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황진5 [임진왜란42] 진주성혈전-임난의 끝 제2차 진주성 전투는 일본군 9만 7천명이 성을 공격했지만 8일째까지 막아낸 전투이다. 8일째 되는 날에 황진 장군이 시체더미에 숨어 있는 일본군 저격병에 의해 총알이 왼쪽 이마에 꽂히고 전사하게 된다. 다음날 적이 또 동쪽과 북쪽의 성을 침범하여 크게 전투가 벌어졌는데, 종인이 다시 크게 싸워 물리쳤다. 황진에 순행차 이곳에 이르렀다 성 아래를 굽어보고 말하기를, “적의 시체가 참호에 가득하니 죽은 자가 거의 1천여 명은 되겠다.” 하였다. 그런데 이때 적 한 명이 성 아래에 잠복해 있다가 위를 향해 철환을 쏘았는데, 판순을 뚫고 진의 이마에 맞아 진이 즉사하였다. 황진은 용략이 여러 장수들 가운데 으뜸이었으므로 성 안에서는 그를 의지하였었는데, 그가 죽자 성안이 흉흉해지며 두려워하였다. 『선조수정실록.. 2021. 4. 25. [임진왜란41] 이것이 진짜 진주성전투다(황진vs일본 역사상 all of them) 진주대첩(5일 버팀) vs 2만(사상자 수 천) 행주대첩(12시간 버팀) vs 3만(사상자 천) 제2차 진주성 전투(9일 버팀) vs 10만(사상자 3만 8천) 제2차 진주성 전투(1593.6.22~6.29) 비변사가 아뢰기를, “삼가 권율의 장계를 보니 왜적이 온갖 방법으로 진주를 공격하고 있는데, 명군은 아직까지 달려가서 구원하지 않고 있다고 합니다. 왜적과 대진하고 있는 의원으로는 오직, 선거이, 이천, 홍계남 뿐으로 그 형세가 매우 외롭고 약하다고 합니다. 권율의 생각은 다만 요해처를 지켜 호남을 보전하고자 할 뿐, 군사를 보내어 진주를 구원할 의사가 없는 듯합니다. 진주를 구원하는 것이 바로 호남을 보전하는 길이니, 이런 뜻으로 급히 권율에게 하유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선조실록 40권.. 2021. 4. 25. [임진왜란40] 임난 최대전투의 시작(6천vs10만의 전설) 한양을 포기하고 남쪽으로 내려온 일본군에게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다음과 같은 명령을 내린다. 진주성에서 당한 패전을 보복하기 위해 전병력을 동원해서 공략할 것. 진주목사의 목을 베어올 것. 그리고 진주성 내의 살아있는 모든 생명을 말살할 것. 그것이 사람이 아니라 짐승이라고 할지라도 『토요토이 히데요시의 공격명령서』 1차 진주성 전투(김시민의 진주대첩, 1592.10)의 설욕을 하고 싶어하는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이런 명령서를 다섯 번 보낸다. (아마도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김시민이 죽은 것을 모르고 있었던 것 같다) 남쪽으로 후퇴해 있는 일본군 장수들도 무리라는 생각을 했지만 본국에 가족들이 인질로 있기 때문에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령을 거부할 수 없었다. 이때 명나라 군대는 순천, 남원, 대구까지 내려와 .. 2021. 4. 25. [임진왜란 27] 공성전 승리 - 영천성 전투(적을 전멸시키다.) │황현필 한국사 1592년 9월 1일에 이순신이 적의 본진이라고 할 수 있는 부산포를 작살냈으며, 같은 날 황해도 연안성에서 이정암 장군(1541~1600)이 일본의 3번대 구로다 나가마사(1568~1623)를 막아냈다. 며칠 뒤인 9월 8일 혹은 9일에 경주성을 박진 장군(1560~1597)이 탈환하려는 이야기 하기 전에 7월에 경주성의 옆에 있는 영천성을 권응수 장군(1546~1608)이 탈환한 이야기를 먼저 해야할 것 같다. 임진왜란 조선 3대 장수를 선정하라고 하면, 황진(1550~1593), 권응수(1546~1608), 정기룡(1562~1622)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권응수는 선무 2등공신에 선정될 정도의 활약을 하였다. 임진왜란이 발발한 직후에 경상도가 초토화 되었다. 경상우수사 원균과 경상좌수사 박홍의 .. 2021. 4. 17. [임진왜란23] 호남방어전(웅치.이치전투), 육전 최고의 승리? 영웅 이름? 4대대첩으로 바뀌어야 │황현필 한국사 조선이 일본에게 멸망당하지 않았던 전투는 무엇일까? 임진왜란을 안다고 자부하는 사람들 중에 웅치전투(1592.7.7)와 이치전투(1592.7.8?)를 아는 사람은 몇이나 있을까? 만약 황진(1550~1593) 장군을 모르는 사람은 임진왜란을 언급할 자격이 없다고 볼 수도 있다. 왜군이 한반도에 상륙해서 20일 만에 한양에 입성했는데 왕이 도망치고 없었다. (이것이 왜군에게는 멘붕이었다고 한다) 이후 누가 왕을 잡으러 갈 것인가를 놓고 제비를 뽑았는데 고니시가 이겨서 고니시가 선조를 추격하기로 하고, 가토는 함경도쪽으로 가기로 했다. (가토는 함경도에서 선조의 아들 임해군을 잡기도 했다) 4군단 시마즈 요시히로(1535~1619)는 강원도로 진격했고, 3군단 구로다 나가마사(1568~1623)는 충청도를 .. 2021. 4. 16. 이전 1 다음 728x90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