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 전국시대를 통일하고 조선 정벌을 꿈꾸었을 때, 당시 본진은 교토였으며, 경쟁자인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도쿄’(당시에는 오지)로 쫓아낸 상태였다.
임진왜란을 ‘도자기 전쟁’, ‘7년 전쟁’(1592~1598), ‘조일전쟁’이라고도 하는데, 명나라는 명나라는 ‘항왜원조전쟁’이라고 한다.
당시 다이묘의 생각은? 조선 정벌에 대해서 부정적인 생각을 하고 있어도 내색을 하지 못했다. (토요토미에게 걸리면 조선으로 건너가기 전에 목이 날아갈 판이었음)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일본 열도에서 조선으로 건너가는 가장 가까운 지역에 나고야 성을 축조(오늘날에는 없음)하였다. (일본의 오사카와 도쿄 사이에 있는 나고야에 있는 성과 다름)
참고로 나고야는 오사카와 도쿄 사이에 있는 도시이다. 오사카(한신 타이거즈), 나고야(주니치 드래곤즈), 도쿄(요미우리 자이언츠)... 일본의 유명한 성들은 전국시대를 거치면서 건축되었는데, 오사카성(토요토미 히데요시가 만듬), 구마모토성(카토 기요마사가 만든 성), 나고야성(토쿠가와 이에야스가 만듬), 고베의 히메지성 등이 유명하다.
일본의 건축술은 솔직히 인정해야 한다. 그들은 전국시대 전투에서 살아남기 위해 성을 쌓았다. 반면 조선은 평화가 지속되었기 때문에 전투시의 효용성은 크지 않았다. 일본에 체류했던 포르투갈의 루이스 프로이스(1932~1597)의 『일본사』에서 오사카성을 ‘유곽’으로 표현할 정도였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대표적인 전쟁 반대론자였는데, 공교롭게 제1선발이 되었다.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음력 4월 10일에 출정 명령을 내렸고, 나고야 성을 떠난 일본군은 4월 13일(음력, 양력으로는 5월 24일)에 한반도에 상륙한다. 이것은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오판이었을 것이다. 당시 출전한 일본군의 주력은 일본의 서남쪽 지방으로 비교적 따뜻한 지역의 사람들이었다. 따라서 한반도의 추위와 굶주림으로 고생한다.
당시 일본군은 18만의 대군이 조선으로 건너왔다. 제1선발인 고니시 유키나가의 사위가 쓰시마섬 도주인 소 요시토시(1568~1615)였으며, 그도 전쟁 반대의 입장이었다. 3선발인 구로다 나가마사의 아버지는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책사였다. 제8군의 우키타 히데이에는 당시 20세의 나이로 총 사령관이 되었는데,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양자였다. 토요토미가 조선을 정벌한 이후에 우키타에게 조선의 왕으로 삼겠다는 말을 들어서 그랬는지 모르지만 조선 백성을 학살하는 것에 반대한다. (이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다!) 제9군의 토요토미 히데카츠는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카였다. 수군의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용인전투에서 활약하였는데, 이후 한산도에서 이순신에게 털리고 근처 섬으로 들어가서 미역만 먹고 견디다가 간신히 살아남은 사람이다. (와키자카 후손들은 와키자카 제삿날에 미역만 먹는 풍습이 있다)
일본군은 당시 절영도(오늘날의 영도구)에서 하루를 지내고 4월 14일에 부산성을 공격한다. 절영도는 구한말에 러시아가 조차하려고 시도했으나 독립협회의 반대로 묵살되었다. 이후 1992년 대선 당시에 김영삼과 김대중의 대결이 팽팽했는데, 김기춘이 부산에 와서 김대중이 당선되면 모두 다 영도 앞바다에 빠져 죽어야 한다고 말했던 곳이다. 그리고 최근 김무성이 공천파동으로 도장을 까지고 튄 곳이 영도라고 한다.
1. 부산성 전투(1592.4.13 or 14)
부산성은 정발 장군이 지키고 있었다. 정발 장군에 대해서는 1) 전투 전날 술먹고 술이 깨지 않은 채 전투를 벌였다는 설, 2) 전투 전날 사냥을 하고 술을 먹다가 일본의 함대를 발견했을 때 처음에는 세견선으로 착각했었는데, 함대의 숫자가 많아서 서둘러 부산성으로 돌아가다가 부산성이 벌써 점령당한 상태에서 싸우다 죽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런데 부산성에서 싸우다 포로로 잡혀갔던 사람들의 증언을 들어보면, 정발 장군은 열심히 싸웠다고 한다. 루이스 프로이스의 기록에서도 부산성의 군인들은 철모와 가죽갑옷을 입고 너무나 용맹스럽게 죽을때까지 싸웠다고 나온다. 당시 참전한 일본의 장수(마쓰라 시게노부)는 “우리는 바다를 건너와서 첫 번째 전투인 부산성 전투에서 좌절을 맛보았다”라고 말할 정도로 저항이 강렬했던 것 같다. 아마도 미처 장계를 올릴 겨를이 없이 싸우다가 죽었기 때문에 정발 장군이 무능했다는 시각이 있는 것 같다.
임진왜란을 살펴보는 기록으로는 『선조실록』, 류성룡의 『징비록』, 이순신의 『난중일기』를 꼽을 수 있다. (선조실록은 광해군 때 북인이 쓴 『선조실록』과 인조 때 서인이 쓴 『선조수정실록』이 있다)
정발 장군을 ‘흑의장군’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활쏘는 실력이 매우 뛰어났다고 한다. 새벽 4시부터 6시까지 두 시간을 저항하였는데, 일본군이 성의 뒤쪽 산을 넘어서 공격하는 것을 막다가 총을 맞고 전사했다는 기록이 있다. 당시 조선의 병력은 600~800명이었고, 이 병력으로 1만 8천여의 고니시 유키나가의 군대와 싸운 것이다. 성이 함락된 이후에 3천명의 주민들도 함께 몰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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