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50] 칠 천 량 해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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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 & 유투브]/[황현필 한국사]

[임진왜란50] 칠 천 량 해 전

by [수호천사] 2021. 4.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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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50] 칠 천 량 해 전

 

 

 

원균도 부산을 공격하는 것이 무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는데, 선조의 무리한 명령과 권율이 곤장까지 때리니까 패할 것을 알고 출전한 것이다? (이렇게 원균을 옹호하는 사람들이 있다)

 

[원균에게 출정을 강요하는 선조] 선조실록 1597710

상이 전교하기를, “아뢴대로 시행하라. 원균에게도 아울러 말을 만들어 하유하기를, ‘전일과 같이 후퇴하여 적을 놓아준다면 나라에는 법이 있고 나역시 사사로이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라.”

 

[권율이 원균에게 곤장을 침] 선조실록 1597711

“국가에서 너에게 높은 벼슬을 준 것이 어찌 한갓 편안히 부귀를 누리라 한 것이냐. 임금의 은혜를 저버렸으니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조선 조정의 대신들 중에 나쁜 놈들은 많았지만 아주 바보들은 아니었다. 조선의 조정에서도 부산을 공격하는 것은 무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부산 앞바다는 파도 심하다. 그리고 조선의 판옥선은 평저선이라 파도에 취약하다. 게다가 부산 근처에 왜성이 많아서 정박해서 쉴 곳이 없다.

 

그런데 원균은 이순신을 모함하면서 자신이라면 부산을 공격할 수 있다, 가토를 잡을 수 있다이렇게 떠들었기 때문에 나름 뭔가 보여줄 것이라고 믿었던 것 같다. 그런데 원균이 정작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이후에 여기저기에서 야금야금 판옥선을 날리고 있는 상황을 보며서 조정과 선조는 원균에게 ‘너가 이순신보다 나은 것이 무엇인지 보여달라. 아직 조선 수군이 건재하다는 것을 일본에게 알려라’고 주문한 것이다.

 

[선조와 권율은 원균에게 전함대 출동을 명령하지 않았다]

선조실록 1597년 6월 26일
비변사가 아뢰기를, “현재의 함대를 배설(경상우수사), 이억기(전라우수사), 최호(충청도수사), 원균(전라좌수사이자 삼도수군통제사)이 거느린 선박으로 각각 한 부대를 만들어서 한산도를 굳게 지켜 부대별로 교대로 해상에 나가서 관측하게 해야 합니다

선조실록 1597년 6월 28일
도원수 권율이 장계하기를, “이런 식으로 계속 번갈아 교대하며 오는 자가 나아가고 앞에 간 자가 돌아오면 그곳의 적들이 의심하고 두려워하여 감히 바다를 건너오지 못할 것이고...”

선조실록
1597년 7월 10일
비변사가 아뢰기를, “우리나라의 주사를 적이 무서워하니 부대를 나누어 번갈이 나가 바다에 왕래하면서 적의 보급로를 끊는다면 이는 곧 적의 허점을 공격하는 것임과 동시에 요해처를 장악하는 것이니 현재의 계책으로는 이보다 나은 것이 없습니다.”

 

곤장을 맞은 원균은 714일에 134척의 판옥선을 거느리고 한산도를 출발하여 견내량을 통과하여 쉬지 않고 부산 앞바다까지 간다. (노를 젓는 격군들의 피로도는 최고였을 것이다) 도중에 일본 함대를 만났는데 일단 쪽수에서 쫄은 일본 함대가 도망치고 조선 함대가 쫓게 되었다. 쉬지않고 노를 저어온 격군들은 무척 힘이 든 상황이었는데, 마침 발견한 적의 보급선을 쫓으라는 원균의 명령을 듣고 쫓다가 판옥선 10척이 표류하게 된다. 이중 5척은 도모포로 표류하였고, 나머지 5척은 울산 앞바다 서생포까지 표류하게 된다. (서생포에 표류한 조선 수군이 전멸당했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도모포로 표류한 조선 수군도 그랬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조선 수군이 예전과는 다르고, 격군들도 지쳤다)을 지켜보던 부산 앞바다의 일본 함대가 출전한다. 놀란 원균이 배를 돌려 후퇴하여 가덕도까지 도망쳤고 목마른 격군들과 수군들 400여 명이 가덕도에 내린다. 이때 이미 가덕도에는 일본의 부대가 주둔하고 있었고 다카하시 나오쓰구(1572~1617)의 명령으로 조선 수군 400명이 전멸당한다. 이러한 상황을 본 원균은 다시 가덕도에서 도망친다. (이순신의 경우에는 한때 가덕도에서 4명이 조선 수군이 일본군에게 잡혔을 때 가덕도를 에워싸고 협박해서 4명을 구출한 적도 있다.)

 

원균은 부하들이 전멸당하는 걸 보고도 자기만 살겠다고 도망쳐서 영등포까지 간다. 714일 저녁에 영등포에 도착한 원균은 다음날 새벽에 출항하여 칠천량으로 들어가서 진을 치게 된다. 이때 배설은 한산도로 가자고 했지만 원균은 칠천량으로 이동한 것이다. 배설은 자기만 살기 위해서 자신의 배 12척을 데리고 도망쳐 버렸다. (12척이 나중에 이순신의 명랑해전에 귀중한 전력이 된다)

 

 

칠천량을 에워싼 일본군은 715일 밤 10시경에 2~5척을 보내서 조선의 척후선을 불태운다. 그리고 16일 새벽 4시에 일본 수군이 본격적으로 공격을 시도했다. 독안의 든 쥐 상황이 된 조선 수군은 크게 패하고 일본군의 포위망을 뚫고 도망을 친 조선 수군 중에 진해만으로 간 수군은 전멸당한다(이때 이억기, 최호 장군이 전사한다).

 

[이순신이 옥에 갇히자, 이억기가 이순신에게 보낸 편지]
수군은 오래지 않아 반드시 패할 것입니다. 우리들은 어디서 죽을지 모르겠습니다.”

 

원균은 춘원포 쪽으로 도망을 쳤다. 그리고 이곳에서 판옥선을 버리고 육지에 상륙해서 도망쳤는데, 고성 근처에서 일본군에게 잡혀서 최후를 맞이했다고 한다.

 

일본측 정한위략의 기록에 의하면 조선의 판옥선 122척을 격침시켰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출항 전 판옥선 134척 중에서 배설이 데리고 도망친 12척을 제외한 숫자와 맞아 떨어진다. 그리고 이 와중에 거북선 3척도 날려버렸다. 수군이 1만 여명이 전사하였다.

 

[해상록]
715일 왜장이 날린 군졸들을 모집해 작은 배를 타고 우리 군사와 함대의 동태를 살폈다. 우리 병사들은 잠에 취해 코를 골고 있었으므로 적들이 포 두 발을 발포했다. 우리 군사들은 몹시 당황하여 닻줄을 끊고 어찌할 바를 몰라 하자 적들이 병선을 타고 일거에 진격 한산도가 마침내 무너졌다.

 

[김완(1546~1607)의 용사일록]
지치지 않고 깃발을 휘날리며 나아가자 주장이 사례하며 말하기를
영공이 분발하여 싸우는 힘이 심히 크다직후 다시 주장이 말하기를
이억기, 최호가 간 곳을 모르고 영공만이 죽을 힘을 다해 적을 사로잡고자 하니 죽은 뒤에야 그만 둘 것이냐
나 역시 왼쪽 다리에 탄환을 맞아 위태하로 두려운 시점이었다. 큰 소리로 급히
주장! 주장! 어찌 나와서 구해주지 않는 것이오?”라고 불렀다.
그러나 주장 원균은 술에 취해 높이 누워 호령만 하였다.

 

김완은 당시 칠천량 해전에 출전한 조방장이었는데 일본군에게 잡혀서 포로로 끌려갔다가 탈출한 인물이다.

 

밤중에 적이 가만히 비거도 10여 척으로 우리 전선 사이를 뚫어 형세를 정탐하고 또 병선 5~6척으로 우리 진을 둘러쌌는데, 우리 복병선의 장수와 군사들은 모두 모르고 있었다. 이날 이른 아침에 복병선이 이미 적에게 불태워져 없어졌다. 원균이 크게 놀라 북을 치고 바라를 올리고 불화살을 쏘아 변을 알리는데, 문득 각 배의 옆에서 배가 충돌하여 총탄이 발사되니 군사들이 크게 놀라서 실색하였다. 난중잡록

 

이원익이 치계하기를 임진란 이후 분궤한 장군이 한 사람도 군법에 치죄되지 않아 오늘날 관습이 되어 보통으로 여깁니다. 이번에 수군은 처음부터 힘을 겨뤄 싸우다가 패한 것이 아니라 산 자나 죽은 자나 모두 도망하기에 바빴던 것입니다.”

 

청기원이 치계하였다... “그밖에는 모두 지레 물에 뛰어 들어 죽거나 혹은 해안으로 기어올라 도망하여 흩어지니 적들이 비웃으며 말하기를 우리가 조선 군사를 패망시킨 것이 아니라 조선 군사 스스로가 패망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조선 수군을 말도 안되는 작전(?)으로 궤멸시킨 원균... 그는 과연 칠천량에서 죽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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