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14] 여인천하-fight!(인수대비vs폐비윤씨)
정희왕후, 인수대비, 폐비윤씨를 모두 경험한 임금(성종)... 각자의 개성을 가진 인물들을 한꺼번에 경험하기는 쉽지 않다.
- 정의왕후(1418~1483)는 세조의 아내
- 인수대비(1437~1504)는 의경세자의 아내
- 폐비윤씨는 자을산군(성종)의 아내
[정의왕후]
세조의 첫째 아들 의경세자가 20살에 죽었고, 8살이었던 동생이 세자가 되었다가 예종으로 등극하였는데 역시 20살에 죽어버렸다. 예종의 아들 제안대군이 너무 어려서 예종의 형이었던 의경세자의 두 아들(월산대군, 자을산군) 중에 왕을 선택하기로 하였는데, 이때 둘째인 자을산군이 왕위에 오르게 된다.
당시에 왕가에서 가장 어르신이라고 할 수 있는 정의왕후가 보기에 월산대군은 병약했고, 세조가 예종을 왕으로 선태한 후에 견제하기 위해서인지 평범한 집안과 혼인을 했기 때문에 외가가 내세울 것 없는 집안이었다. 반면 자을산군은 한명회의 딸과 결혼했기 때문에 정략적으로 자을산군이 왕이 되는 것이 유리하다는 판단을 했던 것 같다. 정의왕후는 수렴청정을 했는데 나름 모범적으로 수렴청정을 한 인물로 그려진다(잘못한 것은 자신 탓, 잘한 것은 왕 탓).
[인수대비]
성종이 왕이 된 후에 아버지인 의경세자는 ‘덕종’으로 추존된다. 의경세자가 죽은 뒤에 사가로 쫓겨났던 인수대비의 집안은 한확(1400~1456)의 집안이었다. 인수대비는 사서삼경에 능통했고, 인도의 언어인 산스크리트어를 읽을 정도의 실력을 갖고 있었다. 불교 신자로 당시에 불교에 부정적인 신하들 앞에서도 할 말 다하는 인물이었다. 그리고 궁궐 여인들의 몸가짐을 위해서 『내훈』이라는 책을 썼다. 물론 인수대비는 성종의 어머니로 절대 권력을 누리다가 폐비윤씨를 죽인 인물이고, 희대의 폭군 연산군이 ‘흑화’되는 데 영향을 준 고집불통의 여인으로 알려져 있었다.
[폐비윤씨]
폐비 윤씨는 개인적으로는 억울하겠지만 자신의 불행을 스스로 자초하였다고 볼 수 있다. 성종은 ‘주요순 야걸주’로 낮에는 성군이었다가 밤에는 술과 여자를 좋아하는 임금이었다고 한다. 한명회의 딸과 결혼을 했지만 한명회의 딸이 일찍 죽었기에 성종보다 나이가 많은 폐비 윤씨가 아이를 가져서 왕비가 되었다. 그런데 왕비가 되자마자 인성이 180도 바뀌어버렸다. 어르신들(인수대비, 정의왕후)의 훈계를 들을 때 째려봤다는 이야기도 있고, 왕이 후궁들과 사랑을 나누는 것을 질투해서는 안된다는 ‘칠거지악’을 어겼다(물론 오늘날에는 어처구니 없는 일이지만 당시에는 칠거지악이 엄격하게 지켜지고 있었다). 왕비의 방에서 사람 죽이는 약도 발견되었다. 왕과 가까이 접촉하는 왕비가 그런 약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상당히 위험스러운 일이었다. 그리고 왕인 성종의 얼굴에 상처까지 내면서 왕비가 된지 8개월만에 쫓겨나게 되었다. 이후에 관료들은 훗날 폐비윤씨의 아들이 왕이 될 것이라는 판단하에 아부를 떨고 있었다. 이런 상황을 두고 결국 폐비윤씨에게 사약이 내려진 것이다. 어쩌면 스스로 자초한 죽음이라고 할 수도 있다.
성종이 나름 정치는 잘했는데, 38살에 요절하였고 성종의 뒤를 이어 연산군이 즉위하였다. 연산군은 갑자사화 이후 모친의 죽음에 대해서 엄청난 보복을 가하였다. 예전에 성종이 사랑했던 후궁 두 명의 아들에게 매를 쥐어주고 때리게 하였고, 그들의 시신을 잘라서 젖을 담가 8도에 뿌리기도 하였다. 그리고 자신을 훈계하는 할머니(인수대비)에게 박치기를 하였고 그것으로 인해서 인수대비도 세상을 떠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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