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이 일어난 이후 세 차례 출정해서 9번을 완벽하게 승리한 이순신 장군 덕분에 가덕도와 거제도의 서쪽으로는 왜군이 감히 넘어올 엄두를 못하게 되었다. 이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 수군과의 교전을 금하고 도망치라고 명령을 내렸다.
당시 이순신의 고민은 무엇이었을까? 만약 일본의 육군이 전라도를 통과하여 전라좌수영(여수)로 진격하면 수군으로는 당해낼 도리가 없었기 때문에 전라도로 왜군이 진격하는 것이었다. 이때 전라도를 공격하려는 고바야카와가 웅치와 이치에서 황진 장군에게 막혔고, 근거지였던 금산을 고경명과 조헌, 영규가 공격하는 바람에 마음놓고 전라도로 진격하지 못하는 상황이 되었다. 그리고 왜군이 경상도에서 전라도로 진격을 시도하는 것은 경상도 의병장인 정인홍, 김면, 곽재우의 활약으로 막히게 되었다.
이때 의주로 도망쳐 있던 선조가 이순신에게 무리한 명령을 내린다. 일본 해군의 본영인 부산을 공격하라는 것이었다. (입말 살아있은 선조)
이순신은 8월 1일에 전라우수영 이억기를 부른다. 그리고 8월 23일까지 합동훈련을 실시한다. 8월 24일 여수항을 떠나 사량도에서 원균을 만나고, 25일에 당포, 26일에 거제도 앞바다까지 진출한다(아직 견내량을 건너지는 못했다). 그리고 27일에 견내량을 통과해서 안골포까지 나아간다.
조선의 수군은 가덕도를 넘어 일본군이 주둔해 있는 부산포를 향해 나아간다. 도중에 일본의수군은 조선의 수군을 보자 도망치기에 바빴다. 히데요시의 명령도 있었기 때문에 도망치는 것이 부끄럽지 않게 된 일본의 수군이었다. 이순신의 함대는 그들을 쫓으면서 나아간다.
장림포해전(1592.8.29), 화준구미해전(1592.9.1), 다대포해전(1592.9.1), 서평포해전(1592.9.1), 절영도해전(1592.9.1)의 5번의 해전에서 24척의 왜선을 침몰시켰고, 이제 일본군의 본진인 부산포만 남았다.
부산포에는 왜선이 470여 척이 정박해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왜선을 보호하기 위해 육지에 발석차(투석기 등), 조선에서 빼앗은 화포(천자통총 등)을 장작해 놓고 있었다.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하늘이 두 쪽이 나도 부산포를 지켜라”는 명령을 내린 상황이었고, 당시 총대장격인 이쓰다 미츠나리는 다음과 같은 부산 방어 명령을 구체적으로 내려놓고 있었다.
[이쓰다 미츠나리의 부산 방어 명령]
- 조선 해군의 부산 진출 예상 항로를 예측하고 곳곳에 망대를 세울 것, 근해에서 적을 발견하기 전이라도 적 선단의 부산 쪽 기둥이 확인되면 남해안 일대의 모든 선단을 부산으로 집결시킬 것
- 포구 방파제를 더 높이 견고하게 쌓을 것
- 조선 대포를 최대한 확보하고 그 사격법을 익혀둘 것
- 투석기와 석탄(石彈)을 최대한 많이 제작하고, 언제든 사용할 수 있도록 배치해 둘 것
- 적의 상륙에 대비하여 병력을 적소에 배치할 것
- 적을 최대한 끌어들여 싸우고 거북선을 타격하는 데 집중할 것. 적의 사령선에 대한 타격이 가능하다면 역시 집중 타격할 것.
- 선상의 병력을 정예화하고, 그 병력은 화공에 대비한 화재진압조와 저격조로
- 적을 공격하기 용이한 곳에 엄폐용 참호를 파고 필요하다면 새로 진지를 구축할 것
- 적의 부산 쪽 기동이 확인되면 즉시 비상체제에 들어가고 야간에도 상시전투체제로 운용할 것
- 전투가 종료되면 그 결과를 하나도 빠짐없이 즉각 보고할 것
당시 부산포 해전에는 일본의 내노라하는 해군 사령관이 모여 있었다(구키 요시타카, 와키자카 야스하루, 도도 다카토라, 하시바 히데카쓰).
부산포의 좁은 길로 이순신의 함대가 들어가고, 이억기는 절영도를 돌아 넓은 곳에서 부산포를 향해 들어가기로 했다. 부산포를 향해 나아가던 이순신의 함대를 향해 초량목 근처에 정박해 있던 4척의 왜선이 돌진을 시도하였는데 왜병들은 도중에 바다에 뛰어들어 도망쳐 버렸다. (뒤에서 지켜보는 장군들이 있어서 뭔가는 해야겠고 죽기는 싫고...)
초량목해전(1592.9.1) 4척의 왜선을 격침시킨 이순신의 함대가 부산포 앞바다로 진격했을 때 육지에서 날아오는 함포 공격과 순왜인들이 쏘는 편전화살까지 날아오는 것을 보고 이순신은 일단 퇴각 명령을 내렸다. (당시 조선인으로서 일본에 협력한 순왜(順倭)자들도 꽤 있었다고 한다)
이순신은 부하들과 작전회의를 하는데, 조방장 정걸(1514~1597), 원균(1540~1597), 이억기(1561~1597) 등은 다음날 공격하자고 제안했지만, 녹도만호 정운(1543~1592)이 당장 공격하자고 주장하였고, 이순신은 정운의 말을 옳게 여기고 곧바로 공격을 시도하였다.
다시 부산포 앞바다로 진격한 이순신의 함대는 거북선이 맨 앞에서 전진해서 적의 공격을 맞고 있을 때 후방의 판옥선들이 작은 학익진을 여섯 개 만들어서 정박해 있는 왜선들을 공격하였다. 왜적이 다시 판옥선을 공격하게 되면 앞에 있던 거북선이 더욱 가까이 다가가서 조준사격을 하였다. 이러한 공격을 통해서 왜선 100여척을 수장시켜버렸다. 이순신은 이번 부산포해전이 다른 전투보다 가장 큰 승리였다고 생각한 듯 하다.
“전후 네 차례, 열 번의 접전에서 번번이 승첩을 거두었으나 장수들의 공로를 논한다면 이번 부산싸움보다 더 큰 것이 없었습니다. 전에는 적선의 수효가 많아 봤자 70여 척을넘지 못하였사온데 이번에는 적의 소굴에 470여 척이 늘어선 가운데로 위풍당당하게 뚫고 들어가 하루 종일 공격해 적선 100여 척을 격파했습니다. 그래서 적들로 하여금 간담이 서늘해지고 목을 움츠리며 두려워서 벌벌 떨게 했습니다. 비록 적의 머리는 베지 못했을지라도 힘써 싸운 공로는 지난번보다 훨씬 더 컸습니다.”
『부산포파왜병장』
당시 부산포에 있던 적장 하시바 히데카스(1569~1592)는 히데요시의 양자였는데, 부산포해전 직후에 홧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이날의 승리가 1592년 9월 1일이었는데 양력으로는 10월 5일이고 ‘부산 시민의 날’(10월 5일)은 이날의 승리를 기념하는 날이 되었다.
이 부산포해전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지만 이순신의 가장 아끼는 장수 정운이 일본의 대조총을 맞고 사망하였다.
[이순신 장군의 정운 추모시]
어허, 인생이란 반드시 죽음이 있고
죽고 삶에는 반드시 천명이 있나니
사람으로서 한번 죽는 것은 진실로 아까울 게 없건마는
오직 그대 죽음에 마음 아픈 까닭은
나라가 불행하여 섬오랑캐 쳐들어와
영남의 여러 성이 바람 앞에 무너지자
몰아치는 그들 앞에 어디고 거침없어
우리 서울 하루 저녁 적의 소굴 이루도다
천리 관서로 님의 수레 옮기시고
북쪽 하늘 바라보면 간담이 찢기건만
슬프다 둔한 재주 적을 칠 길 없을 적에
그대 함께 의논하자 해를 보듯 밝았도다.
계획을 세우고서 배를 이어 나갈 적에
죽음을 무릅쓰고 앞장서 나가더니
왜적들 수백 명이 한꺼번에 피 힐리며
검은 연기 근심 구름 동쪽 하늘 덮었도다
네 번이나 이긴 싸움 그 누구 공로런고
종사를 회복함도 기약할만 하옵더니
어찌 뜻했으랴 하늘이 돕지 않아 적탄에 맞을 줄을
저 푸른 하늘이여 알지 못할 일이로다.
돌아올 제 다시 싸워 원수 갚자 맹세터니
날은 어둡고 바람조차 고르잖아 소원을 못 이루매
평생에 통분함이 이 위에 더할쏘냐.
여기까지 쓰고 나도 살을 에듯 아프구나.
믿는 이 그대인데 인제는 이어할꼬.
진중의 모든 장수 원통히도 여기거니와
그 재주 못 다 펴고 덕은 높되 지위 낮고
나라는 불행하고 군사 백성 복이 없고
그대 같은 충의야말로 고금에 드물거니
나라 위해 던진 그 몸 죽어도 살았도다.
슬프다 이 세상에 누가 내 속 알아주리.
극진한 정성으로 한잔 술을 바치노라.
어허, 슬프도다.
이순신의 놀라운 승리는 휘하 장수들의 헌신이 있었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정운(1543~1592), 정걸(1514~1597), 권준(1541~1611), 나대용(1556~1612), 어영담(1532~1596), 송희립(1553~1623)
부산포해전에서 조선군은 판옥선 74척과 협선 92척이 출전하였고, 일본군은 470척이 있었다. 조선 수군의 함대 피해는 없었으며, 정운 등 6명이 사망하고 25명이 부상을 당했는데, 일본 수군의 함대는 128척이 격침되었고, 5000여 명의 사상자가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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