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이족에 대해서... 동이족이 뭐냐고 물어보면 선뜻 답변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럴 때는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바라보는 것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더 쉬울 수 있다. 예를 들어 중국의 고대 역사서 중에 고대 4사(사마천의 사기, 반고의 한서, 진수가 쓴 삼국지와 후한서) 중에 삼국지와 후한서에 동이열전이라는 구분이 나온다. 동이열전 속에 부여, 고구려 같은 나라들이 들어가 있다. 그렇다면 중국 사람들이 볼 때 ‘동이’는 우리의 부여, 고구려, 예, 읍루라든지... 이런 우리의 고대 국가들을 동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중국의 ‘백도백과’라든지 중국의 사이트에서 ‘동이’를 찾아보면 지금의 산동반도에 있던 고대 민족이다. (삼국지나 후한서 같은 고대 중국 역사서에서 말하는 동이는 부여, 고구려 등의 나라들인데) 지금 중국의 역사 전문 사이트에서 설명하는 ‘동이’는 지금의 산동반도에 살았던 고대 민족으로 등장한다. 이것은 동이족의 이동설로 해석을 하면 이해가 가는 것이다.
동이족의 뿌리를 찾는 것은 쉬운 문제는 아니다. 그런데 체계적으로 찾아보면 동이족과 대비되는 민족 개념이 하화족이다. 하화족은 오늘날 중국집 이름 중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중화반점’의 ‘중화’할 때 ‘화’가 ‘하화족’의 ‘화’자이고(중국의 화산이라는 산에서 ‘화’자를 따고), 중국 고대 국가의 순서에 등장하는 ‘하은주’에서 하나라에서 ‘하’자를 따서 ‘하화’라고 부르는 것이다.
사마천은 중국사의 시작을 동이족 집단인 치우와 하화족 영수인 황제와 싸움으로 시작한다. 중국인들은 사마천이 사기에서 말한 황제를 현재 중국인들의 공통의 조상으로 여기고 있다. 이것은 사마천이 사기를 편찬할 때 고민을 많이 한 것이다. 사마천의 사기는 제일 처음에 ‘오제본기’부터 시작한다. 오제본기는 고대의 다섯 개 왕(황제, 전국, 제곡, 요, 순)이 있었고, 다섯 명의 제왕 다음에 하나라가 시작하고, 이것이 은나라, 주나라로 이어져서 춘추전국시대가 돼서 진니라의 통일 시기를 거쳐서 한나라(사마천이 살고 있던)로 이어졌다. 이것이 사마천의 역사인식이다. 문제는 사마천이 사기를 편찬하기 위해서 몇 가지 계보를 조정하였다. 정확하게는 왜곡한 것이다. (한가람 역사연구소에서 사기를 간행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다)
중국에서도 요즘 내놓고 동이족 역사를 인정하기 시작하였다. 대단히 중요한 변화이지만 그만큼 중국이 자신감을 가졌다는 말이다. 산동반도에 있던 역사를 ‘동이족의 역사’라고 긍정하는데, 중국의 산동성 내에 동이족 역사의 중심지가 두 지역인데, 하나는 산동성 북부의 곡부라는 곳(공자의 고향)이다. (공자는 자신이 동이족 은나라 사람의 후예라고 말한 것이 사기 공자세가 유언이 나와 있다) 공자의 고향인 곡부가 산동성 북부 동이족의 중심지였다고 한다. 이 곡부의 북쪽에 ‘소호의 릉’이 있다. 또 하나 동이 문화의 중심지는 산동성 남부의 임기시다.
임기시에 ‘동이문화박물관’을 만들어 놓았는데, 거기에는 동이 영웅이라고 해서 네 명의 군주를 크게 전시해 놓았다. 4명의 군주가 ‘태호 복희씨’, ‘소호 김천씨’, ‘치우’, ‘순임금’을 ‘동이 영웅’이라고 표시하고 있다.
그 중에 ‘소호 김천씨’는 황제의 적장자이다. 황제는 사마천이 중국사의 시조로 삼았던 인물로, 누조라는 여인에게서 두명의 아들을 낳았는데 장남이 소호, 차남이 창의로 나온다. 황제의 적장자(왕위 계승자)인 소호가 동이족이면 그 아버지는 한족이지 않을까? 이것이 바로 중국 사람들의 큰 고민이라고 볼 수 있다.
소호가 동이족이라는 것은 너무나 명확한 사실이고, 그것은 우리 역사서에도 나온다. 삼국사지 김유신 열전에 김유신이 계보가 나오는데 ‘김유신은 헌원과 소호의 자손이다’라고 되어 있다. 헌원이 황제이기 때문에 김유신은 황제 헌원씨와 소호 김천씨의 자손인 것이다. 이것은 삼국사기에 나오는 김유신 비문이기 때문에 신라 사람들은 자기네 조상을 황제와 소호의 후손으로 보았던 것이다. (김유신의 조상인) 가야 사람들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김유신이 황제와 소호의 후손이면, 황제도 동이족이라는 말이 되는데, 황제가 동이족이란 것은 여러 계보를 공부해보면 나오는 것이다. 그런데 보통 일반 사람들은 황제가 동이족이라는 사실은 모르고 있다. 대신에 치우가 동이족이라는 것은 많이 알려져 있다. 사기에 ‘치우’는 ‘구려족의 영수다’라고 나오는데 구려족이 동이족이라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사마천의 입장에서 보면, 사마천이 중국의 시조부터 한나라에 이르는 중국사의 계보를 만들어야 하는데 찾아보니까 다 동이족이라는 사실로 고민하였다. 사마천이 고민 끝에 만들어낸 것이 동이족으로 너무 명확한 치우와 싸웠던 황제를 하화족으로 만들려고 해서 황제를 시조로 하는 ‘오제본기’를 쓰게 된 것이다. 사마천은 하화족의 시조인 황제와 동이족의 시조인 치우가 싸운 것이 중국사의 시작으로 만든 것이다. (황제부터 시작하는 계보가 오제를 이어서 춘추전국시대를 거쳐서 진나라와 한나라까지 이어지는 중국사의 계보를 설명한 것이고 그것이 성공을 거두어서 현재의 중국인들 대다수가 사마천이 만든 그 구조대로 인식을 하고 있다)
사마천이 사기의 시작을 오제부터 시작한 것에 대해서 반대하는 중국학자들도 많다. 사기 주석에도 나온다. 그것은 ‘삼황’의 존재 때문이다. 중국은 삼황이 먼저 시작했고, 오제는 삼황의 뒤를 이은 임금들이라는 것이 중국인들의 일반적인 역사 인식이다.
사마천은 왜 삼황을 삭제했을까? 삼황은 보통 ‘태호 복희씨’, ‘염제 신농씨’, ‘황제 신농씨’를 말한다. 그런데 중국의 지금 임기시에 있는 ‘동이문화박물관’에서 태호 복희씨는 동이 영웅으로 보고 있으니 ‘태호씨’가 동이족인 것은 너무나 명확한 것이다. 그런데 사마천이 삼황부터 인정하면 동이족의 역사가 되니까 ‘태호 복희씨’와 ‘염제 신농씨’를 지우고 삼황인 황제를 ‘오제’의 시작으로 만든 것이다. 중국의 다른 고대 사료들은 황제의 자리를 소호 김천씨가 이었다고 나온다. 그런데 사마천은 소호 김천씨가 동이족인 것이 너무 명확하니까 이것은 지우고 황제의 제위는 황제의 손자인 전욱이 이었다는 계보를 만든 것이다. 이러한 계보가 현재 중국 사람들이 자기 자신들이 동이족과 다른 하화족이라고 인식하게 된 뿌리가 된 것이다.
중국에서도 ‘태호 복희씨’와 ‘소호 김천씨’, 그리고 ‘순임금’도 동이족으로 인정하고 있다. 순임금에 대해서는 맹자가 순임금이 동이족이라고 명확하게 이야기 했다고 한다.
역사를 조금만 더 깊이 연구해 보면 중국사라는 것이 사실은 전부다 동이족 역사의 일부를 떼다가 하화족의 역사를 만든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중국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동이족의 역사를 사마천이라는 역사학자가 삼황오제 중에 삼황을 다 없던 것으로 만들고 삼황의 마지막인 황제 헌원이 오제의 시작이고, 황제와 치우가 싸운 것은 동이족 내부의 다툼인데 동이족과 하화족의 다툼으로 사마천이 바꾼 것이다. 사마천은 황제의 아들을 쓸 때 큰 아들이 소호인데 소호는 동이족인 것이 너무나 명확하니까 (소호의 이름은 청향, 현효라는 이름으로도 등장한다) 황제의 큰아들을 현효라고 언급한다. 그래서 조금만 공부를 해 보면 사기에 의해서도, 중국의 고대사라는 것이 대부분 동이족의 역사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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