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24] 을미사변(1) 일본인이 양심적으로 쓴 그날의 보고서
[이 영상은 너무 참혹한 진실을 담고 있어서 부득이하게 성인 인증을 해야만 볼 수 있습니다]
민비(1851~1895)
청일전쟁 이후 러시아가 개입하면서 요동반도를 되돌려주고 일단 찌그러든 일본... 이후 조선에서 러시아의 영향력이 점차 강해지고 있었다.
갑오개혁(1894)으로 1차 김홍집 내각, 2차 김홍집, 박영효 연립내각 모두는 친일내각이었다. 그런데 러시아가 부상하면서 박영효는 일본으로 도망가고 김홍집 친러내각이 구성되었다. 청일전쟁 이후에 별로 얻은 것도 없다고 생각한 일본은 러시아 세력을 끌어들인 민비를 제거해야 겠다는 갱각을 한다. 작전명... [여우 사냥]
민비는 사진 찍기를 싫어했다고 한다. 기록에 의하면 민비는 눈이 양옆으로 찢어졌다고 하며 영민하게 생겼다고 전해진다. 1895년 8월 20일(양력으로는 10월 8일)
당시 일본의 공사였던 이노우에 가오루(1836~1915) 이후에 미우라 고로(1847~1926)가 일본 공사로 부임을 한다. 일본 왜왕의 허락하에 총리 이토 히로부미의 결재를 받아 이전 공사 이오누에 가오루가 명령을 내리고 후임 공사 미우라 고로가 민비 시해를 결행한 것이다.
민비 시해에 참여했던 3류 쓰레기 무사 낭인 집단(48명)의 절반이 일본 구마모토시 출신이다. (이곳이 일본 극우의 성지다!) 이들 중에는 일본 동경대 출신, 기자 출신, 훗날 장관이 되는 사람도 있다.
이노우에 가오루가 공사로 있을 때 ‘훈련대’라는 조선의 군대를 만들어 놓고 있었다. 김홍집 친러내각이 들어서면서 민비가 ‘훈련대’를 해산시켰다. 해산된 조선의 군대가 임오군란처럼 쿠데타를 일으켜서 민비를 시해하는 모양세를 취하려고 함...
1895년 8월 20일, 광화문에 ‘훈련대’의 병사들이 모여들었다. 일본의 낭인들도 합류하였다. 일본은 이때 흥선대원군을 끌어들이려고 하였다. 새벽즈음에 거의 끌려오듯이 대원군이 가마타고 등장하였다. (훈련대 출신들은 그날의 거사가 민비를 죽이는 것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민비는 건천궁에 있었다. 건천궁 앞에서 민비의 호위대장 홍계훈이 저항하다가 일본 낭인들에게 죽는다. 민비는 당시 무수리로 변장하고 무수리들과 함께 있었다. 민비의 죽음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이야기가 있다.
1) 이경직이라는 신하가 민비 앞으로 가로막았고, 이경직이 죽으면서 자연스럽게 민비가 누군지 드러나게 되어 죽었다는 설... 2) 일본인 무수리가 민비를 지목해서 낭인들이 민비의 등을 칼로 내리쳤고 문짝을 떼어서 녹산으로 끌고가 능욕했다는 설... 3) 궁녀나 무수리를 다 불러 모아서 옷을 다 벗기고 젖가슴을 칼로 내리쳤다. 아이를 낳지 않은 궁녀나 무수리와는 달리 아이를 낳은 민비를 구별해서 죽였다는 설... 아이를 낳았는지 음부 검사를 했다는 설... (당시 시해 사건에 가담했던 에조라는 낭인이 일본 장관에게 쓴 보고서) 일본 낭인 20여명이 민비를 겁탈했다는 기록도 있음... 피를 흘리다가 죽은 이후에도 계속 겁탈했다고 함... 나중에 처벌 받을 때 정도의 차이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해서 남아있는 낭인들이 전부다 민비의 시신에 칼을 꽂았다고 함... 민비의 시신을 녹산으로 끌고가서 토막내고 휘발류를 부어 불태웠다. 뼈를 빻아서 향원정에 뿌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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