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수립12] 이렇게 만들어진 나라(feat.이승만 김구 여운형,,,김일성)
1947년 3월에 트루먼 독트린이 발표되면서 냉전체제가 시작되고 미국과 소련이 으르렁거리기 시작하면서 점점 분단의 길로 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끝까지 좌우합작을 위해 노력했던 여운형이 1947년 7월에 암살되었다.
미국은 1947년 11월에 한반도의 문제를 유엔 총회로 넘겼다. 솔직히 유엔은 당시에 미국의 거수집단(꼬붕)이었다. 유엔은 인구 비례에 의한 남북한 총선거 실시하자고 결의하였다. 그런데 이것을 당연히 소련이 받아들이지 않을 것을 아마도 미국은 알고 있었을 것이다. 인구조사를 위한 유엔의 선거관리위원단의 입국을 북한과 소련이 거부한 것이다. 아마도 북한의 인구가 적기 때문에 총선을 실시하면 자기들이 불리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미 1947년 11월의 상황에서 남한에는 미군정을 경험하면서 미국의 시장경제체제와 반공사상이 지배적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승만이었기 때문에 적화통일을 막을 수 있었다는 유아적인 사고는 버렸으면 좋겠다.
결국 남북한 총선이 불가능하게 되자 미국은 한반도의 문제를 1948년 2월 유엔 소총회로 넘겼고, 거기에서 남한만의 단독선거가 결정되었다. 이로써 국제사회에서 한반도의 분단이 현실화되어 버렸다.
김구는 1947년 11월 유엔 총회에서 남북한 선거가 치러지지 않는 것에 불안한 마음으로 남북한 연석회의를 하자는 이야기를 1948년 1월부터 하고 있었다. 그런데 남한의 극우청년들이 그러한 김구 선생을 비판하면서 남한만의 정부를 세우자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때에 김구는 다음과 같은 글을 발표한다.
“우리를 싸고 움직이는 국내외 정세는 위기에 임하였다. 우리가 기다리던 해방은 우리 국토를 양분하였으며, 앞으로는 그것을 영원히 양국의 영토로 만들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 미군 주둔 연장을 자기네의 생명 연장으로 인식하는 무지몰각한 도배들은 국가 민족의 이익을 염두에 두지도 아니하고 통일 정부 수립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한국이 있고야 한국 사람이 있고, 한국 사람이 있고야 민주주의도 공산주의도 또 무슨 단체도 있을 수 있는 것이다. 마음 속의 38도선이 무너지고야 당 위의 38도선도 철페될 수 있다. ……
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 38도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에 구차한 안일을 취하여 단독 정부를 세우는 데는 협력하지 아니하겠다.
3천만 동포, 자매, 형제여! 건전한 조국을 위하여 한 번 더 깊이 생각하라”
- 김구, 〈3천만 동포에게 읍고함〉, 1948년 2월
이 내용을 자세히 읽어보면 위에 붉은 색으로 표시된 내용은 자신의 개인적 권력을 위해 분단도 서슴없이 주장하는 이승만은 X새끼라고 말하는 것이다.
김규식은 당시 미군정과 타협해서 이승만과 경쟁할 수 있었으나 분단은 막아야 한다고 생각으로 더 이상 미군정에 손 벌리지 않고 주체적으로 활동하기로 결심하면서 김일성에게 편지를 쓴다.
“우리는 우리의 장단에 춤을 추어야 하겠다. 좌우합작도 미국 사람 장단에 춤추었는지 모르지만, 이제는 남의 장단에 출 것이 아니라 우리장단에 춤추는 것이 제일이다. 그러기 위해서 축배를 들자.”
김일성은 김두봉과 손잡고 나라를 만들 생각을 차근차근 하고 있었다. 자기 스스로 분단의 책임을 뒤집어쓰지는 않으려고 김규식에게 만나자고 답장을 보낸다. 그런데 답장을 보내는 시점이 김일성으로서는 절묘한 타이밍이었다. 총선이 1948년 5월 10일로 결정되었는데, 1948년 4월 무렵에 답장을 보낸 것이다.
김규식이 북으로 가려고 할 때 김구가 동행하기로 한다. 그래서 김구와 김규식은 1948년 4월에 북으로 건너가서 ‘4자회담’(김구, 김규식, 김일성, 김두봉)을 하면서 ‘통일정부 수립과 미소 양군 철수’를 주장하였다. 물론 소련은 긍정적인 입장을 보였지만 미국은 부정적인 입장을 보였다. 물론 이 회담은 이미 김일성이 북측에서 정권 수립을 어느 정도 준비하고 있었고, 그것을 남쪽의 민족지도자인 김구와 김규식이 지지하는 모양새로 만들어 선전에 활용하였다. 그런데 그렇게 이용당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나 김구와 김규식은 분단을 막기 위한 일념으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북으로 향한 것이다. 이때 북으로 함께 건너갔던 김두봉은 이후 북에 남게 된다.
1948년 5월 10일 총선에 김구와 김규식 계열은 불참을 선언한다. 그리고 남한의 사회주의자들도 불참하였다. 제주도에서는 총선 반대를 위해서 봉기가 일어났고(4ㆍ3), 결국 선거가 치러지지 못했다. 이 선거는 최초의 남녀평등에 입각한 보통선거였으며, 21세 이상이 선거권을 가졌고 당선된 제헌국회의원의 임기는 2년이었다.
제주도의 2곳에서는 선거가 치러지지 못했고, 무소속 소장파 인물들이 103석, 이승만의 독촉 계열이 48석, 한민당이 22석을 획득하였다. 이들이 1948년 7월 17일에 헌법을 제정하였고, 이후 대통령을 선출하였는데 대통령으로 이승만, 부통령으로는 이시영(우당 이회영의 막내 동생)이 선출하였다. 이들 제헌국회의원들은 또한 반민족행위처벌법(1948.9), 농지개혁법(1949.6), 귀속재산처리법(1949.12) 등을 처리하였다.
이로써 대한민국정부가 1948년 8월 15일에 수립되었다. 우리 민족에게 8월 15일은 3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다. 1) 해방, 2) 정부수립, 3) 분단의 시작이다.
젊은 김일성은 어찌보면 이승만보다 한 수 위였다고 할 수 있다. 자신이 분단의 책임은지지 않으려고 기다리다가 남한에서 정부가 수립된 직후, 1948년 9월 9일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수립하였다.
해방 이후 3년간 서로 지도자들이 대장놀이하기에 바빴기 때문에 결국 분단으로 간 측면도 있다. 그런데 만약 북한에서 중도 좌파가 세력을 잡고, 남한에서 중도우파가 세력을 잡았더라면 전쟁 없이 대화와 타협으로 통일로 가는 길을 모색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하필이면 양쪽에서 최고 권력을 잡은 사람이 김일성과 이승만이라는 사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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