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22] 청일전쟁에서 청나라가 패배한 진짜 이유
청일전쟁 이전에 일본은 오키나와 점령(1872)하고 대만을 침략(1874)했었다. 그런데 이때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일본이 경복궁을 점령했을 때 청나라는 일본과 싸울 수밖에 없었다. 청나라의 입장에서는 오키나와와 대만은 포기할 수 있었지만, 조선은 포기할 수 없었다.
일본이 경복궁을 점령한 이후 전쟁이 일어날 것을 예상하고 청나라가 추가로 병력을 서해로 보내고 있었는데, 지금의 안산 단원구 풍도동 앞에 있는 바다에서 일본 해군이 청나라 해군을 박살내 버렸다.
청일전쟁의 가장 큰 전투는 평양 전투였는데(1894.9.15~17) 여기에서 일본군이 압도적인 승리를 거둔다. 당시 청나라 군사 2천명이 죽고 4천명 행방불명이 되었다고 한다. 일본군은 불과 180여 명이 사망했다고 한다.
당시에 조선의 백성들은 청일전쟁 때 오히려 일본을 응원하기도 했다. 왜냐하면 당시 일본은 훈련이 잘되어 있었고, 사기도 높았고, 군기도 엄격해서 민간인을 약탈하지 않았던 반면, 청나라의 군대는 여기저기 긁어모은 오합지졸이었고, 군부가 썩어 있었기 때문에 군인들에게 임금을 제대로 지급하지 않고 있었다. 따라서 출병한 청나라 군대가 조선에서 민가를 약탈하고 겁탈하였기 때문에 평양 근방의 조선인들은 청나라 군대라면 치를떨었다고 한다. 그리고 경복궁을 점령한 일본군이 평양으로 진격하면서 조선군을 합류했기 때문에 청나라 포로를 지키는 사람들은 조선의 군인이었다고 한다. 이때 고종의 명령을 받은 평양의 조선군은 청나라 편을 들고 있어서 그 당시에 조선군 끼리 서로 총을 겨누는 상황도 발생했다고 한다.
일본은 갑신정변(1884)에서 청에게 밀린 다음 10년 동안 나라 예산의 50% 이상을 국방비에 쏟아부었다.
평양에서 승리한 일본은 곧바로 산둥반도로 쳐들어갔다. 황해해전(1894.9.17)에서 나름 이홍장이 심혈을 기울여 키운 북양함대는 일본에게 처참하게 박살난다.
당시 청나라의 집권자는 서태후였는데 서태후는 청일전쟁 전에 군비를 이화원을 짓는다고 써버렸으며, 영국의 군함 2척을 살 돈으로 서태우의 생일파티를 준비하고 있었다. (이때 청나라가 사려던 군함을 일본이 사서 산둥반도로 쳐들어간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청나라의 방산비리가 만연해서 실제 일본과 전쟁이 벌어졌을 때 청나라가 일본을 향해 쏘아댄 포탄은 연습용 포탄이었다고 한다. (터지긴 터졌지만 콩이 튀는 폭탄... 콩알탄이었다) 전쟁이 일어났는데 실전에서는 전혀 활용가치가 없는 연습용 포탄을 제공한 것이다.
일본은 요동반도로 진격해서 요동반도를 접수(1895.3.9)하였고 뤼순(여순)과 따렌(대련)을 점령하였다. 여차하면 나라가 망할 것을 직감한 청나라 이홍장이 직접 일본 시모노세키까지 가서 조약을 체결하면서(1895.4.7) 청일전쟁은 일본의 승리로 끝났다.
이때 청나라가 일본에게 2억냥의 배상금(청나라 2년치 예산, 일본의 4년치 예산)을 물어주기로 하였고, 요동반도와 대만을 일본에게 넘겨주게 되었다. 그런데 부동항을 차지하기 위해서 호시탐탐 노리던 러시아가 프랑스와 독일을 끌어들여 삼국간섭을 하였고, 결국 일본은 요동을 청에게 돌려줄 수밖에 없었다.
청나라를 아사리판으로 몰고간 여자가 서태후라면, 조선을 조선을 아사리판으로 몰고간 여자는 민비였다. 당시 청일전쟁이 일어났을 때, 민비는 진령군이라는 무당을 불러들여서 청나라의 승리를 기원하는 굿판을 벌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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