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수립11] 해방정국,,, 우리에게는 그래도 여운형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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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 & 유투브]/[황현필 한국사]

[대한민국수립11] 해방정국,,, 우리에게는 그래도 여운형이 있었다.

by [수호천사] 2021. 5.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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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수립11]해방정국,,, 우리에게는 그래도 여운형이 있었다.

 

 

모스크바 삼상회의 이후 우익은 반탁(비상국민회의), 좌익은 찬탁(민주주의민족전선)을 주장했다. (그런데 먼 훗날에는 찬탁과 반탁으로만 가르치지 말고 분단과 통일을 함께 가르쳐야 하지 않을까? 너무 간단하게 찬탁과 반탁의 프레임으로 이야기하면 아직도 ‘찬탁은 빨갱이’라는 인식이 많이 있기 때문에...)

 

미소공동위원회가 19463월부터 5월까지 진행되다가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휴회를 한다. 이 과정 속에서 잘못하면 분단으로 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민족지도자들에게 있었지만 그 누구도 분단이라는 말을 입밖에 꺼내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이때 이승만이 전라북도 정읍에서 분단에 대해 처음으로 언급한다(정읍발언, 1946.6)

 

이승만의 정읍발언에 놀란 중도 세력이 좌우합작운동을 전개해 나간다. 당시에 미국은 분단이 아니라 통일정부를 세워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좌우합작운동을 지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김구 역시 “815 해방 이후에 민족의 최대 성과라며 좌우합작운동을 지지하였다.

 

이때 박헌영은 부르주아와 손을 잡은 여운형을 비판하면서 반대했고, 우익이었던 이승만은 차마 대놓고 반대하기는 뭐해서 조건부 찬성을 하였다(사회주의 정권이 들어서는 것을 반대한다나 뭐라나). 그러나 이승만은 계속해서 단정활동을 해 나갔다.

 

좌우합작운동에서 몇가지 논쟁점이 있었다. 우선적으로 친일파 처벌 문제에서 서로 입장이 달랐다. 지주계층이 속한 우익은 가혹한 친일파 처벌에 난색을 표했기 때문에 임시정부가 만들어지면 그때 입법을 추진해서 해결하기로 한다. 그리고 토지개혁 문제 역시 서로 입장이 달랐다. 그래서 절충안이지만 결코 실현불가능한 유상매입/무상분배를 주장하였다.

 

  • 북한 : 무상몰수/무상분배
  • 남한 : 유상매입/유상분배
  • 좌우합작 : 유상매입/무상분배

 

이때 미군정 하에서 남조선 과도입법의원을 선출하려고 했고, 이것을 여운형은 반대하지만, 김규식은 찬성하기도 했다.

 

그런데 1947년에 들어서면서 그동안 좌우합작운동을 지지하던 미국의 입장이 바뀌게 되었다. 19473월에 트루먼 독트린(1947.3)이 발표되면서 냉전이 시작된 것이다.

 

19475월부터 7월까지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렸으나 이미 양쪽이 갈라서기로 작정했기 때문에 좋은 결과는 나오기 힘들었다. 결과적으로 양쪽이 결별하게 되고 임시정부의 구성이 어려워졌다.

 

이때 여운형은 좌우합작운동과 미소공동위원회가 재개되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하면서 연설하면서 돌아다녔다. 19477월에 여운형이 탄 차를 군용트럭이 가로막았고, 한지근이라는 청년이 나타나 뒤에서 여운형에게 총을 발사하였다. 여운형의 경호원이 한지근을 쫓았으나 매복해 있던 경찰이 갑자기 나타나 한지근이 아닌 경호원을 잡아서 경찰서로 데리고 갔다.

 

결국 여운형은 암살되었고, 우리나라 제1호 국민장으로 치러졌다. 이때 장례위원장은 김원봉이었는데, 후에 김원봉은 남한에서 살다가는 자신의 안전도 위험해질 것이라고 생각하고 월북하게 된다.

 

 

여운형은 수많은 테러와 암살 위험을 받았으며, 그것 때문인지는 몰라도 자신의 딸(여원구)을 북한으로 올려보냈다. 여원구는 이후 노무현 정권 때 이산가족 상봉의 북한측 위원으로 방눔하기도 했다. 그녀가 북한에 살면서 『나의 아버지 여운형』이라는 책을 썼고 우리나라에도 출판되었다.

 

 

여운형은 변장을 하고 북한의 김일성을 만나러 가기도 했다. 주변에서 젊은 김일성이 만나러 와야지 왜 어르신이 만나러 가냐고 말렸을 때, 북한에서만 토지개혁을 하게 되면 경제적으로 따로 노는 것이기 때문에 말려야 한다며 만나러 가기도 했다.

 

실제로 좌우합작운동은 194712월에 종결되었지만 여운형의 암살되면서 사실상 끝났다고 봐야 할 것이다.

 

여운형의 죽음에 대해서 다양한 견해가 있다. 염동진(1902~1950)이 만든 백의사라는 파시즘 백색테러단체는 북한에서 내려온 반공청년들로 구성되었는데 한지근이 여기 소속이었다고 하다. 그런데 그 배후에는 박헌영, 김일성, 이승만 등이 거론되기도 하였고, 백의사의 염동진이 임시정부의 김구를 존경했기 때문에 김구가 배후였다는 설도 있다. 그런데 주먹계의 황제라고 불렸던 김두한(1918~1972)은 자기 아버지가 김좌진이라고 생각했고, 김좌진이 사회주의자들에게 죽음을 당했기 때문에 사회주의자들을 대단히 싫어했으며 백의사의 행동대장 역할도 했던 인물이다. 후에 육성으로 회고를 남겼는데 자신이 한지근에게 권총을 줬으며, 여운형의 암살명령도 내렸었다고 밝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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