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절특집] 봉오동ㆍ청산리의 영웅. 홍범도(Feat. 김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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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 & 유투브]/[황현필 한국사]

[광복절특집] 봉오동ㆍ청산리의 영웅. 홍범도(Feat. 김좌진)

by [수호천사] 2021. 8.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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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절특집] 봉오동ㆍ청산리의 영웅. 홍범도(Feat. 김좌진)

 

 

홍범도 장군의 유해가 드디어 78년 만에 돌아왔다. 한때 북한과 외교 관계로 들어오지 못하고 있다가 문재인 대통령의 카자흐스탄 정상회담(2019.4.22) 등으로 관계를 형성해서 국립대전현충원으로 모시게 된 것이다.

 

실제로 대한민국에서는 홍범도 장군(1868~1943)보다는 김좌진 장군(1889~1930)이 더 많이 알려져 있다. 김좌진 장군은 대단한 독립운동가였다(물론 북한에서는 훗날 변절했다고 비판한다). 그리고 사회주의자 박상실 등에 의해 죽음을 당했다. (그래서 남한에서는 사회주의자들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을 더욱 갖게 되었다) 홍범도 장군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카자흐스탄이 소련에서 분리독립되기 전에 냉전 체제 속에서 소련 땅에서 살다가 죽었기 때문에 홍범도 장군을 독립운동가로 모시기에는 부족하다는 의식을 갖고 있다(실제로 홍범도는 트로츠키나 레닌을 만났다).

 

 

홍범도 장군은 태어나자마자 어머니를 여의고, 9살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머슴생활을 하다가 절에 들어가서 글을 배웠고, 비구니와 사랑에 빠져서 결혼했다고 한다. 홍범도 장군이 소련 땅에서 죽었다고 해서 우리나라 학계와 교과서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었지만, 1920년대 무장투쟁의 넘버원은 홍범도였다고 볼 수도 있다.

 

절에서 나와서 포수 생활을 하던 홍범도는 1907년 한일신협약(정미7늑약, 1907)으로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되는 과정에서 일제는 사냥꾼들도 총을 반납하게 했다고 한다. 키가 거의 180이 넘었던 홍범도는 그 이후 의병 활동에 투신하게 된다. 그는 총알로 바늘귀도 뚫는 사람으로도 알려질 정도로 명사수였다고 한다. 산포수들의 넘버원인 홍범도는 정미의병에 합류하였지만 평민출신 의병장인 신돌석과 홍범도는 의병장에서 배제되는 설움을 당하기도 한다.

 

1910년 한일합방이 되고, 191931운동이 일어나면서 만주에서 무장투쟁이 본격화되기 시작하였다. 홍범도는 대한독립군을 조직하고 있었는데 일본군을 유인작전으로 삼둔자에서 일본군을 괴롭혔다(1920). 이때 열받은 일본군이 월강추격대를 조직하여 두만강을 넘어왔다가 봉오동에서 약 160명 가까이 사망하는 일이 벌어졌다(봉오동 전투). 더욱 화가 난 일본이 두 개의 사단 병력으로 홍범도를 잡으러 왔고, 홍범도의 대한독립군과 김좌진의 북로군정서가 백두산 근처로 도망치다가 청산리 근처에서 일주일동안 10여차례 승리를 거두었다(청산리 대첩, 1920). 이때 천수평, 백운평, 어랑촌, 고동하 등에서 전투가 벌어졌는데 홍범도가 유인하고 김좌진이 매복해서 공격하면서 일본군을 크게 무찔렀다. 홍범도는 봉오동 전투의 영웅이기도 하고 청산리 전투의 영웅이기도 하다.

 

 

일본의 입장에서는 간도지역에 있는 한인 마을이 독립군들의 기지 역할을 한다고 해서 한인마을을 공격해서 학살하고 방화하는 사건을 일으켰다(간도참변, 1920). 이때 3~4만의 한인 남자들이 죽임을 당했다고 한다. 독립군들이 할 수 있었던 것은 더 이상 한인들이 피해를 당하지 않도록 간도를 떠나주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192012월에 밀산부 한흥동으로 향한다.

 

 

  • 봉오동 전투(1920.6)
  • 훈춘사건(1920.10)
  • 청산리대첩(1920.10)
  • 간도참변(1920.11~1921.4)

 

당시 대종교를 근간으로하는 북로군정서의 총재 서일(1881~1921)은 소련 땅으로 건너갔다가 자유시참변(1921.6)을 당하기도 하였다.

 

 

정미의병(1907) 때 활동을 시작해서 봉오동 전투가 있었던 1920년에 홍범도 장군은 이미 53세였다. 그리고 1937년까지 연해주에서 살았는데, 홍범도 장군이 70세가 되었을 때 중일전쟁이 발발하였다(1937). 소련의 스탈린은 일본이 연해주를 침략하면 연해주에 있는 조선인들이 일본인들과 비슷하게 생겨서 혼동되기도 하고 일본의 첩자가 될 수 있다고 판단해서 연해주에 있는 한인들을 중앙아시아로 강제로 이주시켰다. 홍범도 장군은 늙은 나이에 카자흐스탄 지역으로 가서 거기에서 고려극장의 수위로 여생을 보냈다. 이 고려극장에서 홍범도라는 연극이 상영되기도 하였다.

 

 

고향인 북한땅에 가는 것보다 대한민국으로 온 것을 지하에서 더 행복해 하실 수 있도록 예우해야 하지 않을까? 홍범도 장군의 아내는 잡혀서 고문을 당하다 죽었고, 큰아들은 독립운동을 하다가 총에 맞아 죽고, 작은 아들은 열악한 환경에서 결핵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년에 홍범도 장군은 외롭게 살다가 해방을 2년 남겨두고 카자흐스탄에서 삶을 마감했다.

 

 

독립운동에 대해서 잘 알지도 못하면서 단지 홍범도 장군이 소련지역에서 활동했기에 공산주의자라고 단정하면서 폄하하는 것은 스스로 자신들의 역사인식이 부족함을 드러내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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