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64] 임진왜란 이후 조선과 명나라, 일본과 여진의 상황(17분 순삭ver.)
임진왜란은 당시 동북아 역사를 완전히 뒤집어 버렸다. 만약 당시 전국시대를 통일한 일본의 부대가 유럽으로 쳐들어갔다면 유럽의 나라들도 막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1. 조선의 변화
조선의 바보 같은 왕 선조가 임진왜란 때 왕이었다는 것이 우리나라로서는 비극의 시작이었을 것이다. 전쟁이 끝나고 광해군이 왕이 되어서 나름 전후복구를 시도한다. 그런데 전쟁 이후에 왕권이 약해진다. 그 이유는 임진왜란이 끝나자마자 비변사(備邊司)가 강력한 기구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원래 비변사는 원래는 중종(1506~1544) 때 삼포왜란(1510)을 계기로 만들어진 임시군사기구였다. 이 비변사가 명종(1545~1567) 때 을묘왜변(1555)으로 상설기구가 되었으며, 임진왜란이 끝난 이후에도 문신관료인 정승 판서들이 군권까지 장악하는 결과가 되어버렸다.
시대별 비변사 장악세력 (17세기 - 서인, 18세기 - 노론, 19세기 - 세도가문)
임진왜란 중에 훈련도감(포수, 사수, 살수로 구성된 급료병)이라는 용병체계가 생겼고, 지방군은 속오군(양반부터 노비까지 편제) 체제로 변한다.
경제적으로 조선은 커다란 타격을 입었다. 조선 전기 세종 때 150만 결 정도인 농지가 선조 때 30만 결로 줄어들었다. 이것은 전쟁 중에 경복궁이 불타고 토지대장인 양안이 불타버려서 토지에 대한 조세확보를 제대로 못하게 되는 상황으로 이어진다. 이것은 조선 정부의 재정 악화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되는데, 영조 때 가서 어느 정도 토지가 확보가 되었다고 한다.
사회적으로 조선은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인구가 급격하게 감소했다. (임진왜란 전에 약 416만 명이던 인구가 병자호란 이후에 약 152만 명으로 줄었다는 기록도 있다) 경복궁이 불타면서 호적이 불타버려서 국가가 ‘역’ 대상자를 확보하지 못하게 된다.
조선의 세금제도인 조(토지세), 용(요역, 군역), 조(공납) 중에서 ‘조’에 해당하는 토지세가 토지의 황폐화로 제대로 걷히지 못하고, ‘용’에 해당하는 요역과 군역에 동원하는 사람이 현격하게 줄어들어서 조선의 세금제도는 상당히 어려움을 겪는다.
세금 대상자가 줄어드니 국가가 공명첩(돈이나 곡식을 받고 팔았던 임명장)을 발급하게 되었고, 이것을 사서 양반의 숫자가 늘어났으며, 노비들은 납속(돈이나 곡식을 헌납함으로써 신분의 상승 혹은 면천받는 제도) 등으로 면천을 받으면서 조선 후기 신분제의 변동을 유발시켰다. 조선 전기에 10프로였던 양반이 후기에는 70프로로 상승하였으며, 양반의 권위가 떨어지고 신분제가 헤이해지는 결과를 낳게 된다.
문화적으로도 조선은 큰 손해를 보게 된다. 상당히 소중한 문화유산들이 일본으로 건너가게 되었다. 조선의 궁궐들이 불타버렸는데 창덕궁과 창경궁은 광해군 때 복원했지만 경복궁은 흥선대원 때에 중건되었다. 그래서 조선 전기의 왕들은 경복궁에서 살았고, 후기의 왕들은 창덕궁에서 살았다고 보면된다.
한편 왕조 실록을 보관하는 사고가 불에 탔는데, 전주사고의 실록이 다행스럽게 보존되었다. 전쟁 이후 바보같은 성리학적 가치관에 매몰되어 실력도 없으면서 명분만 앞세우다가 후금과 청나라에게 털렸고, 19세기에 가장 가난한 나라가 되어 군대를 통해 전쟁 한번 치르지도 못하고 나라를 빼앗긴 바보같은 조선이 되어버린다.
2. 일본의 변화
일본은 정치적으로 침략전쟁에는 실패했지만, 경제적으로는 많은 것을 얻어갔다. 임진왜란을 ‘도자기 전쟁’이라고 부를 정도로 조선의 도공들이 많이 일본에 끌려가게 된다. 한편으로 조선에서는 천대받던 도공들이 일본에서는 스승으로 극진한 대접을 받으면서 일본의 도자기 산업이 세계 최고가 되기도 한다. 이때 끌려간 인물 중 하나인 이삼평((?~1655)의 후손은 일본 최고의 유명한 도자기 가문이 되었다고 한다. 경상도 지방의 학자들도 많이 끌려갔는데 그 중에 이황의 제자인 강항(1567~1618)이 일본에 가서 일본의 유교 발전에 큰 역할을 하게 된다.
정치적으로 일본은 또 한번의 격변을 맞이한다. 임진왜란 이후에 서군의 이시다 미쓰나리와 동군의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세키가하라 전투(1600.9.15)에서 자웅을 겨루게 되었는데, 서군의 주축 세력들이 임진왜란에 참전했던 세력이어서 전력이 많이 약해져 있었다고 한다. 시마즈 요시히로는 노량에서 거의 궤멸상태에 빠졌고, 고니시는 이 와중에 혼자만 살아남기 위해 도망친 것으로 신임을 잃어버렸다. 토쿠가와 이에야스를 에도막부를 열면서 자신들은 임진왜란을 반대했다고 하면서 조선과 수교를 원했고 결국 광해군 때 기유약조(1609)를 통해서 조선과 수교하게 되었다. 만약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임진왜란을 일으키지 않았더라면 아들인 토요토미 히데요리에게 권력이 세습되었을 것이고 에도막부는 만들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3. 명나라의 쇠약과 만주의 여진족의 성장
명나라는 임진왜란에 참전하면서 쇠약해졌다. 당시 만주에서는 12세기 강성했던 금나라를 만들었던 여진족이 여기저기 흩어져 살고 있었는데, 농경국가인 조선과 명나라가 적당히 여진족을 분열시키는 정책을 펴고 있었다. 그런데 여진족을 담당하고 있던 요동의 기병이 임진왜란에 참전하는 바람에 여진족이 강성해질 수 있었던 것이다. 여진족의 누르하치가 임진왜란 때 조선을 돕기 위해 참전하겠다고 했을 때 조선이 거절한 적도 있다. 이후 건주여진의 누르하치가 여진족을 통일하고 1616년에 후금(대금)을 건국하였고 정묘호란(1627)으로 조선을 침략한다. 이후 국호를 청(1636~1924)으로 바꾸고 조선을 침공하게 된다(병자호란, 1636~1637). 임진왜란이 아니었다면 누르하치가 여진족을 쉽게 통일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임진왜란65] 대장정 끝...소회. 앞으로 뭘 할까요?
임진왜란 강의는 총 64강으로 러닝타임은 1,250분이다. 그리고 조회수는 1,700만인데 앞으로 계속 늘어날 예정이다.
황현필 선생은 추가로 『우리 이순신』이라는 책을 집필하고 있기 때문에 이 책이 나오면 이순신에 대해 더 많이 알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된다.
이번 임진왜란 강의를 하면서 나름 보람이 있었던 것은 (독자들에게는 임진왜란을 자세히 알 수 있게 도움을 준 것도 있지만) 웅치ㆍ이치 전투에서 활약하고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일본의 네임드 무장이 총출동한 일본군을 8일동안 막아낸 황진 장군이 더욱 많이 알려지기를 바라는 댓글이 많았고, 마침 영화제작사 대표가 황진 장군에 대한 영화를 기획하면서 찾아온 것이다.
앞으로 우리나라 역사를 좀더 많이 쉽게 알려주는 황현필 선생 같은 유투버들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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