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42] 진주성혈전-임난의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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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 & 유투브]/[황현필 한국사]

[임진왜란42] 진주성혈전-임난의 끝

by [수호천사] 2021. 4.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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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진주성 전투는 일본군 97천명이 성을 공격했지만 8일째까지 막아낸 전투이다. 8일째 되는 날에 황진 장군이 시체더미에 숨어 있는 일본군 저격병에 의해 총알이 왼쪽 이마에 꽂히고 전사하게 된다.

 

다음날 적이 또 동쪽과 북쪽의 성을 침범하여 크게 전투가 벌어졌는데, 종인이 다시 크게 싸워 물리쳤다. 황진에 순행차 이곳에 이르렀다 성 아래를 굽어보고 말하기를, “적의 시체가 참호에 가득하니 죽은 자가 거의 1천여 명은 되겠다.” 하였다.
그런데 이때 적 한 명이 성 아래에 잠복해 있다가 위를 향해 철환을 쏘았는데, 판순을 뚫고 진의 이마에 맞아 진이 즉사하였다. 황진은 용략이 여러 장수들 가운데 으뜸이었으므로 성 안에서는 그를 의지하였었는데, 그가 죽자 성안이 흉흉해지며 두려워하였다.
『선조수정실록』

 

왜란이 있는 이후로 모든 장수 가운데 행군에 법도가 있고 사졸에 솔선하여 옛날 중국 명장의 풍도가 있는 자로는 모두가 황진을 추중하여 으뜸으로 꼽았는데, 재주를 다 발휘하지 못하고 죽었으므로 조야에서 애석하게 여기지 않는 이가 없었다.
『선조수정실록』

 

진주성에 있었던 백성들은 당시 그 주변 지역의 사람들이었다. 진주성에서 끝까지 싸운 사람들은 백성들을 끝까지 버리지 않았던 사람들이다. 그런데 전략적으로는 권율이나 곽재우가 옳았을지 모르지만 백성을 버린 무장들을 어떻게 영웅이라고 할 수 있을까?

 

 

아홉째날(6월 29일), 이날 서예원의 뒤를 이은 장윤이 황진 대신 지휘하면서 나름 잘 막아냈지만 결국 일본군이 북문으로 넘어들어왔다. 동쪽이 뚫렸다는 기록과 김천일이 지키던 북쪽이 뚫렸다는 기록이 있다. (차라리 동쪽이었다면 내성의 성벽이 있어서 버티기 쉬웠을 것이다) 일본군이 15천을 죽이고, 25천이 남강에 투신해 죽었다는 기록을 보면 진주성에는 4만 이상이 있었다는 말이다.

 

내성까지 몰린 조선군은 끝까지 항전하게 된다. 김천일은 아들과 함께 남강에 투신하였고, 최경회도 남강에 투신하여 자결하였다. 그리고 장윤 장군은 전사하였고, 서예원은 일본군에 의해 목이 베어지게 된다.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진주 목사의 목을 가져오라고 했기 때문에 그 목은 일본까지 건너가게 된다.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김시민의 목인줄 알고 있었겠지만 서예원의 목이었다. 이종인은 끝까지 싸우다가 두 명의 일본군을 붙잡고 남강에 뛰어들었다고 한다.

 

남평 사람 이종인은 황진과 함께 무과에 급제한 용장으로 가장 먼저 진주성에 들어갔고 종횡무진하며 진주성을 지켰다. 그는 마지막에 죽을 때도 양 겨드랑이에 왜적 두 사람을 끼고서 김해부사 이종인, 여기에서 죽는다라고 외치며 남강에 뛰어들었다.
『호남절의록』

 

이종인은 황진과 우의가 깊어 의열로 서로 허락하고 생사를 함께할 것을 약속했는데, 끝내는 그 뜻과 같이 됐다.
『선조수정실록』

 

만약 황진이 살아있었다면 며칠을 더 버텼을 것이고 일본군은 피해가 커서 돌아갔을 것이며, 그렇게 된다면 제2차 진주성 대첩이 임진왜란 최대 대첩이 되었을 것이다.

 

일본은 오늘날까지 자신들이 패배한 최대의 전투는 웅치, 이치 전투라고 한다. 성을 놓고 싸운 전투가 아니라 호남을 놓고 싸운 야전에서의 패배였기에 더욱 쓰라린 패배였을 것이다.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일본군 사상자는 3만 8천이라는 기록이 나온다. 거의 일본군의 전력의 40%가 손상을 입었다고도 한다.

 

임진왜란의 시기를 다음과 같이 구분해 볼 수 있다.

     1기 : 임진왜란 : 1592.4~1593.6

     2기 : 휴전 : 1593.6~1597.7

     3기 : 정유재란 : 1597.7.~ 1598.11

 

제2차 진주성 전투(1593.6) 이후 육지에서는 감히 일본군이 공격할 엄두를 내지 못한다. 그래서 어쩌면 임진왜란을 끝장낸 전투라고 할 수 있다.

 

성안의 사녀들도 앞을 다퉈 강에 이르러 투신 자살하여 흐르는 시체가 강을 메웠다. 대략 죽은 자가 6, 7만이나 되었는데, 장사로서 벗어난 자는 수삼 인에 불과했다. 적이 성곽을 헐고 가옥을 불태웠으므로 성이 온톤 폐허가 되었다.
성이 포위를 당한 9일 동안은 주야로 벌인 크고 작은 전투가 1백 여 차례나 되었으며, 적의 죽은 자도 상당하였다.
그러나 중과 부적인 데다가 외부에서 원조가 이르지 않았으므로 여러 장수들이 힘이 다하여 죽었다. 왜변이 있은 이래 참혹하게 무너지고 의열이 장엄하게 드러난 것으로 진주성 같은 예가 없었다.
『선조수정실록』

 

진주성에서 죽은 지휘관들 명단

  • 우도절제사 김천일, 좌도절제사 최경회, 도순성장 황진, 복수대장 고종후, 찬획ㆍ김축ㆍ김상건, 참좌 김두남ㆍ김지남
  • 군기주부 유호진ㆍ김기경ㆍ유경진
  • 각군부장 양산숙ㆍ이종인ㆍ장윤ㆍ민여운ㆍ김준민ㆍ강희보ㆍ고득뢰
  • 전투대장 김공간ㆍ강희열ㆍ장천강ㆍ임두춘ㆍ조곤남ㆍ조영주ㆍ정충훈ㆍ남웅개ㆍ배몽성ㆍ권래ㆍ윤성입ㆍ고경형ㆍ박승남ㆍ정감ㆍ황연지ㆍ신원방ㆍ송제ㆍ최희준ㆍ허협ㆍ홍계훈ㆍ서정후ㆍ이의정ㆍ심우신ㆍ소제ㆍ지득ㆍ인기중ㆍ전용ㆍ문홍헌ㆍ임희진ㆍ노언경ㆍ노성니ㆍ윤치경ㆍ차승목ㆍ구희ㆍ양웅원ㆍ오죽령ㆍ김경입ㆍ김인갑ㆍ김찬ㆍ서예원

 

이들 지휘부의 대부분 호남사람이었다. 영남 호남을 구분하지 않고 내 나라 내 땅, 내 백성을 지키기 위해 싸운 전투가 진주성 전투이다. 이 진주성이 지역감정을 허무는 공간이 되었으면 좋겠다.

 

 

촉석루 누각 위에 올라 있는 세 장사여
한 잔 술로 웃으며 남강 물을 가리키네
남강의 물결은 넘칠 듯이 흘러가니
그 물결 다함없듯 우리 넋도 죽지 않네
「최경회가 촉석루에 올라 읊은 시」

 

논개(1571~1593)는 기생이 아니었다. 그녀는 최경회의 후처 혹은 애인이었다고 한다. 논개의애인이 황진이라는 설도 있지만 이것은 황진과 함께 논개가 진주성에 들어왔기 때문에 그런 설이 생긴 것이다. 황진이 안성에서 후쿠시마 마사노리(1561~1624)를 작살내면서 안성의 죽주산성을 점령하였는데, 당시 최경회가 진주성에 들어갔다는 소식을 들은 논개가 남편이 있는 곳으로 가다가 후퇴하는 후쿠시마 마사노리에게 체포되었고, 황진에 안성을 공격하고 상주까지 치고 내려오면서 논개를 구출했고, 진주성에 들어가서 최경회와 상봉시킨 것이다. 그리고 진주성이 함락되면서 논개는 최경회의 복수를 위해서 자신의 이름을 기생 명단에 올리고 일본 장수를 품에 안고 남강으로 투신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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