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다대포 전투(1592. 4.13 ~ 14.)
다대포성을 지키던 윤흥신 장군은 일본군을 하루동안 막아냈다고 한다. 처음에 다대포성을 버리고 도망가는 척 하였을 때, 일본군은 성을 쉽게 점령해서 안심하고 노략질을 하기 시작했다. 이때 윤흥신 장군의 부대가 다시 쳐들어와서 일본군을 몰살하고 성을 다시 접수하였다. (최종적으로는 패했지만 처음에는 승리한 전투였다) 이후 추가된 일본군과 싸우다가 점령당한다.
윤흥신 장군은 윤임의 다섯 번째 아들로 윤임은 을사사화(1545) 때 소윤(윤원형)과 대결한 대윤의 거두였다. 윤임은 중종의 왕후였던 장경왕후의 오라버니였다고 하니, 윤흥신 장군의 고모가 왕비였다는 말이다. 비록 윤임의 집안이 몰락했지만 무력이 뛰어나서 다대포의 첨사가 되었고 임진왜란 때 다대포성을 지키다가 전사했다. 이 윤흥신 장군의 12대 손이 독립운동가 윤봉길이다. 이러한 윤흥신 장군의 기록이 조선에는 없었는데, 영조 때 조엄(1719~1777)이 일본에 통신사로 건너갔을 때 일본인들에게 윤흥신 장군의 이야기를 듣고 돌아와서 윤흥신 장군에 대해 복원했다고 한다.
3. 동래성 전투(1592. 4.15)
동래성은 부산성과 다대포성보다 비교적 큰 성이었다. 당시 동래성에 도착해서 고니시 유키나가는 “싸우려면 싸우고, 싸우지 않으려면 길을 빌려달라!”고 말했지만, 송상현 장군은 “싸워서 죽기는 쉬워도, 길을 빌려주기는 어렵다!”라고 거절했다고 한다.
동래성의 병력은 3천명 정도였고, 2만여 명의 주민들이 함께 성을 지키려고 노력했다. 당시 경상도 바다를 지키던 경상우수사 원균은 70여 척의 판옥선을 바다에 수장시키고 도망쳐버렸다. 경상좌수사 박홍은 바다에서 싸우지 못하고 동래성으로 합류했고, 이각 역시 동래성에 합류했는데 이각과 박홍은 싸우기 전에 도망쳤다. 특히 이각은 관직이 송상현보다 높았는데, 밖에서 협공하겠다고 말하고는 튀어버렸다.
[좌우의 개념이 오늘날 우리의 개념과는 다르다. 그것은 한양에 왕이 앉아서 아래를 내려다 본다고 생각했을 때 좌, 우의 개념이다. 그렇게 따진다면 전라우수영은 전라도 서쪽이고, 전라좌수영은 전라도 동쪽이다. 마찬가지로 경상우수영은 경상도의 서쪽이고, 경좌우수영은 경상도의 동쪽이다. 따라서 전라좌수영의 이순신과 경상우수영의 원균이 인접해 있게 된다.]
전세가 기울자 송상현 장군은 문신복으로 갈아입고 선조가 있는 곳을 향해 절을 하고 의연하게 죽음을 맞이했다고 한다. 이러한 송상현의 모습에 대단함을 느낀 고니시기 시신을 수습해서 고향까지 보내줬다고 한다. 한편 송상현의 소실 중 한 명(이씨부인)은 일본으로 끌려가 토요토미 히데요시 앞까지 갔지만, 한치의 굴함도 없이 당당하게 일본군에게 욕을 해서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되돌려보냈다는 기록도 있다.
성을 점령한 일본군은 3천명의 조선 병사는 물론 2만 명의 주민들까지 모조리 학살했다. 조선판 킬링필드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은 일본이 전국시대를 경험하면서 성을 공격하기 전에 항복하면 다 살려주고, 성을 공격하던 도중에 항복하면 우두머리만 할복하고 주민은 살려주지만, 성을 점령하면 모조리 죽이던 습성을 조선에서 그대로 적용한 것이다. 이 학살은 2005년 부산 지하철 건설 예정지에서 다량으로 나온 유골들이 증명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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