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덕일의 한국통사] 한국통사 출간 배경 다시 찾는 7천년 우리역사 이야기 선사시대부터 대한제국까지 일제 조선총독부 역사관에서 독립운동가들 역사관 한 권의 책으로 담아 이야기 #1
광복 이후 70년이 지났는데도 우리나라 역사학 인식체계는 왜 아직도 식민사관이란 비판을 받을까?
‘식민사관’이란 한마디로 조선총독부 역사관이라는 뜻이다. 조금 더 큰 틀에서 말하면 ‘황국사관’(일본 천황을 중심으로 역사를 고대사부터 근현대까지 바라보는 황국사관)의 일부가 식민사관이고, 식민사관을 압축하면 조선총독부 역사관이며 우리는 그 역사관의 체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일본이 우리나라를 점령하고 나서 보니까 지배하기가 아주 힘든 것을 발견하였다. 일제강점기 때 한 서양인의 눈에 ‘지배당하는 한국인들은 도포 입고 팔을 휘휘 휘저으면서 걸어다니는 데, 일본인들은 종종걸음을 걷는’ 모습이 포착되기도 하였다. (세계 사람들이 잘 이해를 못하는 것이 남한이랑 북한은 일본을 한 수 아래로 본다는 것이다. 아마도 세계에서 일본을 제일 우습게 여기는 민족이 한민족일 것이다) 이렇게 일본인들에 대해 한국인들이 우월감을 갖고 있는 뿌리에는 ‘역사’가 있다. 그래서 일본은 한국인들이 갖고있는 역사학을 거꾸로 바꿔 놓지 않으면 한국을 영구히 점령하기 힘들 것으로생각하고 식민사관을 만들어 퍼트린 것이다.
그 식민사관의 원 뿌리는 ‘정한론’(한국을 정벌하는 논리)에서 시작된다. 일본은 대한제국을 점령하자마자 조선총독부 산하에 중추원이란 곳이 있는데, 거기에 ‘조선반도사 편찬위원회’라는 조직을 만들었다. 역사는 그 용어에 해답이 70~80% 들어가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조선반도사’라는 말에서 ‘조선’이란 말은 조선왕조가 아니라 우리 역사 전체를 뜻하는 것이다. 그 당시까지 우리 역사의 무대는 대륙이었고, 반도는 물론이고 해양까지 포괄하는 대륙성과 해양성의 역사였다. 그런데 일본이 점령 직후에 만든 ‘한국사 전반을 편찬하는 기관의 이름’을 ‘조선반도사 편찬위원회’라고 한 것에서 그 의도가 들어가 있다고 볼 수 있다.
조선반도사 편찬위원회에서는 처음부터 대륙을 우리 역사에서 삭제하고 해양을 다 삭제한 반도사를 편찬하기 시작했다. 해방 이후 지금까지 검인정 교과서, 국정 교과서, 그리고 앞으로 나올 교과서도 나오나마나 조선반도사 조선총독부에서 만든 조선 반도사의 아류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구조가 어떻게 나왔나? 해방 70년이 훨씬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조선반도사의 아류가 왜 한국 사회에서 마치 주류인 것처럼 행세를 할까? 그런 문제를 이해하려면 해방공간의 역사학계 동향을 알아야 한다.
해방공간이라고 하는 말은 보통 1945년부터 정부가 수립되는 1948년까지 3년간을 해방공간이라고 표현하는데 우리는 6.25 전쟁 시기까자 확대해서 볼 필요가 있다.
해방공간에 역사학계 흐름이 세 흐름 정도가 있었다. 1) 민족주의 역사학자들. 이들은 독립운동가 겸 역사학을 했던 분들이 주축이 되어 있다(백암 박은식, 석주 이상룡, 단재 신채호, 무원 김교헌). 이들은 당대 최고의 학자들이었다. 무언 김교헌 같은 분은 규장각 부제학을 지냈는데 당대 최고의 학자들만 갈 수 있는 조직이었다.
이들은 동아시아사와 한국사에서는 필수인 한문을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었다. 이들이 독립운동에 나서는 논리가 바로 역사학이었다. 이들은 독립전쟁 와중에 돌아가셨고, 위당 정인보 선생이나 민세 안재홍 등으로 계승되었다. 그러나 이들도 6ㆍ25을 거치면서 납북되어 사실상 대한민국에서 사장되었다. 이들 독립운동을 계승하는 역사학을 배우는 역사학과가 하나도 없다. 외국에서 보면 이해가 안 가는 것이다.
예를 들어 프랑스의 역사학자 마르크 블로크 같은 사람은 『역사를 위한 변명』이라는 책을 썼는데, 레지스탕스였고 나치에 저항하다가 죽었다. 그는 봉건사회를 연구한 고대사학자다. 일제강점기 시절 한국과 중국을 전전하면서 역사학을 했던 단재 신채호와 비교될 수 있을 것이다.
250억의 국가예산을 마음대로 주무르는 한국학중앙연구원의 한국학진흥사업단이라는 기구의 단장(권희영)이 공개 학술대회 석상에서 “단재 신채호는 세 자로 말하면 또라이고, 네 자로 말하면 ‘정신병자’다”라는 발언(망언)을 했다고 한다. 그 자리에 있던 학자들이 그 발언에 대해 아무도 공개적으로 항의를 하지 않았다는 것은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다. 만약 프랑스에서 마르크 블로크를 이렇게 표현했다가는 바로 매장당할 것이다. 이것이 민족주의 역사학계가 오늘날 어떤 대접을 받고 있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한국의 주류 역사학자에 의해 ‘정신병자’ 또는 ‘또라이’ 취급을 당했다. 실제로 한국학진흥사업단 단장으로 1년에 250억 원이라는 막대한 한국사 관련 예산권을 쥐고 있었고, 문제 많은 교학사 교과서 대표집필까지 한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권희영 원장이 어느 공개 학술회의장에서 다음과 같이 단재 신채호 선생을 폄하하는 막말을 해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신채호는 네 자로 말하면 정신병자이고, 세 자로 말하면 또라이입니다.”
2) 두 번째로 맑시스트 역사학자들이 있다. 이들은 사회경제사적 입장에서 역사를 저술하였기 때문에 사회경제 사학자들이라고 말한다. 미군정이 시작되고 가장 잘못한 것은 친일파를 끌어들인 것인데, 특히 친일경찰들을 그대로 기용한 것이다. 친일경찰들이 독립운동가들을 또 다시 체포하고 고문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분단이 되고 북한에서 ‘오도임시위원회’가 만들어지고 위원장인 김일성이 남한에 파견원을 보내서 주요한 역사학자들을 초청하였다. 앞으로 종합대학을 만들 것인데 교수원이 필요하다는 말과 조선역사편찬위원회를 만들 것인데 여기(북한)로 와서 역사를 연구하지 않겠느냐는 제안이었다고 한다. 당시 남한 미군정에 실망했던 맑시스트 역사학자들 중 상당수가 이 당시에 월북하였다고 한다(백남운, 박시영, 김석형, 이청원, 전석담). 이들로 김일성대학의 사학과가 만들어지고, 조선역사편찬위원회가 만들어져서 ‘력사제문제’라는 학술지를 발간하게 된다.
당시에 발간된 논문들을 살펴보면, 1947년 당시에 일제 식민사관의 논리를 비판하고 극복의 과제로 삼은 것을 볼 수 있다.
3) 조선총독부의 식민사학자들. 남한에 있던 민족주의 역사학이 미군정과 6ㆍ25의 기간에 사라지고, 맑시스트 역사학자들이 월북한 뒤에 남아있는 것은 ‘식민사학자들’이다. 당시 조선사편수회에서 근무하고 있던 식민사학자들은 이병도, 신석호 등이었고 이들은 분단시대의 최대수혜자들이다. (이병도는 당시 진단학회에 속해 있었는데, 진단학회에서도 너무 친일행적이 뚜렷해서 제명운동이 일어날 정도였다고 한다) 이들은 미군정과 6ㆍ25 와중에 살아남아서 한국의 역사학계를 장악하게 된다.
역사학의 분야에는 보수ㆍ진보도 없고 좌ㆍ우도 없다. 전세계에 유일한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고대로부터 근현대까지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이 하나여야 한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분절적인 역사관이 너무 많다. 근현대를 바라볼 때는 상당히 진보적으로 바라보는데 조선시대만 가면 이완용이 마지막 당수인 노론(당론으로 나라를 팔아먹음)을 찬양하고, 그 다음 고대사로 가면 총독부가 만든 총독부 역사관을 찬양한다. 독립운동가의 역사관, 즉 백암 박은식의 역사관이라든지, 석주 이상룡, 단재 신채호의 역사관을 이야기하면 죽이려고 달려든다.
무엇인가 잘못을 했을 때 잘못이 얼마간 시간이 흐르면 비판을 받고 벌을 받아야 되는데 잘못한 사람이 계속 상을 받으니까 총독부 역사관이 마치 진리인 것처럼 전파되고 있는 상황이다.
박근혜 정권 때 만들려고 했던 국정교과서의 문제를 보면, 역사관 자체는 다양한 역사관이 충돌하는 게 정상이다. 서로 상호 대화하면서 합의를 이뤄나가는 것이 정상이다. 그런데 하나의 역사관을 가지고 학생들을 가르친다는 것은 대단히 잘못된 것이다. 그런데 국정이냐 검인정이냐 체제의 문제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 안에 어떤 내용이 담겨져 있는가가 더 중요하다고 본다. 이번에 교과서가 나오면 사실 근현대 부분 조금 달라지는 것 외에는 큰 차이가없을 것이 뻔하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집필한 사람이나 그걸 기획한 사람들이나 다 그 구조 속에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해방 이후 1953년하고 2018년의 경제력을 비교해 보면 국내총생산(GDP)는 1,200배 성장을 했다. 1인당 GNP도 500배의 성장을 보였다. 우리 사회의 물질이 풍부해 졌는데 정신 세계는 여전히 총독부 역사관이 장악하고 있다는 게 말이 안되는 것이다.
이 부분을 정리해야 되겠다고 생각하고, 독립운동가들의 역사관을 주축으로 삼고 각종 사료를 바탕으로 해서 『이덕일의 한국통사』를 펴낸 것이다. 이 책을 펴낸 근본 이유는 지금 우리 사회에서 사장된 독립운동가들의 역사관으로 한국사를 한 번 고대부터 지금까지 바라보아야겠다는 생각으로 편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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