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2]에서 조선의 창인 삼지창(당파)는 임진왜란 이후에 사용되는 것이라는 네티즌의 지적이 있었다. 이것에 대해서 임진왜란 이후라는 것은 임진왜란도 포함된다는 의미라고 알려준다.
명나라에서는 왜구가 절강성을 침입(1553)했을 때, 당시 척계광이 ‘절강병법’을 만들어서 12명이 일본 왜구 1명을 막아내게 하면서 두 명이 당파를 들고 일본의 긴 창을 막아내게 하였다고 한다. 따라서 당파의 용도는 1대 1로 맞장을 뜨려는 것이 아니라 일본의 긴 창을 막아내는 것으로 사용되는 것이었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명나라 군이 이 당파를 조선에 가지고 들어왔고, 정유재란 때 조선군의 거의 대부분이 창으로 당파를 사용했다. (조선 전기의 내용을 담은 사극에서 당파를 들고 있는 모습은 역사적 오류가 확실하다)
조선은 건국 초기부터 사대교린(事大交隣) 정책으로 일본을 상대하였다. (엄밀하게 말하면 오랑캐로 본 것이다)
세종 1년에 이종무 장군이 쓰시마섬을 정벌(1419)하였다. 이것은 엄밀하게 말하면 태종 이방원의 작품이고, 또 엄밀하게 말하면 정벌이라고 하기에는 좀 민망하다.
이후 일본이 계속 교류를 요구하자 조선은 삼포를 개항해준다(1426년). 이때 개항된 삼포는 부산포, 염포(울산), 제포(진해)였다. 그리고 1443년에 계해약조를 통해서 세견선 50척, 세사미두 200석으로 한정해서 교류를 허용해 주었다.
중종 때 삼포에서 왜란이 일어났다(1510). 이것을 막기 위해서 조선에서는 비변사(備邊司)라는 임시 군사기구를 만들어서 막아내었고, 삼포를 폐쇄했다. 그리고 다시 일본이 교류를 요구하자 임신약조(1512)를 체결하고 제포만을 개항해 주었다. 그런데 일본이 또 정신을 못차리고 제포 옆의 통영 근처에서 다시 난리를 일으켰다(사량진 왜변, 1544).
명종 때 정미약조(1547) 체결하고 다시 교류를 약간 허용했는데, 1555년 을묘왜변을 일으켰고 이때는 제주도까지 침략했다. 이후 비변사는 상설기구가 되었고, 조선과 일본은 국교를 단절했다.
일본은 오닌의 난(1467) 이후 백여년간 전국시대로 무법천지가 되어 있었다. 그래서 조선의 사신이 일본에 가더라도 제대로 된 교류 상대가 없었다. 조선이 일본에 보낸 세작은 실종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이때 유일하게 일본에 대한 정보를 알려주는 인물이 쓰시마섬 도주였다. 쓰시마섬은 조선과 교역을 해서 먹고 사는 섬이었기 때문에 조선에게 상당히 잘보일 필요가 있었다.
일본이 통일된 이후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쓰시마섬 도주를 압박해서 조선을 정벌하려고 하면서 이것 저것 요구하자 쓰시마섬의 도주는 아마도 미칠 지경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일본이 통일하고 침략할 수 있다는 정보를 조선에 알려주었으나 조선 정부는 무시했다.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정명향도’(征明嚮導)로 명을 정벌하러 갈테니 조선이 앞장서라는 외교문서를 조선에 전달하라고 쓰시마섬 도주에게 명령했다. 차마 조선이 앞장서라는 건 전달할 수 없었던 쓰시마섬 도주는 ‘정명항도’를 ‘정명가도’(征明假道)로 변경해서 길을 빌려달라는 표현으로 완곡하게 수정해서 조선에 전달한다. 이때 심지어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 왕의 입조(入朝)를 요구했는데 이것은 차마 전달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리고 통신사의 파견을 조선에 요청하게 된다.
당시 조선의 왕은 무능함의 넘사벽, 끝판왕 선조였다. 당시에 사림이 정계를 장악하고 있었는데, 사림은 사림 내부는 이조전랑 후임 자천권으로 붕당이 되어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어 있었다. 동인은 정여립 모반 사건(1589)을 계기로 북인과 남인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조선 조정은 통신사를 보낼 때 정사로 서인의 황윤길, 부사로 동인의 김성일을 파견한다. 이들은 3개월이 걸려 교토로 간다(장기간 출장을 간 것이다). 서인의 황윤길은 일본의 건축기술, 유럽과 교역했던 물품 등을 보면서 발전된 기술을 보고 깜짝 놀란다. 그런데 김성일은 이황(1502~1971)의 제자로 유성룡(1942~1607)과 양대산맥을 이루고 있었는데, 당시 성리학적 가치관에 입각해서 일본을 철저하게 오랑캐 취급을 하고 있다. (선조 수정실록에는 김성일이 조선의 자존감을 세우는 당당함을 보였다고 한다)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3개월 동안 통신사들을 만나주지 않다가 3개월 이후에 결국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통신사들을 만나준다. (3개월 출장이 6개월 출장으로 늘어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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