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통신사들은 3개월 걸려서 일본에 와서 3개월 기다려서 토요토미 히데요시를 만나게 되었다. (이쯤 되면 만났을 때 ‘엄청 기다렸습니다!’ 하고 끌어안아야 하는 거 아닌가? ^^)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어떤 인물인가? 전국시대 세 명의 영웅(오다 노부나가, 토요토미 히데오시, 토쿠가와 이에야스)의 한 사람으로 오다 노부나가를 배신한 부하를 징벌하면서 경쟁자를 물리치고 권력을 잡고 백년 간의 전국시대 혼란을 종식시킨 인물이다. 이러한 토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또 한 명의 영웅인 도쿠가와 이에야스조차 납작 엎드려 있는 상태였다.
울지 않는 새를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오다 노부나가는 울지 않는 새는 필요없으니 죽인다,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어떻게 해서든 울게 만들 것이다, 토쿠가와 이에야스는 울때까지 기다린다는 것이다. 이것은 세 사람의 성격이 어떠한지를 보여주는 이야기로 유명하다.
다이묘 출신의 오다와 도쿠가와는 달리 평민 출신인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백년 간의 전국시대 혼란기를 통일한 입지적인 인물이다. 그는 오다 노부나가의 부하 시절에 맡겨진 일은 철저하게 잘 수행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가 오다 노부나가의 신발을 품에 품고 따뜻하게 만든 일화는 너무나 유명하다. 그리고 오다가 물건을 사오라고 시켰을 때 히데요시는 자신의 돈을 추가해서 좋은 물건으로 사서 신임을 얻었다고 한다.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왜 조선정벌을 꿈꾸었을까? 여러 가지 학설이 있지만 진실은 토요토미 히데요시만 알 것이다.
도자기 전쟁이라고 일컬어지는 임진왜란 이후 도자기 산업이 월등히 발전한 걸 보면, 도자기가 탐이 나서 전쟁을 일으켰다는 우스개 소리도 있고, 조선의 목화, 면포에 대한 욕심이라는 말도 있다(돛이 면포로 만들어져야 배가 빨리 다닐 수 있다). 당시 명나라가 해금정책(海禁政策)으로 일본과의 교역을 단절하고 있었던 것에 대한 불만도 있었을 것이다.
통일 이후 무사 계급(다이묘)이 언제까지 자신에게 충성을 다할 것인가에 대한 불안함? 미천한 신분에 대한 열등감으로 자신이 통일을 뛰어넘어 더욱더 위대한 업적을 남기겠다는 생각을 했을지도 모른다.
당시 일본의 귀족은 남색을 즐기는 것이 유행이었다. 자기의 주군에게 몸을 바치고 다이묘가 된 사람도 꽤 있었다고 한다. 남색은 다이묘들만의 특권이라고 생각했는데,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남자에 관심이 없었다. 다이묘들은 이 좋은 걸(?)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좋아하지 않는 것은 신분이 천하기 때문이라고 말하기도 했다고 한다. 여하간 여색만 밝히는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슬하에 자식이 오랫동안 없었다.
히데요시는 원래 오다 노부나가의 여동생을 좋아했다. 그런데 그녀는 히데요시의 외모 때문인지 히데요시에게는 1도 관심이 없었다고 한다. 후에 히데요시가 일본을 통일하고 권력을 잡게 되자 오다 가문에서는 히데요시의 눈치를 보면서 히데요시가 좋아했던 여자의 딸을 히데요시에게 바치게 되었고, 히데요시는 그녀를 통해서 귀한 아들을 보게 된다. 그가 토요토미 쓰루마스(1589~1591)이다. 늙은 나이에 얻은 아들이 얼마나 귀했을까? 이 아들을 낳기 전에 고자라는 소문도 있었는데...
조선의 통신사 김성일과 황윤길이 왔을 때에도 토요토미는 그 유일한 아들을 안고 있었다고 한다. 외국 사절단에게 예의라고는 1도 없는 행동이었다. 이런 애지중지하던 아들이 1951년에 죽어버린다.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죽은 아들로 인해서 이성을 잃어버리고 당시 의사들 목을 쳐버렸고, (다이묘들에게) ‘너희들도 자식들 죽는 경험을 해보거라’ 하면서 조선 정벌을 단행했다는 히데요시의 노망설도 있다.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과대망상적인 인물이었는지 모른다. 그는 1585년 일본 통일한 이후에 조선은 당연하고 명나라와 인도까지 정벌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서양의 포르투갈에게도 입조를 요구하는 문서를 보내기도 했고, 태국, 인도에도 그런 문서를 보냈다고 한다.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태국이 분노하여 참전을 고려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만주의 여진족 누르하치도 참전하겠다고 했지만 조선이 거절)
통신사를 홀대하는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왕이 입조하지 않으면 조선왕의 부하들이 찾아와 엎드려서 항복하러 온 것으로 생각했다고 한다. 그런데 통신사들은 ‘전국시대 통일 축하 사절단’이었다. 이에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명나라를 치러 가는데 조선 왕이 도우라는 문서를 통신사들에게 주면서 조선 왕에게 전달하라고 한다. (이걸 그대로 전달했는지는 모르겠다. 아마도 안한 것 같다)
조선에 돌아와 두 사람은 보고한다.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어떤 인물이냐고 묻는 선조에게 두 사람은 다르게 대답한다.
황윤길, “외모는 보잘 것 없으나 눈빛에 야욕이 가득하니 그는 분명히 조선을 침략해 올 인물입니다.”
김성일, “원숭이처럼 보잘 것 없는 외모를 가진 토요토미 히데요시 따위가 감히 어떻게 조선을 쳐들어온단 말입니까? 왜 갑자기 왕 앞에서 전쟁을 이야기해서 민심을 들끓게 하려고 합니까?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절대로 조선을 침략하지 않습니다.”
이것 때문에 김성일이 욕을 바가지로 얻어먹는다. 실제로 김성일은 임진왜란 때 최선을 다했고 전장에서 죽는다. 그런데 이후 전쟁에 대한 대비를 못하게 해서 욕을 먹는 인물로 고정된다. 유성룡의 징비록에는 김성일이 “내가 일본이 침략할지 안할지 어찌 알겠습니까? 다만 지금 전쟁에 대비하자라고 하면 민심이 동요되니 나는 서인과 반대되는 이야기를 했던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는 기록이 있다. 물론 같은 동인이었던 유성룡이 김성일을 옹호하려는 의도였을지도 모른다.
붕당정치의 폐해로 조선은 전쟁을 대비하지 못했다고 상식적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사실은 어느 정도 일본이 쳐들어올 것을 예상하고 미리 전쟁에 대한 대비를 하고 있었다. 정읍현감이었던 이순신(1545~1598)을 승진시켜 전라좌수영으로 1591년에 배치하였고, 동래성 성주 송상현(1551~1592)이 부임하여 전쟁에 대해 대비하면서 성을 축조하고 군비를 확충하려고 노력한다. 성벽을 쌓는데 선비들까지 동원되었는데 평소에 입만 살았던 선비들이 얼마나 불만을 했을까? 그래서 애초에 계획했던 성벽보다 낮게 쌓았을 것이다. 이때 조선의 착각은 을묘왜변 때 만 명이 쳐들어왔으니 기껏해야 2~3만명 정도 쳐들어올 것으로 예상한 것이다.
쓰시마섬 도주가 조총까지 선물하면서 일본의 신무기 존재를 알려주었으나, 당시 여진족을 막아내던 신립(1546~1592)이 유성룡에게 “조총이 쏘기만 하면 전부 다 맞는단 말입니까?”(징비록)라고 조총을 우습게 여겼다고 한다. 아마도 그는 여진족이 쏘는 화승총 정도로 생각했을 것이다.
일본은 규슈의 나고야에 어마어마한 성을 쌓았고, 조선으로의 출진 준비를 완비하였다. 이윽고 1592년 4월에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 출정 명령을 내리고, 4월 13일에 고니시 유키나가(1555~1600)의 1만 8천여명의 부대가 부산 앞바다에 나타나면서 임진왜란은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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