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존에 우리가 배우고 있는 역사는 어느 정도 사실일까?
『이덕일의 한국통사 - 선사시대-대한제국편』(다산초당, 2019)는 역사학계에서는 보기 드물게 대중적인 인지도를 갖고 있는 역사학자 이덕일의 야심작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는 서설에서 밝히듯이 중화 사대주의와 친일 식민사학의 관점이 수두룩한 현행 국사 교육에 대한 비판에서 이 책을 서술하기 시작했다고 밝힌다. 그리고 광복 이후에 북한 역사학과 남한 역사학이 걸어온 길을 언급하면서 해서 ‘낙랑군=평양설’을 폐기하고 ‘낙랑군=요동설’로 정리했다는 것을 언급해준다(6~8쪽). 이것은 한사군이 한반도에 있었다는 사실을 근본적으로 부인하는 것이다.
또한 우리가 삼국시대를 배우면서 귀에 못이 박힐 정도로 들었던 요동, 요서의 경계인 요하의 위치 역시 기존에 알고 있던 랴오허강이 아닐 수도 있다는 주장도 소개하고 있다. 그런데 이것을 단순한 주장이 아니라 고대 중국의 역사서에 언급된 내용을 가지고 소개하고 있다.
후한의 정사인 《후한서》 〈군국지〉에는 “열은 강 이름이다. 열수는 요동에 있다”라고 말하고 있다. 낙랑군 열구현은 열수라는 강의 하구에 있어서 붙은 이름인데, 열수라는 강은 요동에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남한 강단사학은 요동에 있었다는 열수를 아무런 사료적 근거도 없이 대동강이라고 주장한다(59쪽).
“중국의 고대 사료는 모두 낭락군이 고대 요동에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지금의 평양에 있었다고 말하는 사료는 없다.” (60쪽)
한편으로 고구려 동천왕 재위 16년(242)에 후한의 요동 서안평을 공격했는데, 이때 서안평을 남한 강단사학계는 압록강 대안 단동이라고 주장하지만, 중국의 《요사》는 지금의 내몽골 파림좌기라고 말하고 있다(71).
이 책에서는 우리에게는 조금 허무맹랑한 주장이라고 생각될 수도 있는 ‘대륙 백제설’과 ‘대륙 신라설’도 언급하고 있다(92-93쪽). 물론 근거 없는 주장이 아니라 당시 중국의 역사책, 《북사》ㆍ《북제서》ㆍ《수서》ㆍ《구당서》 등을 언급하고 있다. 그 중에서 《삼국사기》의 천문 관측 기록들은 당시의 경상도가 아니라 몽골, 북경, 양자강 유역에서의 관측과 맞아떨어진다는 설명은 나름 설득력을 갖고 있다.
이덕일은 나아가서 고려와 조선 시대의 영토 문제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고려 말에 중국을 통일한 명나라가 설치했더 ‘철령위’가 함경남도가 아닐 수도 있다는 주장도 한다. 명나라의 정사인 《명사》에서는 ‘철령위’를 오늘날 압록강 서쪽에 있는 봉집현(奉集縣, 현 심양 남쪽 진상둔진 봉집보)라는 견해도 있다고 소개한다(295쪽).
남북한이 주장하는 서로 다른 고구려의 건국연대
북한은 고구려의 건국연대를 《삼국사기》 기록보다 끌어올리고 있다. 고구려가 서기전 277년에 고주몽에 의해 건국되어 서기 668년에 멸망했다고 보는 것으로, 서기전 37년이라는 《삼국사기》의 건국연대보다 240년 정도 앞서 보고 있다. 북한은 고구려를 둘로 나누어 본다. 하나는 고구려 전사(前史)로서 고조선의 후국 구려국을 설정했다. 구려는 서기전 15세기 중엽 고조선이 전ㆍ후조선 왕조가 교체될 때 고조선에서 분리되어 독자적인 왕국이 되었다. 서기전 10세기 중엽부터 노예 소유자적 제도 대신 봉건제도가 점차 확대되기 시작해서 서기전 3세기 초에 새로운 봉건세력의 대표이자 해모수와 유화의 아들인 주몽이 서기전 277년에 건국했다는 것이다. 《삼국사기》 편찬자가 고구려 건국연대를 늦췄다는 것인데 몇 가지 근거가 있다. 하나는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마지막의 “논하여 말하다”에서 “고구려는 秦(진)ㆍ漢(한) 이후 중국의 동북 모퉁이에 끼어 있었다”고 말한 부분이다. 춘추전국 시기의 秦(진)은 서기전 905~서기전 221년이고 통일제국 秦(진)은 서기전 221~서기전 207년이다. 한 제국은 서한(전한)은 서기전 202년~서기 9년까지인데, 《삼국사기》의 위 구절은 고구려가 서기전 3세기에 존재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는 근거가 된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광개토대왕릉비는 광개토대왕을 추모왕의 17세손으로 쓰고 있는데 《삼국사기》는 12세손으로 축소해서 쓰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사실들을 토대로 고구려의 건국연대가 축소되었다고 보고 있다. [『이덕일의 한국통사 - 선사시대-대한제국편』(다산초당, 2019), 75]
고구려 역사에 조금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라면 고구려의 제6대 국왕인 태조왕(47~165년)이 119살을 살았고 재위 기간도 93년에 달한다는 사실(121년부터는 차대왕이 대리청정)과, 제7대 차대왕(71~165년)과 제8대 신대왕(89~179년)이 태조왕의 동생으로 등장하는 사실에 대해서 의문점을 가질 수 있다. 물론 나이 차이가 너무 나는 바람에 이복동생이나 서자, 혹은 신대왕이 태조왕이나 차대왕의 아들이라는 학설도 있다. 단재 신채호는 이런 상황이 고구려의 건국 연대를 축소하면서 생긴 결과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규원사화》나 《환단고기》의 문제
향후 남북한이 활발하게 교류하게 될 때 학문적 성과도 교류가 될 텐데 역사학계에서는 상당한 혼란이 생길 가능성이 있다. 근현대사에서는 이념적인 측면에서 사회주의 계열에 대해서 소홀하게 취급한 것이 어떻게 인식되고 다루어질 것인지도 궁금하다. 아울러 남한에서는 위서라고 판단한 《규원사화》나 《환단고기》에 대한 입장도 북한의 입장과 다르기 때문에 상당한 진통이 따를지도 모르겠다.
《규원사화》는 조선 숙종 2년(1675) 북애노인이 편찬했는데, 왕검부터 고열가까지 47대 단군의 재위기간과 치적 등을 기록한 역사서다. 1972년 국립중앙도서관 고서심의위원이자 당대의 저명학자들이었던 이가원, 손보기, 임창순 3인이 《규원사화》의 내용과 지질을 분석 심의한 결과 조선 중기에 쓰인 진본임을 인정했다. 그러나 남한 강단사학계는 반박논리도 제시하지 않고 위서라고 배척하고 있다. [『이덕일의 한국통사 - 선사시대-대한제국편』(다산초당, 2019), 44-45.]
한가지 추가적으로 걱정되는 것은 남과 북이 서로 통일되지 않은 상황에서 일본의 역사왜곡과 중국의 동북공정이 혼합되어 어느 것이 팩트고 어느 것이 소설인지를 분간하기 힘든 상황이 지속적으로 전개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이다.
향후 우리나라의 역사학계는 식민사관의 극복과 일본 및 중국의 역사 왜곡에 대항할 수 있도록 내공을 키우는 동시에 북한에서 연구되고 있는 역사적인 결과에 대해서 접근 가능하고 대화 가능할 수 있도록 면밀하게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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