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3] 대원군이 300년만 일찍 태어났더라면, 조선의 역사가 바뀌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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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3] 대원군이 300년만 일찍 태어났더라면, 조선의 역사가 바뀌었을까?

by [수호천사] 2021. 5.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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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3] 대원군이 300년만 일찍 태어났더라면, 조선의 역사가 바뀌었을까?

 

 

흥선대원군이 300년만 일찍 태어났더라면, 그리고 왕이었더라면 조선의 역사는 많이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대원군은 권력을 잡자마자 개혁작업을 시작한다.

 

1. 왕권 강화

 

대부분 왕조 시대에 왕권을 강화하는 왕은 전성기를 누리며 좋은 평가를 받게 된다. 통일신라의 신문왕은 관료전을 지급하고, 녹읍을 혁파하면서 진골 귀족의 세력을 약화시키며 전성기를 구가하였다. 고려의 광종은 호족과 개국공신 세력을 제거하면서 왕조를 안정화시켰다. 고려의 공민왕은 권문세족의 토지를 빼앗고, 권문세족의 노비를 해방시키고 신진사대부를 등용하면서 개혁작업을 하였다. 조선의 태종은 개국공신과 외척을 제거하고 사병을 빼앗으면서 왕권을 강화하여 이후 세종의 태평성대의 기틀을 놓았다.

 

흥선대원군은 우선 안동김씨를 제압하였다. 그러나 완전히 제거하지는 않았고 그들의 복종과 지지를 받으면서 개혁을 진행하였다. 흥선대원군이 집권하면서 당시 신하들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나는 천리(종친)를 끌어다 지척으로 삼겠고, 태산(노론)을 깎을 것이며, 남대문(남인)3층으로 높이려고 하는데 경들의 생각은 어떠하오?”

 

흥선대원군은 매관매직을 금지하고 과거제도를 부활하였다. 상징적인 탐관오리들을 잡아다가 끓는 가마솥에 넣겠다는 위협을 하면서 경고를 하였고, 흥선대원군의 집권기(1863~1873)에는 지방관들이 나름 열심히 일하게 하였다.

 

흥선대원군은 조선 후기 최고 정치기구인 비변사를 철폐하였다. 원래 비변사는 1510년 삼포왜란 때 임시 군사 기구로 설치되었다가 을묘왜변(1555) 때 상설기구가 되었고,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최고 합좌 기구로 성장하였다. 원래 의정부에서 정치를 논하고 삼군부에서 군사를 논했던 조선의 정치기구가 조선 후기에 비변사로 통합되었던 것이다. 이 비변사에서 노론과 세도가문이 장난질을 쳤던 것이다.

 

흥선대원군은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 경복궁을 중건하였다. 이때 부자들에게 원하는 만큼 기부하라는 원납전을 발행하였고, 양반들의 묘지 근처 나무를 벌목하였으며, 100배의 가치를 가진 화폐를 발행하였다(물론 이것으로 인해서 화폐가치가 하락되어 인플레이션이 유발되었다). 경복궁이 중건 도중에 불에 타지 않았다면 이후 재정적으로 부담을 지지 않았을 것이다. 오늘날의 경복궁을 관람하는 외국인들은 서울은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도시라고 감탄한다.

 

 

흥선대원군은 또한 법전을 간행하였다. 흥선대원군 이전에는 세조 때 시작해서 성종 때 완성된 경국대전이 있었고, 영조의 속대전, 정조의 대전통편이 있었다. 흥선대원군은 대전회통, 육전조례를 만들었는데 이때 조두순(1796~1870)이 앞장섰다고 한다.

 

2. 민생안정

 

흥선대원군은 조선시대 어느 왕도 해내지 못한 삼정을 개혁하였다. 삼정은 전정, 군정, 환정(환곡)을 말한다. 전정(토지세)을 개혁하기 위해서는 양전사업(태종, 광해군이 시행한 바 있음)을 시행하여 숨어있는 토지를 찾아내었고, 양반의 토지 겸병을 막았다. 군정(군역)을 개혁하기 위해서는 호포법을 시행하였다(조선 영조 때 호포법을 시행하려다가 신하들의 반대로 균역법을 시행한 바 있다). 환정(봄에 빌려주고 가을에 갚는)의 문란이 심했기 때문에 사창제를 실시하였다.

 

흥선대원군은 붕당의 지역적 기반이라고 할 수 있는 서원을 47개만 남겨놓고 철폐하였다. 당시 서원은 세금이 면제되었고, 국가로부터 토지와 노비를 받고 있었다. 서원이 철폐되었을 때 부당하다고 유생들이 한양으로 몰려와 도끼를 놓고 상소를 하였다. (나라가 위기에 처해있을 때는 꼼짝 못하던 것들이 자기들의 이익이 침해되니까 한양으로 기어올라와서 상소를 한 것이다) 이때 흥선대원군은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다고 한다.

 

“서원은 선현에 대한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그런데 하물며 도적이 숨어 살아서야 되겠느냐. 나는 우리 백성을 힘들게 한다면 공자가 다시 태어난다고 하더라도 용서할 수 없다.”

 

당시에 조선은 유교의 국가였다. 이때 공자는 신에 해당하였고, 성리학에 비판을 하면 사문난적으로 목이 날아가는 시대였다. 이 시대에 대원군처럼 말한 것은 인정해줄만 하다.

 

흥선대원군이 권력을 잡기 전, 화양서원에 명나라 신종을 모시는 만동묘가 있었는데 당시 묘지기에게 쫓겨난 적이 있었다. 흥선대원군은 권력을 잡자마자 만동묘도 없애버렸다.

 

3. 비판과 한계

 

물론 흥선대원군의 개혁에도 불구하고 그가 펼쳤던 대외정책은 비판을 받고 있다. 통상을 거부하는 쇄국정책은 이후 조선의 발전에 발목을 잡았다고 평가받고 있으며, 천주교 탄압 등도 비판받아 마땅하다. 많은 사람들이 흥선대원군의 개혁은 전근대적인 사회에서 복고적인 개혁이라는 비판을 하고 있다. 그러하기 때문에 더더욱 흥선대원군이 300년만 일찍 태어났다면 조선 후기의 상황은 많이 바뀌었을 것이라는 가정을 하는 것이다.

 

조선 말기에 흥선대원군의 집권기를 전후로 해서 세도정치 기간과 민씨 척족이 나라를 말아먹는 것에 비해서 흥선대원군의 집권기는 가장 안정된 기간이었다고 할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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