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석진 목사, 선교사들에게 ‘한국을 떠나든지 세상을 떠나든지 하라’고 선언하다.
한석진 목사는 마펫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고 그와 함께 평양선교를 위해 동고동락한 동역자였다. 그리고 평양신학교 제1회 졸업생으로 장로교 제6회 총회장을 역임한 한국교회의 지도자였다. 그러한 그는 한국교회가 계속 유아기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안타깝게 생각했다. 그는 한국교회가 자립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한 그가 선교사들에게 ‘한국을 떠나든지 세상을 떠나든지 해야 한다’는 폭탄 발언을 한 적이 있다. 이것에 대해서 채필근의 『한국기독교개척자 한석진 목사와 그 시대』 227-231쪽에 기록되어 있다.
1927년 한목사가 신의주교회에서 시무하고 있을 때의 일이었다.
국제기독교청년회회장 穆德(목덕) 博士(박사)(Dr. John R. Mott)가 예루살렘에서 모이는 세계선교대회에 참석하려고 가는 길에 극동에 있는 몇나라를 방문하면서 우리나라에도 들렸다.
목덕박사는 조선호텔에 장소를 마련하고 국내에 주재하고 있는 외국 선교사와 전국에서 한국인 목사 중에서 대표될만한 사람들을 초청하여 한국의 선교문제와 한국교회의 발전에 대하여 토의하게 되었던 것이다. 한목사도 이 회에의 초청을 받고 서울로 올라왔다.
이 모임은 목덕 박사가 주관하고 정인과 목사와 신흥우 청년회 총무의 통역으로 시작되었는데 참석한 선교사들과 우리나라 목사들은 각각 자기의 의견을 말하였다.
한국목사들은 선교사들이 복음을 가지고 와서 수고를 많이 하는데 대한 치사와 한국교회가 짧은 시일에 크게 발전한 것을 자랑하는 한편 앞으로 더욱 원조하여 주기를 부탁하는 등 형식적 인사에 그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이윽고 한목사의 차레가 되어서 그는 한국교회 장래의 발전과 선교사에 대한 의견을 말하게 되었다.
한목사는 언제나 자기의 소신을 피력할 때에는 그 이론이 정연하고 솔직하며 기탄없이 말하는 것으로 유명하기 때문에 그 자리에 모인 선교사나 한국목사들의 시선은 한목사에게 집중되었다.
한목사는 말하였다. 『나는 우리나라에 와 있는 선교사들이 수고를 많이 하고 있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며 그리고 그들의 과거의 공적을 결코 무시하는 바 아니나 지금 그들이 한국교회를 위하여 일하고 있는 방법이나 생각하고 있는 바는 도저히 교회발전에 도움이 되지를 못함은 물론 도리어 해독을 끼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이 자기들의 선교비를 가지고 와서 일하는 것이니 왕가왈부할 필요나 권리가 없다고 할는지 모르나 진심으로 한국교회의 발전을 위한다면 그들이 모두 본국으로 도라가든가 그렇지 않으면 이 세상을 떠난 후에 새 선교사가 한국에 와서 새로운 선교정책으로서 일하게 되는 날에 비로소 우리나라 교회의 발전을 볼 수 있게 되겠다』고 갈파하였다.
한목사는 계속하여 한국에는 한국 고유의 문화가 있고 전통이 있음을 말하고 또한 그동안 시대의 변천도 있었음을 지적한 후 『선교사업을 성공시키며 가장 효과적으로 하려면 서교사가 한 나라에 오래 머물러 있지 말고 교회의 기초가 서게 되면 그 사업을 원 주민에게 맡기고 다른 곳으로 가서 새로 일을 시작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선교사들이 한 곳에 오랫동안 체류하면 자기가 세운 교회며 학교라는 생각으로 우월감을 가지고 영도권을 행사하려고 하게 되니 이것은 참된 복음 정신에 위반되며 교회발전에 방해가 될 뿐이요 조금도 도움이 안된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그는 끝으로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그 자리에 앉아 있는 장로교 원로 선교사들을 가리키면서 엄숙하고 침통한 어조로 아래와 같이 말하는 것이었다. 『저 선교사들이 우리나라에 와서 수고를 많이 하면서 머리들이 희게 되었으니 진심으로 감사를 드리는 바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이분들이 우리나라에서 할 일은 다 하였으니 본국으로 돌아가던가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 앞으로 가셔도 좋을 줄 압니다. 이것이 참으로 한국을 위한 것입니다』
이 말을 듣고 있던 馬布목사가 이에 대하여 발은을 하려고 일어섰을 때에 한목사는 『마목사 당신도 속히 이 나라를 떠나지 않으면 금후에는 유해무익한 존재가 됩니다. 마목사는 처음부터 나와 함께 일한 친구요 동지로서 그를 진심으로 사랑하기 때문에 하는 말이니 용서하시기 바랍니다』하고 응수하였다.
馬布목사와는 같이 평양교회를 개척하고 창설하였으며 존경하는 선배요 동지임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한국교회를 위하여 큰 공적을 남긴바 있는 것을 잘 알면서도 그에게 이와같은 말을 한 것은 한목사가 강직하고 담담한 성격 그대로를 표현한 것이다.
한목사의 위의 발언은 참으로 한국교회를 살아하고 애끼는 사람 아니고는 감히 말하 수 없는 일이었다.
이때에 한목사의 이 발언을 통역하던 정인과 목사는 한목사의 말을 차마 그대로 옮기지는 못하고 대의(大意)만을 통역하였다는 것이 후일 정목사의 회고담이다.
채필근 목사는 1927년의 일이라고 언급하지만, 다른 학자들은 1925년에 있었던 일이라고 한다. 한석진 목사의 발언의 주요 골자는 한국 교회는 자립의 기반을 구축했으니 한국인들에게 맡기고, 선교사들은 떠나는 게 어떻겠느냐는 내용이었다. 그의 발언이 30년 넘게 선교 활동을 해 온 선교사들의 귀에 거슬릴 것은 당연했다. 그는 마펫 선교사에게 직접적으로 ‘한국을 떠나라!’는 말을 한 것이다. 자신에게 세례를 주고, 목회자의 길을 가도록 이끌어 준 선교사에게 ‘떠나라’고 한 것은 언뜻 ‘배은망덕’한 행위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한석진 목사의 분노에 찬 호소는 한국 교회의 독립을 촉구하는 외침이었다. 그 외침은 여전히 한국 교회를 유아기의 미자립 교회로 인식하고 보호하려는 명분 하에 지나치게 간섭함으로써 교회 발전을 저해하는 선교사들을 향한 것이었다. 또 자립의 능력을 갖고 있으면서도 능력 발휘보다 선교사에게 의존해 스스로 성장하기를 포기한 한국 교회를 향한 것이었다.
마지막에 정인과 목사가 통역하면서 대의만을 통역하였다고 이야기했지만, 원로 선교사들은 거의 30년 넘게 한국에서 있었기 때문에 특별히 통역이 필요하지 않았을 것이고, 처음 참석한 목덕 박사만 통역이 필요했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선교사들에게는 냉정하고 충격적인 말로 들렸을 것이다.
1938년 평양의 장로회신학교가 신사참배문제로 문을 닫게 되자, 서울에서 송창근, 김재준, 함태영 등 ‘진보적’ 학자들이 ‘조선신학교’라는 이름으로 신학교를 설립하였는데, 1939년 이 학교가 문을 열자 한석진은 김재준 목사에게 "한국인의 손에 의한 신학교가 설립되었으니 비로소 내 꿈이 이루어졌소." 라는 감격의 편지를 보냈다. 그 편지를 보낸 6개월 후, 1939년 9월 서울 당인리 자택에서 조용히 별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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