 식언할 수는 없다”고 하였다. 이에 곽재우가 공의 뜻을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을 알고는 마침내 술잔을 나누며 서로 작별하였는데, 귀에 공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서는 애통해하며 슬퍼해 마지 않았다. 아! 공과 같은 사람이야말로 정말 열장부라고 해야 할 것이다. 『국조인물고』
제2차 진주성 전투는 임진왜란에 출전한 일본 장수들이 총출동하였다. 이때 진주성을 수비하는 조선군의 장수는 김천일, 최경회, 황진, 김해부사 이종인(1556~1593), 고종후(고경명의 아들, 1554~1593), 진주목사 서예원(1548~1593) 등이었다. 진주목사 서예원은 도망치지는 않았으나 전투 내내 찌질한 모습을 보여준다. 진주성 전투가 일어나기 전에 근처 마을에서 일본군에게 약탈을 당하는 것이 두려워서 백성들이 살기 위해서 6만 여명이 진주성으로 들어갔다. 진주성을 지키는 총사령관은 황진이었다.
6월 19일에 일본군 첫 등장하였는데, 활을 쏘아서 일본군 30명 정도를 죽였다고 한다. 그런데 본격적인 진주성 전투는 6월 21일부터 시작되었다.
첫째날(6월 21일)에 일본군이 진주성 주변의 해자를 메우기 시작했다. 원래 해자를 메울 때 병력이 충분했으면 성문을 열고 나가서 방해할 수 있었을텐데 병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공격하지 못했다.
둘째날(6월 22일)에 낮에 1차 공격이 시작되었고, 초저녁에 공격이 재개되었고, 밤 12시에 또 다시 공격이 시작되었다.
셋째날(6월 23일) 낮에 3번 공격, 저녁에 4번 공격이 계속되었다. 공격하는 일본군은 번갈아 공격이 가능했지만, 수비하는 조선군은 쉴틈이 없었을 것이다.
넷째날(6월 24일)에 일본군 부대가 충원되었고 일본군은 다시 해자를 메우기 시작했다.
다섯째날(6월 25일) 낮에 3번 공격, 밤에 4번 공격이 있었는데, 특히 동문에서는 공성장비인 정루에서 조총 사격이 개시되었다. 이때 황진은 정루보다 높은 토산을 쌓으라고 명령하였고, 장병들과 함께 토산을 쌓았다. 그리고 현자총통으로 망루를 부숴버렸다.
여섯재날(6월 26일) 일본군은 생가죽 나무 방패를 사용해서 성밑을 파내려는 시도를 하였는데, 황진이 돌을 떨어뜨려서 방패를 쪼개도록 시켰고 그 사이로 불화살을 날려 막아내었다. 이때 다시 동문이 망루로 공격을 받았고, 직후에 장마비가 내렸는데 지대가 약한 동쪽지역의 성벽이 약해지는 원인이 되었다.
일곱째날(6월 27일) 일본군은 귀갑차를 가지고 공격을 해서 동문 근처의 성벽을 뚫어냈다. 이때 황진 장군이 달려나가 일본군 수십명을 베어내는 과정에서 조선군이 다시 성을 쌓았다는 기록과 김해부사 이종인(1556~1593)이 순식간에 다섯 명을 베어내면서 시간을 벌어서 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다.
여덟째날(6월 28일) 찌질함을 보이던 서예원에게 짜증이나서 김천일이 죽이려고 했지만, 한 사람이 아쉬운 상황이라 죽이지는 않고, 김천일은 서예원 대신에 장윤(1552~1593)에게 임시로 진주목사 자리를 맡긴다. 그리고 서예원에게는 북쪽의 성벽을 지키라고 했는데, 제대로 지키지 못해서 일본군이 새벽에 성벽을 약하게 만들었다. 이날 동문에서 적의 시체를 살피려는 황진이 저격병의 조총을 맞고 전사하게 된다.
황진의 죽음에 대한 소식을 들은 이순신은 “진주성이 무너졌으니 나랏일이 어긋나게 되었다”가 아니라 “황진이 죽었으니 나랏일이 어긋나게 되었구나”라고 탄식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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