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에 저항하는 노예 부대를 이끈 검투사의 이야기. 칼 마르크스는 그를 ‘고대사에서 가장 빛나는 인간’이라고 말했다. 그의 이야기는 거대한 불의에 맞서는 용감한 개인의 이야기가 되었고, 1960년 스탠리 큐브릭에 의해 영화로 제작되었다.
“스파르타쿠스”
우리는 그에 대한 전설과 사실을 구분할 수 있을까?
“궁금한 건 스파르타쿠스처럼 신분이 낮은 사람이 어떻게 2년 넘게 버텼느냐 하는 겁니다. 그것도 고대사에서 가장 막강했던 제국을 상대로요. 남아있는 자료는 수수께끼 같았죠. 난 뼈대만 있는 이야기에 살을 붙여보고 싶었습니다.” [마크 코비(군사 역사학자)]
로마인들에게 그는 노예이자 반란군의 지도자였으며 야만인으로 알려졌다. 그는 오늘날 불가리아에 해당하는 트라키 출신으로 기록되어 있다.
# 로마의 노예들
그 당시 전쟁의 포로로 끌려온 노예는 로마 전체 인구의 1/3을 차지하는 200만명이었다고 한다. 그들은 빛이 들지 않는 지하 숙소에서 최고 400명의 노예들이 이름도 없이 지내기도 했다. 스파르타쿠스는 2년 전 시칠리아 노예 반란을 알았을 것이다. 당시 그 반란은 로마를 불안하게 했었다.
“노예제도는 본질적으로 폭압적인 제도입니다. 노예는 매질을 당하거나 십자가에 매달리거나 사형당하거나 채찍질 당했죠. 매일 그런 일을 당한 건 아니지만 무서운 일이었습니다. 두려움이 노예들의 목숨과 정신을 지배했습니다. 그리고 주인들도 노예들을 두려워했던 것 같습니다. 서로가 적이었던 거예요.”
[키이스 홉킨스(캠브리지대학교 고대사 교수)]
로마인들에게 노예들은 내부의 적이었으나, 존재감이 없는 인간들이었다. 노예가 인간적인 대접을 받는 일은 드물었다. 하지만 단 한 곳, 검투장에서는 노예도 인간과 같은 대접을 받았다. 로마에서는 장렬히 싸우다 죽는 것을 최고의 미덕으로 쳤으며 설령 노예라도 예외는 없었다.
# 검투사 노예
검투 시합은 위대한 사람의 장례행사 중 일부로 치뤄지던 것이 발전한 것이었다. 로마인들은 검투 시합을 좋아하면서도 검투사들을 무시했다. 검투사들은 죄수나 창녀처럼 낮은 신분의 인간이었다.
“고대 검투사의 신분은 아주 독특했습니다. 검투장 안에서는 로마인들의 숭배를 받았지만 신분상으로 아주 낮았습니다. 수치스러운 신분이었고 시민권은 없었어요. 그는 범죄자처럼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았죠. 검투시합에 나가 싸우는 건 일종의 벌이었습니다. 로마인들을 즐겁게 해주는 벌을 받은 거였죠.”
[마리아 와이크(레딩대학교 교수)]
# 스파르타쿠스
스파르타쿠스는 오늘날 불가리아에 해당하는 트라키(Thrace) 출신으로 침략군인 로마에 맞서 용감히 싸웠다고 한다. 그는 싸움을 시킬 검투사에 적합한 인물이었다. 그는 로마로 팔려가지 않고 수백 킬로 남쪽에 있는 도시, 카푸아(Capua)로 팔려갔다.
카푸아에는 아주 중요한 로마의 검투사 유적지가 있으며, 그 당시 로마 검투 시합의 중심지였다. 경매에서 스파르타쿠스를 산 사람은 ‘랜틸루스 포티아누스’로 카푸아에서 검투사를 양성하던 사람일 것으로 추측된다. 검투사 양성소에서는 트래키인, 갈리아인, 독일인들을 언어와 문화별로 따로 격리시켰다. 그곳에서 노예들은 자신들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검투사가 되었을 것이다.
“다른 검투사와 친구가 되고 싶지는 않았을 겁니다. 다음날 경기장에서 만날지도 모르니까요. 살기 위해선 그를 죽여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스파르타쿠스의 이야기를 보면 그는 동료 검투사들과 검투사 양성소를 탈출했는데 이것은 뭔가 다른 걸 의미합니다. 그는 검투사 양성소에서 문제를 극복하고 유대감을 찾아낸 거죠.”
[마리아 와이크 (레딩대학교 교수)]
# 스파르타쿠스 반란의 시작
BC 73년, 스파르타쿠스는 검투사 양성소에서 70명의 검투사들과 함께 급조한 무기를 가지고 순식간에 탈출하여 해발 1,200m의 베수비오 산으로 숨어들었다. 산 아래에는 방종과 타락의 도시, 폼페이가 있었는데, 폼페이는 비교적 방어가 허술한 편이었다. 그리고 이 도시에도 커다란 원형 경기장이 있었고 검투사 노예들이 다수 있었다.
이 소식을 접한 검투사들, 노망친 노예들, 그 지역에서 토지를 빼앗긴 갈 곳 없는 주민들... 로마에 불만을 품은 사람들이 베수비오 산으로 모여들었다. 오랫동안 핍박받아온 그들은 스파르타쿠스에게서 새로운 지도자의 모습을 발견했다.
“스파르타쿠스는 다양한 사람들을 끌어 모았습니다. 그 중심에는 검투사가 있고 도망친 노예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다음에 모인 사람들은 그 지역에서 토지를 뺏긴 갈 곳 없는 주민들이었죠. 자기 땅을 갖지 못한 사람들이 봉기에 참여한 겁니다.”
로마에서는 스파르타쿠스와 그의 동료들을 잡기 위해서 3천 명의 로마 군사를 동원하였다. 로마군은 승리를 자신했지만 스파르타쿠스는 공격의 타이밍 센스가 좋았으며, 그의 무리가 자리 잡은 산 위에서는 캄파니아 평원이 한 눈에 보여서 적의 움직임을 쉽게 파악할 수 있는 유리함이 있었다. 유리함을 최대로 활용한 스파르타쿠스의 반란군은 로마군의 배후를 공격하여 로마군을 당황스럽게 했으며 로마군을 도망치게 만들었다.
# 남쪽으로...
승리를 자신하며 파견했던 로마군이 반란군에 패하자, 로마 원로원은 도끼 상징물(로마의 법을 어긴 자는 사형에 처한다는 의미)을 당당하게 앞세우며 이 전의 두 배에 달하는 6천명의 로마군을 파견한다. 하지만 이들 역시 격퇴당하고 도끼 상징물까지 스파르타쿠스 부대에게 빼앗기고 만다.
스파르타쿠스는 베수비오 산에 안주하지 않고 남쪽의 작은 마을로 재빨리 이동을 시작했다. 그는 전리품들을 모든 대원들과 공평하게 나눠가짐으로써 로마군 장군들과는 다른 형태의 새로운 지도자의 모습을 보여주었으며,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개념의 전쟁을 치르고 있었던 것이다.
이탈리아 반도의 남쪽, 로마로부터 560km의 거리에 있는 ‘메타폰툼’(Metapontum)은 바다와 접해있고 가파른 언덕이 앞을 막고 있어 방어에 적합했으며, 풍부한 식량을 공급할 수 있는 평야지대였다. 스파르타쿠스는 이곳에 도착하여 겨울을 지냈으며, 이곳에서 노예들은 전사가 되었다. 마침 이 곳으로 전리품을 사기위한 장사치들이 몰려왔고, 스파르타쿠스와 그의 동료들은 전리품을 팔아서 무기와 갑옷을 제작하였고, 훌륭한 군인으로 단련하기 위한 훈련을 시작했다. 그들이 사용한 무기는 ‘글라디오스’라는 단검으로 길이는 56cm, 무게는 약 1.4kg 정도였다.
스파르타쿠스의 부대는 여러 나라 출신이 모여들었기 때문에 그들을 단련시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갈리아인과 셀틱인들은 처음으로 그에게 이의를 제기하였다. 그리고 크릭서스가 이끄는 독일인들도 그에게 저항했다. 그들은 노략질하는 것을 더 좋아하는 다루기 힘든 집단이었다.
“이데올로기도 교리도 없었으며 공통의 규범도 없었습니다. 스파르타쿠스의 리더십은 약간 약했습니다. 그는 정규군의 장군 같은 사람이 아니었고 인간성으로 집단을 이끄는 리더였습니다. 하지만 문화가 다른 독일인들은 그에게 대항했죠.”
[키이스 홉킨스(캠브리지대학교 고대사 교수)]
# 자유를 향하여... 알프스를 향하여...
스파르타쿠스는 자기의 지휘가 불안함을 느끼고, 노예 반란군들에게 공통된 목표를 만들어주기로 결심한다. 스파르타쿠스는 로마군을 기다리지 않고 북쪽으로 진군을 시작했다. 그는 알프스 산맥을 넘어 고향으로 가기로 결심한 것이다. 독일인들도 이 계획에 동의했지만, 행군은 자기들끼리 하겠다며 무리에서 떨어져 행군을 했다. 그러나 가르가노 산(Mt. Garganus)에서 매복 중인 로마군의 공격을 받고, 리더인 크릭서스를 포함해서 독일인 2천명이 잔혹하게 죽임을 당하게 된다.
라이벌이자 자신의 지도력에 대항했던 크릭서스를 위해서 스파르타쿠스는 그를 추모하는 검투시합을 개최했다. 그 시합의 검투사는 바로 포로로 잡힌 로마 군인들(로마군 포로는 300명)이었다. 로마인들보다 더 로마인다워진 반란군의 이러한 모습에 로마인들은 두려움을 느끼기 시작했다.
“악몽 같은 적이었습니다. 그는 비천한 신분이었지만 뛰어난 머리와 용기가 있었습니다. 로마인들만의 특성이라고 여겼던 능력이었죠. 로마인들은 자신들 문명이 우수하다고 생각했는데 스파르타쿠스가 그들의 모든 가치관에 도전하면서 노예인 내가 진짜 영웅이라고 말하는 듯했죠. 그건 정신적으로 굉장한 위협이었습니다.”
당시에 로마군은 변경에서 외국의 군대와 싸우느라 정신이 없었다. 이탈리아 내부에는 스파르타쿠스에게 대항할 뛰어난 군대가 없었다. 하지만 이탈리아 반도의 북쪽을 맡고 있던 ‘카이오스 카시우스’가 이끄는 로마군은 이탈리아에 있던 기존의 로마군들과는 다른 뛰어난 군인들이었다. 스파르타쿠스가 이끄는 2천명의 반란군은 알프스 산맥 앞, ‘무티나’(Mutina. 지금의 모데나)에서 ‘카이오스 카시우스’가 이끄는 로마군과 만난다. 지금까지 만났던 로마군과는 달랐지만 스파르타쿠스의 반란군은 ‘카이오스 카시우스’의 로마군마저 무찔렀다.
그들은 알프스 산맥 너머의 자유를 눈 앞에 두었다. 그러나 승리의 순간을 누린 뒤 그들은 자유를 향해 나가지 않았다. 그들은 다시 남쪽으로 내려가 로마를 점령하고 싶었다. 원래 알프스 산맥을 넘어 고향으로 가려했던 이들 무리는 승리에 도취되었고, 약탈의 맛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스파르타쿠스와 함께라면 지지 않을 것이라 확신하였고, 다시 발길을 돌려 이탈리아 반도의 남쪽으로 진군을 시작한다.
“그들은 이제 약탈의 맛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알프스를 넘어 미개한 고향으로 간다는 게 별로 내키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떠나고 싶지 않았고 로마로 돌아가고 싶었습니다. 스파르타쿠스는 그들을 설득할 수 없었고 막을 수도 없었죠.”
[마크 코비(군사 역사학자)]
“그는 고민했을 겁니다. 보잘 것 없는 인간으로 돌아갈 지도 몰랐으니까요. 장군의 지위 같은 지금의 자리를 유지하는 방법은 전투를 독려하고 부대를 지휘를 하면서 자신의 군대를 하나로 묶어두는 것뿐이었죠.”
[키이스 홉킨스(캠브리지대학교 고대사 교수)]
# 로마군의 반격, 마르쿠스 리시니우스 크라수스
다시 남으로 진군을 시작한 스파르타쿠스의 무리들에게 로마는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이때, 로마 정치계에 입문하기 위해 전장에서 승리한 경험이 필요했던, 로마의 부호 ‘마르쿠스 리시니우스 크라수스’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막대한 돈으로 6군단의 군인을 모집해서 로마를 방어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공성 무기가 없는 스파르타쿠스는 로마를 직접 공격하지 않고 외각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피체눔’(Picenum)에서 크라수스의 로마군과 전투를 벌여 승리를 거둔다. 승리를 갈망하고 있던 크라수스는 고대 로마의 처벌인 ‘데시메이션’을 부활시킨다. ‘데시메이션’이란 고대 로마에서 겁쟁이에게 내리던 벌로 10명마다 1사람씩을 뽑아 처형을 하는 무서운 형벌이었다. 이 형벌로 4천명의 로마군이 같은 로마군 전우들에게 맞아서 죽음을 당한다. ‘데시메이션’을 행하자 크라수스가 이끄는 로마군인은 스파르타쿠스보다 크라수스에게 더 큰 두려움을 느끼게 된다. 그것에 대한 효과는 다음번 전투에서 나타났다. 크라수스의 군인들은 도망치지 않았고, 오히려 반란군이 후퇴하게 된다.
스파르타쿠스의 반란군은 이탈리아 반도의 남쪽으로 내몰리기 시작했다. 스파르타쿠스는 로마의 곡창지대이며, 예전에 노예반란이 일어났던 ‘시칠리아 섬’으로 도피할 생각을 한다. 신화에서 실라와 카리브투스라는 괴물이 산다는 시칠리아로 향하는 험한 바다를 건너기 위해 스파르타쿠스는 일단을 무리를 보내 해적들과 거래를 하려했으나 배신만 당한다. 겨울이 오고 있었고, 북쪽으로 향하는 길은 크라수스가 그들을 굶겨죽이기 위해 쌓은 성벽이 버티고 있었다.
궁지에 몰린 스파르타쿠스의 반란군들은 높은 성벽을 뚫고 북으로 향하기 위해 전투를 벌였으나 6천명이 전사자를 내며 실패하게 된다. 스파르타쿠스는 로마군 포로들을 십자가에 매달아 양쪽 군대 모두가 볼 수 있는 곳에 두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반란군에게는 실패의 대가를 로마군에게는 자신의 기개를 보였다.
십자가 형에 대해서 마크 코비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18cm짜리 로마의 군사용 쇠못을 팔목이나 손바닥이 아니라 손목 아래 부분에 박았습니다. 미끄러짐 방지를 위해 나뭇조각을 함께 박았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 못은 작은 아카시아 나뭇조각을 댄 다음 양쪽 발목을 통과하도록 박습니다. 그렇게 못 박히면 흉곽에 엄청난 압박감이 옵니다. 압박감을 덜려면 발로 서야 하는데 발목에 못이 박혀있는 상태라 불가능하죠. 폐에 압력이 가해져 숨을 못 쉬게 됩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고통은 견딜 수 없이 심해지고 몸이 처지면 다시 고통이 반복됩니다. 십가가형은 오랜 기간 고통을 주었고 로마군 중에는 72시간을 고통 당한 사람도 있었죠."
# 좁혀드는 포위망...
로마군의 승리를 기다리다 지친 로마 원로원은 해외로 원정나간 군대를 불러들인다. 명장 폼페이우스와 로쿠누스가 이끄는 군대는 바다를 건너 반도의 동쪽과 서쪽에 상륙한다. 크라수스는 라이벌들의 출현으로 조바심이 났다. 이를 안 스파르타쿠스는 크라수스와 협상을 벌인다. 하지만 노예들과의 협상을 수치라 여긴 크라수스는 단호하게 거절한다.
이제 선택의 여지가 없어진 스파르타쿠스는 밤을 이용해 난공불락인 듯한 성벽을 넘어 자유를 위한 탈출을 감행하였고, 크라수스의 성벽을 뚫고 이탈리아 반도를 거슬러 북쪽으로 향했다. 이에 대해서 로마군들은 3군데에서 노예 반란군들을 조여오고 있었다. 이때, 독일인 노예들은 자기들끼리 싸우겠다고 나섰다가 크라수스의 군대에게 패하고 3만 5천명이 죽음을 당하였다.
“그는 전투를 원치 않았습니다. 하지만 대원들은 승리에 중독 돼 있었습니다. 자신들이 슈퍼맨이며 스파르타쿠스를 초인으로 여겼죠. 그런 분위기에 스파르타쿠스가 눌린 겁니다.”
[마크 코비(군사 역사학자)]
솔라리스 강이 있는 루카니아에서 스파르타쿠스는 로마군과 최후의 결전을 치른다.
“스파르타쿠스는 말을 끌고 와 대원들 앞에서 죽였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죠. 우리가 이기면 로마군의 말이 있을 테니 말이 필요 없을 테고 지더라도 역시 말은 필요없을 거라고 했어요. 그는 대원들과 운명을 함께 할 것을 선언한 겁니다.”
[마크 코비(군사 역사학자)]
“고대 시대의 가장 뛰어난 지휘관이었어요. 그는 가장 비천한 밑바닥 신분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군대를 일으켜 어떤 원조도 받지 않고 세계 최강의 군대와 맞서 2년이나 싸운 겁니다.”
[마크 코비(군사 역사학자)]
# 죽어서 전설이 되다...
로마군은 스파르타쿠스가 로마군을 무찌르고 빼앗았던 5개의 독수리 깃발과 26개의 군대 깃발을 되찾았다. 그러나 전하는 바에 의하면 스파르타쿠스는 최후의 순간까지 용감하게 싸웠다고 한다.
“사라져버린 시신은 신화의 일부가 됩니다. 스파르타쿠스의 의미는 두 가지였죠. 기적 같은 승리를 거둔 반란군 노예 장군... 노예와 검투사, 농민들의 지도자이기도 했고 야만인의 힘을 상징하기도 했죠. 로마에 닥칠 일을 경고하는 존재였습니다. 우리가 조심하지 않으면 우리가 정복한 사람들에게 정복당할 거란 상징이었어요. 그런 일은 진짜 일어났습니다. 4세기 후에 일어났지만 결국 일어나고 말았죠.”
[키이스 홉킨스(캠브리지대학교 고대사 교수)]
크라수스는 노예 반란이 되살아나지 않도록 원천봉쇄하기 위해 노예 반란군 중 살아남은 6천명을 이끌고 반란이 시작된 카푸아로 갔다. 그리고 그곳에서부터 로마까지 이어지는 아피아 가도를 따라 6천명을 십자가에 매달아 놓았다. 이 시체들은 3개월이나 매달려 있었다고 한다.
“스파르타쿠스의 업적은 지금도 되새겨 집니다. 그는 인간의 희망을 이야기 하며,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고 노력하는 인간이었고 용감한 사람으로 기억됩니다. 불리한 상황에서도 끝까지 투쟁한 인물이죠.”
[키이스 홉킨스(캠브리지대학교 고대사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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