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하문명과 홍산문화에 대하여
(문명은 문화보다 조금 큰 개념으로) 요하문명은 지금의 하북성, 내몽골, 요녕성, 그것보다는 조금 더 크다고 볼 수 있는데... 이쪽 지역에 광범위하게 퍼져있는 신석기 문화부터 청동기 문화로 이어지는 고대 문명이다. 그리고 이 요하문명의 속에 홍산문화라는 작은 우리가 많이 들어본 홍산문화는 그 중의 한 문명으로 요하문명 속에 홍산문화라는 하나의 작은 문화가 요하문명의 한 틀을 이루고 있다.
요하문명은 서기전 8천년에 시작하는 신락문화부터 시작하는데, 홍산문화는 서기전 5천년 전에 시작하는 문화이다. 이 문화가 나중에 우리 고조선으로 직접 연결되는 것이기에 대단히 중요한 문명이자 문화라고 할 수 있다.
내몽골에 가면 내몽골의 적봉이라는 도시가 있다. ‘적’자가 붉을 적(赤)자인데 내몽골에 가면 산들이 전부 다 빨간산이다. 그래서 적봉이고... 홍산도 붉을 홍(紅)자를 쓰니까 붉은 것을 상정해서 홍산문화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요하문명의 홍산문화가 알려지게 된 것은 20세기 초의 도리이 류조라는 일본인 학자에 의해서 처음 알려지게 되었다. 도리이 류조라는 사람은 인류학자로 당시 내몽골 쪽에 가서 몽골족 왕족 집안의 가정교사를 했는데 그쪽 지역에서 적석총 돌로 만든 무덤이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적석총은 우리 민족하고는 돌하고 관계가 깊은데... 돌로 무덤을 만드는 것은 우리 민족 고유의 매장 풍습이다) 도리이 류조가 이쪽 지역에 중원의 황하문명과는 아주 다른 형태가 다른 문명이 있다라는 것을 처음 일본 돌아가서 이야기했는데 그때만 해도 별로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러다가 일본이 1931년도에 만주사변을 일으켜서 청나라 마지막 황제 선통제 푸이를 초빙해서 만주국을 세웠고, (만주국은 열하, 흑룡강, 길림, 요녕성의 4개 성으로 이루어지고 있었고, 약 3천만 명 정도의 인구를 갖고 있었다) 일본은 만주국을 다스리기 위해서 상당히 정교한 프로그램을 짰다. 가장 중요한 것은 만주국을 중국의 장개석 정권하고 분리하는 것이었다. 만몽(만주와 몽고) 분리정책의 학문적인 토대를 제공한 것이 요하문명, 홍산문화라고 볼 수 있다.
일본에서는 당시 만주국이 성격이 복잡하니까 만주국을 다스리기 위해서 오족협화정책이란 것을 쓰게 된다. 오족(일본, 조선, 만주, 몽골, 중국의 한족)이 같이 협화해서 만주국을 다스려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이러한 협화라는 것은 말장난이고 만주국의 실권은 푸이에게 있는 게 아니라 관동군 사령관에게 있었다. 일본이 만주 지역을 지배하려고 보니까 일본인들은 거의 숫자가 없고 그곳에는 여러 민족의 섞여 있으니까 그것을 ‘오족협화’란 이름을 내걸어서 통치를 했는데 핵심은 만주와 몽골 지역을 중국에서부터 분리하는 정책이었고 일본이 이 홍산문화를 이용하게 된 것이다. ‘만주와 몽골은 중국문명과 전혀 계통이 다른 문명이다’라고 해서 만주국을 중원으로부터 독립시키는 이론적 근거로 사용된다.
고고학이라는 것은 상당히 정치적인 학문이라고 볼 수 있는데, 일본은 고고학을 만주국에 시행할 때는 중국과 분리하는 정책으로 썼고, 한국에 대해서는 고대 한국이 중국과 일본의 식민지였다는 데 사용한다. (앞뒤가 서로 안 맞는 말들을 한 것임)
제국주의 역사학은 분절적인 역사학... 나눠가지고 통치하는 그런 역사학이다. 일본이 그런 식의 역사학을 주장하는 것에 대해서 중국의 양계초의 아들인 양사영이라는 학자는 하버드에서 고고학을 공부하고 중국으로 귀국하여 중국에서 ‘전야고고학’ 즉 ‘들판고고학’의 아버지라고 불린다. 양사영은 일본의 의도에 맞서서 동북의 네 개의 성(만주국)을 잊어서는 안된다는 중국 민족들의 애국심을 불러 일으키는 용도로 고고학을 활용한다.
홍산문화를 둘러싸고 1930년대에 중국과 격한 분쟁을 진행하던 일본은 1945년 패망하면서 쫓겨나게 된다. 중국에서 이쪽 지역의 발굴에 나서서 홍산문화, 요하문명을 이야기하기 시작하는데... 중국에서도 1987년도 경우에는 중국에서도 이민이라는 학자가 나와서 ‘홍산문화의 주인공은 조이족’, 새 조(鳥)자와 민족이(夷)자를 쓰는 조이(鳥夷)족이라고 주장한다(조이족은 동이족의 문화다).
그런데 이후 중국의 장박천이라는 또 다른 학자가 나와서 홍산문화는 조이족 문화가 아니라 황제족 문화라는 주장을 한다. 사마천은 중국사의 시작을 황제(오제)로부터 시작하는데 그 황제의 손자인 전욱족이 만든 문화가 홍산문화, 요하문명이고 요하문명은 중국의 문명이라는 주장을 한 것이다. 지금의 요하문명은 그 범위가 상당히 넓은데 하북성에서부터 내몽골, 요녕성 광범위한 문화인데 장박천이 황제족 문화라고 주장하기 전에는 그 누구도 황제족들이 중국 북방까지 와서(만리장성 북쪽까지 와서) 활동했다는 주장을 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중국 민족은 동이족과 하화족으로 나눌 수 있는데, 전혀 하화족 문명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지금의 정치적인 목적을 위해서 요하문명도 중화 민족의 문명이라고 주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을 국가 차원에서 밀어붙여서 중국에서는 그렇게 주장이 되는 형편이다.
숫적으로 중국 학자가 많든 적든, 처음에 정치적 고려 별로 없이 주장했을 때는 다 ‘동이족 문화’라고 주장하던 것이... 여러 학자가 정치적 목적을 가지고 중화문명이라고 주장하는 형편이다. 아무리 그렇게 주장한다고 해서 그 문명의 성격이 바뀔 순 없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는 어떤가?”라는 것이 중요한데 요하문명이라는 19세기 초에 발견된 문명에 대해서 남한의 강단사학자들은 연구 자체를 안한다. 우리 고조선, 고구려 선조들이 활동하던 지역에서 그런 고대문명이 나왔으면 일단 학자로서 호기심이 당연히 생기고, 가서 연구를 해봐야 되는데 연구부터 안하면서 우리 것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런 와중에 남한 강단사학하고는 조금 다른 민족사학계 쪽의 여러 학자들이 홍산문화를 보다 깊이 연구해서 ‘우리 쪽으로 연결되는 동이족 문화’라고 연구한 결과들을 발표하고 있는 상황이다. 홍산문화, 요하문명은 시기적으로 따져도 중국에서 주장하는 황하문명보다 시기가 무척 빠르다. (학자에 따라서 1천 년 빠르다고 하는 학자들도 있고, 요하문명의 가장 빠른 것이 신락문화는 중국의 양소문화보다 3천년이나 빠른 문명이다) 이 문명들이 중요한 것은 바로 우리 역사와 직접 연결되기 때문이다.
요하문명 중에 아주 중요한 문명 중에 하나가 ‘하가점 문화’인데 하가점 하층문화는 중국에서도 보통 BC 2,200년경 시작하는 문화이고, 하가점 상층문화는 BC 약 1,500년전부터 시작하는 문화이다. 하가점 하층문화에서 청동기가 나오기 시작하고 하가점 상층문화에서 고조선식 청동기인 비파형 동검 다수 출토되었다. 요하문명에서 BC 8,000년 전부터 신락 문화에서 살았던 사람들이 계속 내려와서 중국의 하가점까지 이어진다고 볼 수 있는데, 중국의 여러 학자들이 대놓고 말 안하지만 속으로는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남한의 민족 사학자들이나 안춘배 교수님(부산시 문화재 위원장 하셨던 고고학자)도 고조선 문화라고 명확하게 인정하고 있다. 이 문화가 지금으로부터 BC 8천년 전에서 시작해서 고조선까지 연결되는 우리 조상들의 문화이다.
요하문명, 홍산문화 지역에서 고조선 문물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그쪽에 박물관들에 가보면 고조선식 동검들이 수를 셀 수도 없이 많이 나온다. 이것은 중국에서 상당한 골칫거리가 된다. 이것을 고조선이라고 말하면 중국에서는 동북공정 논리가 다 무너지는 것이다. 중국사람들은 고조선이라는 표현을 안쓰기 위해서 ‘산융문화’ 또는 ‘동호문화’라고 부른다. 아주 개탄스러운 것은 남한의 강단사학자들이 중국에 가서 중국학자들하고 어울리고 대접 받아가면서 똑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산융, 동호라고 할 수 있는 근거가 없다. 예를 들어 비파형 동검은 고조선식 동검이다, 다른 말로 비파형 동검은 고조선식 동검이라고 말하는데... 그럼 산융문화라고 말하려면 산융문화가 어떤 건지 체계적인 틀이 있어야 되는데 그것도 전혀 없이 중국에서 고조선을 부인하기 위해서 ‘산융문화’다 ‘동호문화’라는 것을 남한의 강단사학자들이 그대로 중국 것을 따라서 산융문화다 동호문화라고 말하는 것이다. 시진핑 중국 국가 주석이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만나서 ‘한국은 역사적으로 중국의 일부였다’는 주장까지 하게 된 배경은 바로 남한의 강당사학자들까지도 중국 입장을 그대로 따라 하는 것에 자신감을 가지고 한 얘기라고 볼 수 있다. 우리가 이런 잘못된 연구 경향이나 연구 현황을 개선하지 않으면 우리나라가 상당히 어려운 경기에 처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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